Peter Farrelly | Green Book

3월 중순,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본 또다른 영화는 [그린북]이다. 이 영화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한 클래식/재즈 피아니스트 돈 셜리(Don Shirley)와 그가 미국의 남부(“Deep South”) 지역 순회공연을 위해 고용한 프랭크 발레롱가(Frank Vallelonga)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를 감독한 피터 패럴리의 전작들이 [덤 앤 더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와 같은 코메디물이고, 프랭크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Nick Vallelonga)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여 돈 셜리라는 실존 인물을 왜곡하여 다루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등, [그린북]을 둘러싼 잡음과 의구심이 상당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충분한 사회적 의미와 영화적 매력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의미라 함은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그리 가볍지 않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돈 셜리는 흑인이었고, 그가 발레롱가와 함께 남부지역을 여행한 때는 1960년대였다. 즉, 비교적 인종차별에서 자유로웠던 미 동북부 지역이나 서부 지역과 달리, 당시 우리가 ‘”Deep South”라고 부르는 남부 7개 주에서는 흑인이 백인 밀집지역을 돌아다니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때였다. 셜리가 클럽 기도 등 ‘해결사’ 역할로 생계를 유지하던 덩치 발레롱가를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로 고용한 이유도 이때문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공항에 내렸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곳에 남부군 깃발(Confederate Flag)이 걸려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고, 실제 친구 스캇의 결혼식 뒷풀이에서 그곳에 살던 몇몇 백인들이 나에게 다가와 “네가 들었던 악명과 비교해 실제 남부에 와보니 어때?” 라고 농담 반 진담 반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스캇의 성대한 결혼식에 참석한 아시안은 나 하나였다. 비록 지금은 흑인과 백인이 함께 길거리에서 공존할 수 있는 환경까지 조성이 되었다고 하지만, 흑인 입장에서 ‘내 조상이 저기 보이는 백인의 조상의 노예였다’ 라는 사실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며, 그건 백인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선거운동을 할 당시 흑인 인구비율이 가장 높은 이 남부지역에 한번도 오지 않았다는 기록은(그는 백인 인구비율이 압도적이었던 콜로라도나 아이오와 주에 10번 이상 들렸다), 그 많은 남부지역 흑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의 주인’이었던 농장주의 후손들이 지지하는 보수정당에 투표한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슬픈 통계지표일 것이다. [그린북]은 현재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미국 남부지역의 이 슬픈 사회적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로 접근한다. 물론 감독의 성향(..) 상 어이 없는 지점에서 도덕적 기준을 상실하는 순간도 발견되긴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밑도 끝도 없는 헤피엔딩’은 아닌 것이다.

재미도 있다. 전형적인 버디 무비가 될 뻔한 이 영화를 구워한 것은 다름 아닌 두 주연배우, 비고 모르텐슨(Viggo Mortenssen)과 마허샬라 알리(Marhershala Ali)다. 비고 모르텐슨은 아주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을 체득한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분해 돈 셜리와의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캐릭터를 훌륭히 연기해냈다. 물론 캐릭터의 전형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교양 없는 서민계층 백인이 훌륭한 음악에 감화되어 그동안 고수해온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꾼다는 설정도 약간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능청맞게 이탈리아식 영어 억양을 구사하는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문라이트]에서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마허샬라 알리는 [그린북]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역량에 걸맞는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연기하는 교양 넘치는 흑인 피아니스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연기 교본으로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돈 셜리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출발했지만 유리장벽 등으로 인해 그 바닥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그나마 흑인 뮤지션이 활동할 폭이 넓은 재즈/크로스오버 장르로 넘어왔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상당한 탄압을 받던 성정체성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대한 역사적 컨텍스트를 절제된 연기에 담아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걸 알리가 해냈다! 그의 연기를 보며 ‘탁월하다’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린북]은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헛점도 많고 한계도 분명하다. 생각보다 가볍다고 느끼는 관객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꽤 모범적인 수준에서 주제를 잘 형상화했고, 두 배우의 인상깊은 연기가 영화에 깊이를 더해주며 나쁘지 않은 영화적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Marielle Heller | Can You ever Forgive Me?

지난 3월 중순, 1박 4일(?)의 끔찍한 여정을 소화하며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다녀 왔다. 미국 유학시절 사귄 친구 스캇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는데, 학기 중이라 주말 밖에 시간을 내지 못해 기형적인 여정이 나와버렸다. 친한 친구의 행복한 날을 축복해주기 위해서라면 얼마를 쓰든 며칠을 길 위에서 허비하든 크게 개의치 않지만, 이제 더이상 청년이라고 우길 수 없는 나이대로 접어들어서인지 육체적으로 쌓이는 피로는 피할 길이 없었다. 비행기 소음에 취약해 기내에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까지 겹쳐져 이번 여행은 오고 가는 길이 유난히 힘들었다. 덕분에(..) 기내에서 많은 영화를 보았는데, 지금까지 생각나는 영화가 몇 편 있다. 그 중 하나가 실존인물이 직접 쓴 회고록을 기반으로 만든 [Can You ever Forgive Me?]다.

영화속 리 이스라엘(Lee Israel)은 괴팍한 성격을 가진 실패한 작가다. 일은 잘 풀리지 않고 술만 늘어간다. 비사교적인 성격은 그를 점점 고립시킨다. 그녀의 삶에 작지 않은 변화를 불러일으킨 건 우연히 발견한 유명작가의 서명이 들어간 편지였다. 중고서점 등을 통해 유명작가의 서명이 들어간 편지가 고가에 거래된다는 사실을 알아낸 리 이스라엘은 작가적 능력을 발휘하며 직접 위조편지를 작성하여 여러 서점에 팔아 넘기기 시작한다. 명백한 범죄인 셈인데, 영화는 당연히 순리에 맞는 결말로 침착하게 나아간다. 큰 반전 없이 처벌을 받게 된 주인공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그녀를 위로해주던 하나 뿐인 게이 친구가 에이즈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개인적인 고통도 경험한다. 사실 특별할 것 없이 뻔한 이 영화를 피로가 켜켜이 쌓인 빨간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본 이유는 주인공 리 이스라엘 역을 소화한 배우 멜리사 맥카시(Melissa McCarthy)의 연기때문이다. 그녀의 연기는 너무도 탁월하여 알콜 중독에 성격까지 고약한 범죄자 여성을 특별한 캐릭터로 탈바꿈시켜버린다. 영화는 결코 리 이스라엘의 삶에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지만, 맥카시의 연기를 통해 한번쯤 주변에 있을 법한 이웃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영화에서 연기자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조던 필 | 어스(2019)

[겟아웃]으로 세상을 놀래킨 감독 조던 필(Jordan Peele)의 신작 [어스(Us)]는 국내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본 영화다. 아내와 함께 [겟아웃]을 보았을 때 꽤 신선하고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조던 필의 신작을 손꼽아 기다리던 터였다. [어스]는 그의 담대한 시선이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을 때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전작이 서스펜스의 형식을 띠고 있다면 [어스]는 조금 더 기존 공포영화의 틀에 가까운 외형을 띠고 있다. 관객 심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장르적 특성을 십분 발휘하여 서사를 본인이 원하는 지점까지 무리 없이 끌고 간 후, 영화가 품고 있는 가장 큰 반전을 영화의 주제의식과 한 몸처럼 꽉 끼워맞추는 재주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점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제목 [어스(Us)]는 주인공 가족, 그리고 그 가족과 대립하는 또다른 가족을 구분 짓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The United States)을 상징하는 약어(US)로도 읽힌다는 점에서 감독이 영화에서 제기하고 싶어했을 미국사회의 양면성, 즉 계급 갈등과 인종 갈등 문제에 대해 머뭇거리는 태도 등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영화는 비록 끔찍한 비극으로 마무리되지만, 조던 필 특유의 낄낄거리게 만드는 유머는 이번에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미국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수록 그의 디테일한 비유와 풍자가 영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요즘 사회에 꼭 필요한 감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트럼프로 대변되는 미국 주류 백인사회에 대항하는 공격수로 이만한 예술가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극장 밖을 나선 후에도 꽤 오랜 기간 곱씹어볼만한 이슈를 제시한다. 영화라는 장르를 이용하여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고민할 때 가장 먼저 참고해야 할 레퍼런스다. 주인공 역을 맡은 루피타 은용고(Lupita Nyong’o)의 참담한 표정과 목소리가 아직도 생각난다.

수잔 존슨 |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2018년 넷플릭스 월드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았던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화제성만큼 충분히 귀엽고 재미있는 영화다. 한국계 작가 제니 한(Jenny Han)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영화적 상상력이라는 방어막을 영리하게 활용하며 십대 소녀의 달뜬 마음을 유쾌하고 거침없이 풀어낸다. 주인공 라라 진은 한국계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지만 백인 아버지, 두 자매와 함께 씩씩하게 생활하는 전형적인 아시안-어메리칸 십대 소녀다. 주인공의 ‘전형성’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하게 드러나는데, 이건 백인 주류사회가 바라보는 모습이기도 하고 실제 한국계 미국인 학생들이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나름의 당위성을 부여받는 측면이 크다. 라라 진 뿐 아니라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주요 캐릭터들이 사회적 관습과 고정관념에 기반한 전형성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데, 겉으로는 자상한 아버지이지만 딸들의 개인사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백인 가장 아버지, 백인-미남-운동선수-인기남 vs (역시)백인-(역시)미남-내성적인 독서광-비인기남 구도의 남자친구 선택 결정 과정, 주인공의 든든한 지원군인 친구들은 화장을 짙게 한 별난 동성친구와 흑인-게이 이성친구라는 점 등이 그러하다. 물론 영화는 이런 전형성을 그대로 물려받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문화적 관습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면서 캐릭터 구성에 쏟을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한편, 서사구조를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비트는 쪽에 집중하여 나름의 독창성을 구현해냈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사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객의 ‘공감’일텐데, 그 부분에서 훌륭하게 성공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곁가지 없이 깔끔하게 구성된 서사구조 위에 주인공 역을 맡은 베트남계 라나 콘도르(Lana Condor)가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다.

알폰소 쿠아론 | 로마

내가 근무하는 대학교의 단과대학 건물에는 네 개 학과가 함께 살림살이를 꾸리고 있다. 학교로 적을 옮긴 후 고개 숙여 인사하는 대상이 확 줄어들었다. 교수끼리 고개 숙여 인사할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학교 복도에서 청소하는 중년의 여성을 만날 때다. 나는 아직도 복도와 화장실을 청소하는 그들이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일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지만(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삶에 대한 애착과 고단함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함을 온 몸으로 드러낼 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경기침체와 빈부격차 확대, 질좋은 일자리의 감소 등 거시경제의 부정적 여파가 미시적 개인의 삶 속으로 파고들 때 가장 앞자리에서 그 고통을 온 몸으로 견디어 내야 하는 계층은 항상 성인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고 늘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 왔다. 사회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한 노동자 여성의 숭고함에 존경심을 표하는 길에는 그래서 한계가 없어야 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그래비티]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자 [이투마마] 이후 멕시코로 돌아가 스페인어 – 와 멕시코 원주민어 – 로 찍은 첫번째 영화, 그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극소수의 극장에서만 개봉한 뒤 넷플릭스 스트리밍으로 공개한 영화. 이 때문에 깐느 영화제와 출품 자격 문제로 시비를 겪었고 마침내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개되어 심사위원 전원일치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화제작. 심지어 쿠아론 본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은 영화라는 소식까지. [로마]는 최초 공개 시점부터 꼭 보고 싶었던 영화였고, 항상 위시리스트 첫머리에 위치한 영화였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보았다!

[로마]는 흑백영화다. 배경음악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파노라마로 넓게 펼쳐진 화면 안에서 카메라는 흔들리지 않고 횡으로(그리고 가끔은 종으로) 조용히 움직인다. 그래서 영화의처음부터 끝까지 관조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으며 오로지 영화의 주인공에 집중하게 만든다. 영화의 주인공은 클레오, 멕시코시티 로마 지역의 한 중산층 가정에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이다. [로마]는 클레오에 대한 이야기다. 클레오의 캐릭터는 이 영화의 감독인 알폰소 쿠아론이 유년 시절 시간을 함께 보낸 가정부 로비 로드리게즈를 모델로 탄생했다. 감독은 50년 쯤 전 기억을 꺼내어 이를 영화로 재현했다. 클레오와 그녀가 보살피는 가정이 사는 집은 쿠아론이 어렸을 때 살던 집을 그대로 본따 제작했으며, 심지어 그 집 안에 있는 소품들은 쿠아론의 가족이 쓰던 것들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전적으로 개인의 기억에 기대어 제작된 영화이지만 영화의 시선이 무척 객관적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쿠아론이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안으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부유한 중산층 가정과 그 가정 안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는 하위 계급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최근 개봉한 [기생충]과 서사적으로 맞닿아 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기생충]이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반복하며 계급 갈등 문제를 노골적으로 비꼬는 방향을 택했다면, [로마]는 횡으로 가지런하게 움직이는 카메라만큼이나 계급 간 갈등보다는 수평적인 ‘관계’에 보다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영화 속 클레오는 고용인 부부의 아이들과 평화롭게 어울린다. 아이들은 부모보다 클레오를 더 많이 따르고, 클레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이도 고용인들이다. 즉, 이 영화는 멕시코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빈부격차 문제에서 눈을 돌리지 않지만, 일차원적으로 그 갈등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문제가 개인의 삶에서 극복되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남자에게 버림받은 두 여성이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클레오는 영화 속에서 큰 개인적인 슬픔을 겪게 되는데, 그 사건 이후 슬픔 안으로 가라앉지 않고 고용인의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지속적으로 나누어준다. 이를 통해 [로마]는 쿠아론이 자신의 유년 시절을 가꾸어준 보모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헌사이자, 그녀로 상징되는 노동자 여성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깊게 스며든 영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영화는 빈부격차 문제 외에도 멕시코의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의 절정 부분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주요한 배경이 되는 사건은 시위 도중 120명이 학살된 ‘성체축일 대학살’ 사건인데, 가구점에서 주인공 클레오를 어려움에 몰아 넣은 남성과 마주치는 장면, 이후 병원에서 겪게 되는 클레오의 개인적인 비극 등과 합쳐져 상당한 감정적 파고를 이끌어낸다. [로마]가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되 회고적인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인 차원으로 이야기를 확장하여 극복의 서사를 제시하는 과정은 사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암시되어 있다. 클레오와 중산층 가정이 사는 집의 현관 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개똥들과 이를 물로 깨끗히 씻어내려는 클레오의 청소 장면이 바로 이 영화가 던지는 주제의식을 단적으로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아마도, 내가 추측하기에, 한 사회가 봉착한 어려움이 개인의 삶으로 스며들어 그들을 괴롭힐 수 있지만, 이와 반대 방향으로 에너지의 흐름이 움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즉, 사회는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반대로 개인의 작은 몸짓의 집단적 결합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쿠아론이 바라보는 대상, 클레오는 아마도 그 다른 흐름의 실마리는 제시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극복’의 서사의 한 가운데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사랑이다. 클레오가 가진 한없이 선한 마음과 그녀가 주변의 타인들에게 나누어주는 아낌 없는 사랑. 산불이 났는데도 술잔을 들고 나와 노래를 부르는 한심한 상위계급이 심화시키는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마도, 지하의 허름한 술집에서 새해를 축복하기 위해 일꾼들이 나누어 마시는 따뜻한 술잔, 혹은 그 술잔에 담긴 사랑과 연대의 마음이 아닐까. 쿠아론은 [로마]에서 유년 시절의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한 여성에게 끝없는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는 한편, 이와 동시에 자신의 뿌리인 멕시코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들을 이 여성과 그녀가 속한 노동자 계급이 가진 숭고한 연대와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넌지시 전달하고 있다. 이 덕분에 영화는 다른 차원으로 승화한다. 더이상 개인의 회고록이 아닌, 영화사 전체에 걸쳐 큰 의미를 가지는 엄청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걸 극장이 아니라 넷플릭스 플랫폼으로 본다는 경험도 흥미롭다. 소파에 앉아, 가족과 함께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감독이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영화의 주제의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알폰소 쿠아론을 ‘작가’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영화로 인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어서 감사합니다.

코엔 형제 | 카우보이의 노래

코엔 형제의 신작이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들답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작업을 마다하지 않고 전에 경험해보지 않은 방식의 제안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왔던 그들의 성향을 기억해본다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한 작품이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단편 모음집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역시 그럴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 [허드서커 대리인] 등을 통해 수많은 시대극을 능수능란하게 만지는 재주를 널리 인정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신작이 ‘너무 그들답다’라고 생각했고, 작품마다 질적 수준의 편차가 몹시 큰 코엔 형제의 영화에 전형적이라는 딱지표가 붙었다면 굳이 찾아서 볼 이유는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결국 이 작품을 보고야 말았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락스타(Rockstar)에서 발매한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 2] 때문이고, 둘째로 넷플릭스에서 내 취향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집요하게 이 영화를 추천해주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총 여섯편의 중,단편 영화로 구성되어 있다. 형식적으로는 단편 소설이 영상화되는 모양새를 띠고 있는데, 실제로 원작 소설이 있는 꼭지도 꽤 된다고 한다. 문학작품을 영화의 언어로 옮기는 일은 코엔 형제가 내세울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재능 중 하나다. (이 역시 너어무 그들답다!) 영화의 원제는 [The Ballad of Buster Scruggs], 영화의 첫번째 에피소드 제목과 같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섯개의 에피소드는 저 멀리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그’ 서부시대의 모습을 예쁘게 포장하여 보여준다. 무법천지에서 만용과 자만이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첫번째 에피소드를 지나 기쁨과 절망이 한끝차이로 스쳐지나가는 두번째 에피소드에 다다르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청소년 버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팔, 다리가 없는 주인공이 화면을 지배하는 세번째 에피소드와 서부의 눈부신 자연풍광을 아름답게 잡아낸 네번째 에피소드는 각각 다른 의미에서 시각적인 강렬함을 선사한다. 코엔 형제의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아이러니’를 가장 직설적으로 드러내는건 다섯번째 에피소드다.

개인적으로 코엔 형제가 가진 가장 뛰어난 영화적 재능은 앞서 언급한 각색 능력, 그리고 아주 단순한 서사조차 박진감 있게 탈바꿈 시키는 편집 능력, 마지막으로 뛰어난 음악적 감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세 능력의 공통점을 꼽자면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극의 흐름이 실제로 빠른지 여부와 상관없이 변박, 혹은 엇박처럼 느껴지는 특유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시청자로 하여금 극에 몰입하게 만드는 꽤 그럴듯한 최면술을 부리는 셈이다. 이 바탕 위에, 독특한 블랙 코미디 정서와 지금까지 코엔 형제가 만든 모든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의식, 즉 ‘우연과 비논리성에 의해 점거된 일상의 불가해함’이 합쳐져 비로소 코엔 월드가 완성된다. 그래서 코엔 형제의 영화는 컨디션을 유난히 많이 탄다. 컨디션이 좋을 때 만들었던 [그남자는 거기 없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인사이드 르윈]은 영화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세계이자 예술작품이었다. 하지만 [헤일 시저!],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 [시리어스 맨]은 도저히 끝까지 볼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하고 따분했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컨디션이 좋은 코엔과 나쁜 코엔을 모두 품고 있다. 처음에서 끝으로 갈수록 리듬이 점점 사라지고 재미없어 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첫번째 에피소드와 두번째 에피소드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감독의 숨결이 살아 있다. 세번째와 네번째 에피소드는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그나마 시각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변명이 존재한다. 하지만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에피소드는 너무나 재미없고 따분한 나머지 차마 끝까지 볼 수 없었다. 카메라는 게으르게 움직이고 대본은 성의 없이 쓰인 티가 난다. 집중하지 못한 티가 난다. 결국 이 영화는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을 통해 집 안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적당히 휴대폰으로 딴짓하며 보기에 좋은 영화가 되어 버렸다.

The National | I am Easy to Find

더 내셔널(The National)의 신보 [I am Easy to Find]는 [비기너스(Beginners)]와 [우리들의 20세기(20th Century Women)]를 감독한 마이크 밀스(Mike Mills)가 감독한 동명의 단편영화의 영화음악, 즉 OST의 형식으로 발매되었다. 그러니까 우선 영화를 봐야 하는 셈이다.

[Sleep Well Beast] 투어를 2년 넘게 소화한 밴드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고갈된 상태였고, 밴드의 계획에는 장기간 휴식(hiatus)이 잠정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던 와중 [우리들의 20세기]를 마친 마이크 밀스와 밴드의 보컬리스트 맷 버닌저(Matt Berninger)가 만나 함께 “비디오를 하나” 찍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밴드의 작곡을 책임지는 데스너 형제가 달라붙어 드랍박스를 통해 음악과 영상 콘티를 밀스 감독과 주고 받기에 이르렀다. 작업을 구상하던 감독에게 다정하게 접근하여 로비를 펼친 배우가 하나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알리시아 비칸데르(Alicia Vikander)다. 이 영화는 밀스 감독이 그의 전작에서 즐겨 사용한 영화적 기법, 즉 주인공의 개인사를 시대사와 뒤섞어 일종의 콜라쥬 형식으로 ‘전시’하는 방식을 극대화하고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의 무성영화처럼 진행되며 한 여성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갓난 아기부터 죽기 전 늙은 여성까지 모두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분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화한다. 영화의 내용은 전형적인 밀스표 ‘인생 회고전’이다. 감독은 별다를 것 없는 인생을 살아간 한 여성의 삶을 담담히 복기함으로써 그 안에 큰 호흡 하나를 불어 넣으려고 한다. ‘여전하다’라고 칭찬할 수도 있고 ‘지루하다’라고 불평할 수도 있는, 변하지 않는 감독의 색깔이 그대로 뭍어 있다.

영화 내내 내셔널의 음악이 주인공처럼 전면에 등장하며, 배우들의 대사는 아주 가끔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에서 처리된다. 이 쯤 되면 밀스 감독의 영상에 내셔널의 음악이 덧입혀진 것이 아니라 -밀스 감독의 인터뷰에서 발견할 수 있듯- 내셔널의 음악에 영상을 맞춘 것처럼 보일 정도다. 사실 내셔널의 음악과 밀스의 영상이 기대했던 것만큼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호흡을 주고 받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밀스의 영상은 내셔널의 음악보다 훨씬 더 차분하고 고요한 편이어서, 20분이 조금 넘는 시간 내내 음악의 리듬이 영상보다 훨씬 앞서나가 보는 사람의 숨이 가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내셔널의 음악이 구린 것은 아니다. 다만 전작들과 색깔이 많이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게 해두고 싶다. 이 음반은 일종의 사이드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물론 밴드는 이 음반도 정규음반에 포함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전작과의 연속성을 고려하기 보다는 새로운 뮤지션들과의 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캐린 베서(Carin Besser)가 음반의 모든 곡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거의 모든 트랙이 버닌저와 여성 보컬리스트의 듀엣으로 불리워진다. 상당히 많은 여성 보컬리스트가 참여했다: 가장 많은 노래를 부른 게일 앤 돌시(Gail Ann Dorsey), 리사 해니건(!), 샤론 반 에뗀(!!), 이브 오웬(Eve Owen), 케이트 스테이블스(Kate Stables) 등 7명의 여성 보컬리스트와 브루클린 소년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까지 참여했다. 음반의 색깔은 전작보다 밝고, 훨씬 밝고, 풍성하고, 훨씬 풍성하다. 그래서 내셔널의 골수팬들은 이 음반을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발전이 전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뮤지션들과의 협업은 통일된 분위기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항상 앞으로만 직진하는 느낌으로 진화를 거듭해왔던 밴드의 음악에 오점으로 남을 수도 있는 시도인 셈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좋게 들었다. 먼저 첫째, 밝은 내셔널의 음악도 충분히 환영할만 하다. [Sleep Well Beast]에서 무너져가는 미국사회에 대한 근심과 연민을 한껏 담아낸 덕분에 역대급으로 어두웠던 내셔널의 음악세계가 여성 보컬리스트들의 목소리와 함께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둘째, 다른 그 어떤 내셔널의 음악보다 훨씬 가시적이고(picturesque) 영화적(cinematographic)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실패한 시도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충분히 해볼만한 시도였고, 모든 멤버가 완전히 지쳐 나가 떨어진 시점에서 밴드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있는 시도였다. 셋째, 이번 음반에서도 “I am Easy to Find”와 같은 명곡이 많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디스코그래피로 기억될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재미있는 시도였고, 꽤 좋은 결과물로 돌아왔다.

조쉬 쿨리 | 토이스토리4

[토이스토리3]에서 사실상 시리즈의 결말을 그린 듯 보였던 이 시리즈가 4번째 편으로 돌아왔다. 이미 마음 속에서 공식적인 이별 절차를 거쳤다고 생각한지라 시리즈의 새로운 작품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약간 뜨악하긴 했다. 하지만 시리즈에 대한 믿음이 워낙 굳건했던지라 영화를 보러 가기 까지의 장벽은 거의 없었다. [토이스토리4]는 시리즈의 장점을 잘 계승하면서 현 시대상을 매끄럽게 담아내고 있다. [토이스토리] 시리즈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을 정도로 딱 모범적인 수준의 철학 및 윤리관을 보여왔다. (톰 행크스가 출연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그러하다. 혁신은 기대할 수 없지만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구린 철학을 보여주지는 않는..) [토이스토리4]에는 진취적인 여성상이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전작들과의 차이점이 존재하며, 흑인 악센트를 구사하는 인형들이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Us]를 감독한 조던 필(Jordan Peele)이 그 중 하나를 연기했다. 필 감독 특유의 뒤틀린 유머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토이스토리]의 밝은 분위기와 묘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재미있다) 다양성을 획득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 역시 느껴진다. 주인공이 ‘집’에 머무르지 않고 ‘집 밖’의 세계를 유영한다는 줄거리는 선택된 주인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장난감들의 이야기인 이 시리즈를 마무리짓기 위한 최고의 선택처럼 보여진다. 유년 시절의 장난감들의 이야기라는 시리즈의 큰 주제때문에 회고적인 성격이 짙게 드리워져 확장성에 있어 한계가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네번째 작품은 확실하게 그어진 선 안에서 안전하게 뛰어노는 어린 아이들 마냥 가장 잘하는 한두가지에 집중하는 영리함을 가지고 있다. 이 시리즈의 주고객인 어린이, 청소년들로 하여금 다양성과 평등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학습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영화가 갖는 미덕이 결코 작지 않다.

봉준호 | 기생충

[기생충]은 잘 만든 영화다. 이 영화의 장점, 혹은 미덕에 대해서는 많은 매체에서 저명한 평론가들을 동원하여 쉴새없이 이야기할 것이니 이 블로그에서 중언부언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설국열차]에서 수평의 구조를 통해 계급주의에 대해 이야기한 봉준호는 [기생충]에서 같은 이야기를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반복 사용하며 수직의 구조 안에 풀어냈다. 다만 계급에 대한 미시적인 관찰과 이를 일반화시켜 확장시키는 ‘관객 설득’ 과정이, 일종의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형식의 한계에 갇혀 있던 [설국열차]에는 부재한 반면 그 어떤 제약도 없이 마음껏 ‘봉준호 월드’를 펼쳐 보일 수 있었던 [기생충]에서는 확연하게 드러났다는 점이 유의미한 차이가 될 것 같다. 권위 있는 상을 받을 만큼 충분히 잘 만든 영화고,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만들어놓고도 관객들로 하여금 낄낄 거리게 만드는 특유의 위트도 [플란다스의 개] 시절부터 간직해온 봉준호만의 특장점이라는 측면에서 반가웠다. 특히 지하실로 내려가면서부터 확 달라지는 영화의 공기에도 불구 머뭇거림 없이 이야기를 확장, 전개시켜 나가는 영화의 호흡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예술영화’와 ‘오락영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cinema’이기도 하고 ‘movie’이기도 한데, 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에너지의 원천이 ‘한국영화’가 발전시켜온 고유한 장기라는 점에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다만, 나는 [버닝]에서 느꼈던 불안감을 이 영화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다는 점을 고백해야 겠다. [버닝]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영화이고, 그 젊은이들이 겪는 계급의 장벽에 대한 영화다. [기생충]에서 두 다른 계급의 가족을 만나게 해주는 연결고리는 4수 끝에 대학 입시에 실패한 젊은 백수 아들이다. 즉 [기생충] 역시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에 대한 영화, 혹은 그 젊은이가 -아무리 “계획”를 잘 세운다고 해도-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계급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버닝]과 [기생충]은 동시대 한국영화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수작이지만, ‘어른’이 만든 영화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현시대의 젊은 세대에 대한 어른의 근심을 보수적인 시각에 담아 펼쳐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충분히 근심스러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기생충]을 보는 내내 서울의 반지하에 살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걱정스러웠다. 영화에 등장하는 젊은 남매는 어려운 순간에도 관객을 웃길줄 아는 여유로움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진짜 20대 젊은이들은 속옷이 고기냄새에 절 때까지 파트타임을 뛰느라 정작 기말고사를 위해 공부할 시간은 확보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이 연구실로 찾아왔을 때 내가 “알바 하지 말고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 쓰고, 일할 시간에 차라리 공부를 좀 더 해라”라고 충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위선이며, 그것은 충고하는 자가 사회적 연대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자위행위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그런 느낌의 영화다. 젊은 세대에 대한 어른의 위로가 피상적이라고 판단한다면, 그 이유는 위로를 받는 대상이 느끼는 감정의 본질에서부터 찾아야 한다. 심지어 [기생충]은 구체적이며 깊은 위로의 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나를 더 근심케 한다. 영화에서 구현하는 세계, 혹은 영화가 견지하는 태도가 ‘위로조차 하지 않는 어른의 모습’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이라면, 그 근심의 크기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다.

애나 보든, 라이언 플렉 | 캡틴 마블

[캡틴 마블] 포스터

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소위 DC니 마블이니 하는 그런 류의 히어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예술적으로 전혀 새롭지 않은 형식을 차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적으로도 흥미롭지 않다. 일차원적인 캐릭터와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갈 때부터 예측할 수 있는 단순한 서사구조는 영화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단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런 류의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영화를 예술이 아닌 산업-상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상품이 또 어디있나 싶다.

하지만 [캡틴 마블]은 꼭 보고 싶었다. 이 영화의 관람 여부가 엉뚱하게 ‘페미니즘’ 분쟁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조차 찻잔 속 태풍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역을 맡은 브리 라슨이 과거에 한 발언 등에 근거하여 불매운동을 벌이는 젊은 남성층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반드시 이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동했다.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다른 히어로 영화들이 가진 단점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지만, 딱 하나, 브리 라슨의 연기력만으로 이 영화는 구원받기에 충분하다. 기존에 보지 못한 복합적이고도 흥미로운 성격의 여성 히어로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브리 라슨의 연기력이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뒤뚱뒤뚱 뛰는 모습이 히어로답지 못하다”는 비판을 한 기성언론에서 읽을 수 있었는데, 이런 류의 시선이야말로 페미니즘과 여성주의 문화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한 보수적 남성주의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라슨이 연기한 캐럴 댄버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그 캐릭터의 과거와 현재에 의해 중첩된 성격의 면면을 읽을 수 있었다. 뒤뚱거리며 뛰는 모습을 예로 들면, 캐릭터가 가진 불완전한 성장배경과 다혈질(이지만 섬세하기도 한 복합적인) 성격 등에 의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브리 라슨은 아주 엉성한 영화에서 매우 섬세하게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이 영화에서 볼만했던 것은 그거 딱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