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바움백 | 위아영

노아 바움백이 2014년에 내놓은 영화의 원제는 [While We’re Young]이다. 한국어 제목은 안일하게 급조한 듯한 느낌의 [위아영]인데, 접속사 하나 빠졌다고 뭐가 그리 많이 달라지겠냐고 담당직원은 항변할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알 수 있듯 원제의 의미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가 바움백의 전작 [프란시스 하]와 같은 수작이었다면 한국 배급사(혹은 이 번역과 관련된 누군가)의 무식함에 치를 떨었겠지만, 다행히(?) 영화가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라 이조차 별 것 아니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노아 바움백은 [프란시스 하] 이후 거의 아무런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웨스 앤더슨의 친구로 유명세를 떨치던(..) 시기가 오히려 전성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프란시스 하] 앞뒤로 자리잡은 그의 필모그래피가 ‘게으름이 재능을 갉아먹는 예술가의 아주 좋은 예’의 위치를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지라 차라리 웨스 앤더슨과 함께 작업했던 그 시절이 오히려 조금 더 부지런하고 명민해보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결혼이야기]가 그나마 기대되는 이유는 아담 드라이버와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걸출한 배우가 바움백의 멱살을 끌고 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며,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움백의 거의 유일한 성공작인 [프란시스 하] 역시 그레타 거윅이 원맨쇼에 가깝게 현란한 재능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가기 때문이다.

[위아영]은 [프란시스 하] 이후 공개한 첫 작품이기에 실망이 더 컸다. 최근 내 무릎 위에서 잠든 아내가 관여하지 않는 가운데 조용한 분위기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아는데, 다시 봐도 서사구조는 어지럽게 꼬여 있고 통찰력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화면이 엄청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영화적 리듬은 종종 축 늘어져 보는 이를 괴롭게 한다. 그나마 이 영화를 살려주는 구성요소는 역시 배우들일텐데, 특히 아담 드라이버는 이 영화에서 상당히 평면적인 캐릭터를 부여받아 고군분투한다. 이후 급격한 속도로 성장한 그의 배우 커리어를 고려하면 [결혼 이야기]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약간 기대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벤 스틸러, 나오미 왓츠, 아만다 사이프리드, 아담 호로비츠 등 평균 이상의 연기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연기자들은 각자 커리어에서 구축한 고정된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무난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이정도 캐스팅을 가지고 색다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걸 보면 역시 이 영화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 것 같다.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안드는 부분은 출산-육아를 선택한 부부와 주인공 부부를 대비해 보여주며 대립관계를 한참 열심히 형성하더니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이상한 방식으로 화합을 꾀하는 감독의 안일함이다. 중년의 부부에게 찾아오는 직접적인 위기는 노안도, 신경통도 아닌 정신적인 부분에서 오는 위기의식과 불안감일텐데, 그것을 힙스터 커플의 속임수로 간단하게 치환해 버리는 시도는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 해도, 결국 주인공 부부가 안착하는 곳이 기성사회가 형성한 관습과 규칙을 충실히 따르기 위한 적당한 멋부림 정도라면 이만저만한 실망이 아닐 수 없다. 뉴욕 한복판에 사는 40대 부부가 아이티에서 흑인 아이를 입양한다는 결론은, 문화적 컨텍스트를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해봐도,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최대한의 관용을 베푼다 해도, 여전히 감독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게으름의 소산이라는 해석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암자드 아부 알라라 | 너는 스무살에 죽을거야

우리 부부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유일한 영화는 수단에서 온 [너는 스무살에 죽을거야]였다. 유럽에서 공부한 젊은 수단 감독이 프랑스 등 많은 국가의 자본의 도움을 받아 만든 영화였는데, 스무살에 죽을거라는 예언을 받고 태어난 한 남자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겪는 성장담이 주된 서사구조라고 할 수 있다. 정적인 화면에 담긴 황량한 사막의 풍경은 죽을 것을 알고 태어난 소년의 텅 빈 마음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소년은 빼앗긴 미래가 현재를 갉아먹는 구조에서 나름의 방황을 거치며 조금씩 성장해간다. 그런 주인공에게 생명의 공기를 불어넣어주는 존재로 강인한 의지를 가진 어머니와 종교에 속박당한 마을에서 서구사회의 문물을 전달해주는 삐딱한 존재인 동네 아저씨가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중 가장 진취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주인공의 어머니는 아들의 불행한 미래를 감당할 수 없어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아버지와 크게 대비되는데,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가며 아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주인공이 우연히 만나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동네 아저씨는 수단의 현재를 상징하는 비유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는데,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수단의 민주화운동 인사들에 대한 헌사에서 이 인물이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주인공 소년은 암울한 수단의 현재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일부 진취적인 사람들의 열망을 품고 있는 존재이며, 상대적으로 더 열려있는 서구사회를 목적지로 하여 어머니로 상징되는 유무형의 유산을 발판삼아 결국 죽음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에 이른다. 아내가 전해준 말처럼 유럽출신 감독이 만든 아프리카 영화의 전형성을 답습하고 있으며, 선진국의 자본, 그리고 다국적 자본이 개입할 경우 영화의 메시지가 얼마나 ‘정치적 올바름’에 갇혀 뭉툭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처럼 느껴졌다.

토드 필립스 | 조커

영화 포스터에 감독의 이름보다 배우의 이름이 더 큼지막하게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커]는 호아킨 피닉스의 원맨쇼를 유희적으로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는 작은 얼굴 근육 하나부터 전체적인 몸짓의 형상까지 촘촘하게 설계하고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무엇을? 조커의 그것을. [조커]는 피닉스의 연기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며 조커가 악당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던 가난한 청년이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부모의 학대로부터 시작된 비극의 크기가 비정한 고담시의 현실과 맞닿아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나 머릿속 이성을 지배하게 되어버린다는 서사구조는 새롭지 않다. 오히려 만화에서 영화로 넘어온 히어로물의 흔한 성장담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 서사를 ‘평범한 개인이 우연한 계기를 통해 능력을 깨닫고 특별한 행동을 행하게 되어 대중을 주목을 받게 된다’고 짤막하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나, [조커]는 흔한 영웅, 혹은 반영웅의 서사가 아니다. 윤리적인 부분을 깊게 고려하지 않고 감성적인 부분에 호소하며 만들어진, 상당히 위험하고 불안정한 영화다.

피닉스의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를테니, 차라리 짧게 줄이는 편을 택하겠다. 그는 좋은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최고의 연기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한국영화적 연기를 했다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영화의 구조적 결점을 배우의 에너지를 갈아넣어 메우려는 의도가 느껴져 박수를 아주 세게 쳐줄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조커를 완벽하게 재창조해냈지만, 그의 조커-아서 플렉 캐릭터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창조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그는 그냥 조커였는데, 매우 뛰어난 연기를 펼쳤을 뿐이다. 대중이 여러 영화로부터 ‘교육’받은 조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혹은 ‘배트맨’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조커의 최종적 캐릭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상상하며 만들어진 조커의 초기 모습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며 그다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영화의 첫장면부터 영화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흐름으로 2차원 직선 위에서 진행되는데, 이 영화는 사실상 조커-아서 플렉의 내면의 변화를 다루고 있으므로 조커의 캐릭터 자체가 2차원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커는 누구인가? 만화책의 유명한 캐릭터다. 마블과 DC코믹스가 본격적으로 종이에서 벗어나 필름으로 그 판을 옮긴 후 히어로물 영화는 오히려 더 만화적으로 변했다. 영화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만화책의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만화책에서 팬들이 읽었던 장면을 영화속에서 재현해내는 것에 충실한 나머지, 오히려 영화적인 혁신은 둔화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마블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블의 오랜 팬들은 가슴이 두근거리겠지만, 그냥 보통의 영화를 좋아하는 나의 눈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CG로 떡칠된 장면들이 새로운 영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만화책 속 장면의 재현에 그칠 때 힘이 쭉 빠진다. 돈이 또 이렇게 낭비됐구나 싶다. 그 와중에 서사구조는 점점 더 빈약해졌다. 마블영화에서 제대로 된 서사를 보여준 영화는 사실 거의 없다. 그들이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든지 10년이 넘었는데 앞서 언급한 ‘평범한 개인이 블라블라~’ 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굳이 예외를 찾자면 [다크나이트] 시리즈 정도일텐데, 이조차 나는 사람들의 열렬한 숭배를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 열광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만든 배트맨 시리즈 3편이 썩 괜찮게 만든 오락영화 수준이라는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튼, 조커는 이런 흐름 위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캐릭터이고 아마도 가장 사랑받는 악역일텐데, [조커]는 대중이 궁금해하는 그 지점, 히어로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당의 탄생비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상업적이고, 충분히 자극적이며, 적당히 자연스러운 시나리오와 정말 좋은 배우의 연기만 합쳐지면 박스오피스 1위는 거뜬히 가능하겠다, 싶은 그런 영화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다.

[조커]에 대해 비판할 지점은 참으로 많지만, 가장 중요한 딱 하나만 언급해야 한다면 윤리성의 결여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며, 현실이 존재하지 않으면 영화도 존재할 수 없다. 현실에서 사회적 구성원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맺어진 윤리적 합의가 영화로 옮겨진다고 해서 완전히 새롭게 재정의될 수 없는 이유다. 이 영화는 마지막에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어 반영웅으로서 폭도들의 찬양을 받는 것을 보여주는데, 일반인이 살인자가 되어가는 심리적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건 [조커]가 지난 10여년의 기간동안 대중이 반복적으로 교육받은 히어로물 영화의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관객은 그가 자신의 힘을 폭발시키게 되는 과정에서 많은 외부적 요인이 있음을 반복적으로 주입받게 된다. 그 결과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한다. 이게 지나친 비약이라면, ‘영화 모방 범죄’를 구글에서 검색하도록 하자.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강력한 전달매체다. 두시간여의 시간동안 어두운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커다란 화면을 통해 아서 플렉의 ‘성장담’을 보게 되면 그의 악마성에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영화적으로 새로울 것이 없는 뻔한 서사구조를 만든 감독이 배우의 미친듯한 연기력에 떼를 쓰며 만들어낸 결과가 윤리적으로 아주 얄팍한 영화라면, 마음이 상당히 불쾌해진다. [위플래쉬]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런 류의 영화는 조금 더 많이 비판받아야 한다.

심지어 이 영화는 조커 캐릭터를 알뜰살뜰하게 보살피지도 못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고, 그 결과 의도와 상관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는 정신병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직장과 사회로부터 차별받고 핍박받는 와중에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때문에 머릿속 정신병이 점점 더 심화된다는 설정은 얼마나 형편없고 성의없는가. 우리가 궁금했던 것은 아서 플렉이 어떻게 조커가 되어가는지였는데, 감독이 던져주는 해답은 ‘부모에게 맞아서’였다. 아서 플렉이 내면 속에 잠자고 있던 폭력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이벤트는 동료 광대가 건네주는 총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왜 동료가 갑자기 총을 건네주는지에 대한 설명도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갑자기 총이 생기고 그걸 우연히 마주친 폭력적인 취객에게 사용하며, 여기서부터 숨겨진 광기를 되찾게 되는데.. 글쎄, 이게 최선의 흐름이었나 싶다.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가 고담시의 최고 엘리트인 웨인 가문에 대해 착각-톰 웨인이 아서 플렉의 아버지라는-을 한다는 설정은 내가 지금 아침 드라마를 보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헷갈리게 만들었다. 문제는 어머니의 이 어이없는 착각이 아서 플렉을 광기로 몰아넣는 또다른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아서 플렉에게는 아버지의 부재가 상당히 큰 부분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토크쇼 진행자를 아버지로 여기는 것, 톰 웨인을 아버지로 믿는 점 등등), 그 부정의 결핍이 악마성의 탄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다. 이 영화는 오롯이 아서 플렉의 내면에 대한 영화인데, 영화관을 나왔을 때 우리가 조커의 내면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가정교육이 참 중요하구나, 정도?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빈약한 서사구조와 게으른 윤리성을 배우의 연기와 감각적이 편집, 긴장을 고조시키는 음악 등으로 한껏 치장하며 변명하는, 꽤 잘만든 오락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고운 | 소공녀

[소공녀]는 관객 입장에서 일종의 테스트처럼 작용할 수 있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인 미소는 일반적으로 기호식품이라고 알려진 담배와 위스키를 계속 즐기기 위해 거주 목적의 집을 포기한다. 실제로 짐을 챙겨 나와 거리를 떠도는 자발적 홈리스 미소의 선택을 두고 “굳이 저럴 필요까지 있나, 담배와 위스키 중 하나만 포기해도 되지 않았나”, 혹은 “왜 굳이 가사도우미 일을 고집하려 하나, 편의점 알바라도 하면 고시원에서라도 잘 수 있을텐데” 등의 의문을 품은채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이와 달리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다”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는 쪽이 있을 것이다. 미소의 행보에 대한 공감의 정도를 통해 관객 스스로 자신의 가치관과 사회적 통념 간 거리를 측정해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가 선사하는 첫번째 흥미로운 지점이다. 물론, 그 어느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해도 이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전환된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가고자 하는 지향점이 균형적인 시각으로 양쪽의 의견을 고루 청취하는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쯤 생각해볼 질문을 던지되 그 답까지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점이 [소공녀]가 가진 또다른 미덕이다. 미소가 잠잘 곳을 청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은 과거 밴드활동을 함께 했던 멤버들의 집이다. 그들의 ‘집’은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물질적인 의미로서의 공간보다는 다사다난한 인간군상이 수집되는 사회활동의 채집 현장처럼 보여진다. 시댁 식구들과 갈등하며 자아를 잃어가는 젊은 여성의 집, 아내와 이혼한 뒤 쓰레기더미 속에서 오직 슬퍼하기만 하는 나약한 남성의 집, 과거의 자신을 감추고 들어간 부유한 가족 앞에서 거짓과 위선으로 자신을 꾸며야만 하는 여성의 집 등, 감독은 미소의 시선을 통해 현재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견고한 사회적 통념 및 부조리의 틈을 재치있게 파고든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자신의 가치관을 믿으며 호기롭게 집을 포기한 미소의 점점 곤궁해지는 삶이 그려진다. 담배, 위스키와 함께 미소의 유일한 삶의 의미였던 남자친구는 현실과 타협하여 미소의 곁을 떠나고, 휴대폰 유지비용과 머리결의 변색 방지를 위해 복용하던 약값마저 떨어지는 상황이 묘사된다. 거주공간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극한의 경계선까지 밀려난 그녀는 결국 영화 말미에 자발적이지 않은, 어쩌면 비자발적인 온전한 홈리스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런 그녀의 삶에는 여전히 담배와 위스키가 함께 한다. 선택에는 반드시 상충관계가 존재하며, 그 선택의 대가는 타인의 시선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어쩌면 뻔한) 결론에 다가가는 과정이 부자연스럽지 않고 깔끔하다.

[소공녀]에서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을 굳이 꼽자면 주인공 미소 정도가 있을텐데, 영화 속 미소는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 이타적이고 현명하며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행동한다. 다만 남들이 다 가지고 있다는 집이 없을 뿐이다.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미소보다 많은 면에서 떨어지지만 오직 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를 업신여긴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많은 관객들 역시 ‘집’이라는 가치를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미소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이 갖는 가치만큼이나 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구속하지를 미소의 극단적인(?) 예를 통해 깨닫게 된다면, 담배와 위스키가 집보다 결코 덜 소중하다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일만큼은 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미소의 행동이 설득력을 갖는 중요한 이유는 배우 이솜의 연기 덕분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꽤 굵직한 선으로 방점이 찍힐 이 영화에서 이솜은 자신이 가진 신체적 장점을 한껏 뽐내며 꽤 그럴듯한 연기를 선보인다. 그 외의 연기들은 평범했다. 적당히 평면적이고 적당히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인물들이 미소의 주변을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아마도 2010년 이후 서울의 변화가 아니라면 나오지 못했을 작품이다. 현재 서울은 사회구조적인 분화가 몹시 빠른 속도로 발생하고 있다. 강남구와 서초구의 상류층은 부의 축적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고, 서울의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은 조금 더 창의적인 장점을 활용하여 ‘다른’ 생활방식을 창조해내고 있다. 상수와 연남, 이태원, 문래, 혹은 그 어딘가에서 전통적인 자본주의 통념에 기초하는 부의 축적을 거부한채 ‘YOLO’를 추구하는 세대가 점점 그 두께를 두텁게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 사이에 낀 서민, 혹은 중산층은 (미소의 남자친구처럼) 상류층에 기생하며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는 와중에 서울 곳곳에서 발생하는 창조적 문화로부터 창출되는 산업의 찌꺼기를 적당히 즐기기도 하며 불안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지방에서는 쉽게 발견하기 힘든 계층의 다양한 방향으로의 분화는 [소공녀]가 집중하고 있는 주제의식의 현실성을 담보하는 거의 유일한 증거다. 영화의 주요 무대 중 하나로 쓰이는 싱글몰트바 코블러는 김앤장 변호사 빌딩과 서울종로경찰서 바로 옆 좁은 골목길에 위치해 있다. 미소는 그곳에서 현금을 내고 위스키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의 피로를 벌충한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것이 젊은 시절 부리는 객기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위스키를 목으로 넘기는 그 순간의 행복은 결코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미소의 그 찰나의 행복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소공녀]는 그 정도의 넉넉함이 관객의 마음 속에 있는지 묻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도전적이고 날카롭다.

윤가은 | 우리들

[우리집]을 보고 서둘러 [우리들]을 챙겨보았다. [우리들]과 [우리들]은 연작이라기 보다는 독립적인 작품이다. 다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로케이션 장소(찾아보니 정릉 일대에서 촬영했다고 한다)를 공유하고 [우리들]의 주연 배우들이 [우리집]에서 똑같은 이름을 달고 잠깐씩 모습을 비춘다는 점에서 일종의 동일한 세계관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우리집]이 무너져가는 가족의 불안함을 몸으로 느끼며 아둥바둥거리는 애어른들의 이야기라면,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완고한 미성년의 자장 속에 존재하는 이들이 주고받는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다. 어른으로의 성장을 강요받지 않았다 해서 이들이 맺는 관계성이 미숙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들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관계의 시작부터 파탄까지 다다르는 과정은 법적인 성년들이 맺는 관계의 일반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대부분의 어른들이 겪는 관계의 서투르고 폭력적인 끝맺음을 비껴나가며 오히려 더 완숙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윤가은 감독은 [우리들]에서 대부분 쉽게 잊혀지거나 세심하게 보살펴지지 못한, 우리가 ‘평범’하다고 대충 규정 지어 표현하는 어린 영혼의 섬세하고 소중한 마음을 따뜻하지만 에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 만으로 위로가 된다. 이 영화가 가진 폭발적인 힘은 이 ‘옆에 있어 주는 시선’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이 생각났다. 아이의 시선에서, 아이의 앞길을 방해하지 않지만 아이가 거칠게 다루어지면 바로 옆에서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반 발자국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아이의 열심한 마음을 바라본다. 감독의 그 시선이 참 좋았다.

반마다 그런 애들이 있었다. 공부는 중하위권, 얼굴도 외모도 그다지 눈에 띄는 편이 아니고, 집은 잘 살지 못해 부모의 온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말에 자신의 옷에서 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하는, 그런 애들이 있었다. 뭐 하나 특출난 것이 없으며 특별한 보호를 받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 이 아이들은 조금 더 영악하고 욕심 많은 아이들의 쉬운 표적이 된다. 때로는 본인이 폭력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른채, 텅빈 주변에 단 한명의 친구를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나와 같은 자리에 있었을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힘이 되어 주었던가. 혹시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어떤 아이의 시선을 일부러 거절하지는 않았던가.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치며 반성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꽤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쳐 지나온 ‘기회’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왜 나는 손을 먼저 내밀지 못했던가. 영화의 주인공 선만큼 용기를 내지 못한 내가 미워졌다.

마츠오 코우 |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디셈버 스카이

나의 첫번째 건담은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였다. 1988년 무렵,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식 수입이 불법이었던 시기, 서점에는 일본 에니메이션을 캡처하고 대사를 엮어 책으로 만들어 팔던 때였다. 그 이유와 목적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데리고 무궁화호 열차를 타야 했던 어머니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이 [역습의 샤아] 캡처본 책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이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미국에 사는 아이들이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미래의 역사를 배우듯, 나와 같은 한국의 아이들은 조악한 화질로 녹화된 [건담] 시리즈의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미래의 역사를 익혀 나갔다. 그렇게 우주세기연표와 1년전쟁, 아무로 레이와 샤아를 하나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됐다. 이후 모든 건담시리즈를 챙겨볼 정도로 푹 빠지진 않았지만, 건담 시리즈와 모빌 슈트는 어린 시절의 추억 중 한 챕터를 단단히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디셈버 스카이]는 건담의 정사(正史)의 출발점인 1년 전쟁과 그 시간을 공유하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 않는, 일종의 평행세계관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우주세기에 정식으로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완전히 다른 건담 이야기라고도 할 수 없는, 약간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군살 없이 단순하되 충분히 흥미롭다. 공격하는 연방군과 지키려는 지온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연일 벌어진다. 프리재즈를 좋아하는 연방군 소속 파일럿 이오 플레밍은 전투와 모빌슈트에 미친 사람이다.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에 죄책감을 심하게 느끼는 상관이자 연인 클로디아와는 달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도 두려워하지 않는 천부적인 싸움꾼이다. 이에 대항하는 지온군의 대릴 로렌츠는 비치 보이스 류의 요트 음악을 좋아하는 스나이퍼로, 전쟁 중 두 다리를 잃고 의족을 한채 같은 처지인 상이군인 부대에서 에이스로 인정받고 있다. 영화의 거의 모든 서사와 인물, 컷과 씬은 이 두 명의 주인공이 격돌하는 장면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 안에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성공적으로 녹여내며 성인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지켜낸다. 유치한 장면은 하나도 없고 재즈와 올드 팝 음악이 번갈아 나오는 OST 역시 훌륭하며,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은 복합적인 인물 묘사 역시 뛰어난 편이다. 특히 나처럼 1980년대 건담 애니메이션에서 그 기억이 멈추어 있는 사람이라면 최신 애니메이션 기술로 되살아난 건담 대 자쿠의 전투신은 영혼을 빼앗아갈 정도의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현재 연재중인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결말은 열려 있다. 아마도 두 주인공의 운명은 이후 꽤 많이 바뀔 것 같다. 이런 류의 작품은 대체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현재 애니메이션 후속편 [기동전사 건담 썬더볼트: 벤디트 플라워]까지 나와 있다.

윤가은 | 우리집

[벌새]에 이어 [우리집]을 연이어 보았다. 아내는 영화 중간 등장하는 대사 “우리집은 진짜 왜 이럴까?”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벌새]와 마찬가지로 [우리집] 역시 어린 시절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했던 공통된 고통의 기억을 집요하게 일깨운다는 점에서 폭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밑바탕을 가지고 있다. 바쁜 성인의 삶 속에서 잠시 잊고 있던 ‘그’ 기억이 화면에서 되살아날 때, 관객은 어린 배우들의 얼굴에서 그 고통의 세대 간 되물림을 확인하며 연민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다가온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귀여운 에피소드와 어린 배우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며 이 영화의 주제가 안고 있는 무게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겠지만, 후반부로 나아가며 영화는 운명론적 비관성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낸다. 관객은 절망감과 당혹감을 느끼며 어린 소녀들이 보여준 대안적 가족으로서의 연대의식과 전통적 형태의 가족에 대한 희미한 희망만으로 과연 안심을 해도 되는 것인지 불안해한다. 상자, 요리, 저녁식사, 휴대폰 등으로 상징되는 가족 구성원 간 안정적 관계에 대한 소녀들의 열망은 어른들의 긴 한숨과 냉소적인 다그침에 의해 봉쇄당한다. 미성년이라는 특정 연령층이 불완전함이나 미성숙함을 반드시 내포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타의에 의해 조금 빠른 속도로 본인의 연령대에서 흔히 발견되는 순수함에서 벗어나 어른의 세계로 진입할 수 밖에 없는 미성년의 모습을 어른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영화의 비극적 결말은 그 죄책감의 크기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시사하기 위한 운명론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타의에 의해 강요되어진 가족 붕괴의 위기 속에서 강한 의지로 역경을 이겨내려 하는 소녀들의 공동체를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 역시 필연적으로 보인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한 인과관계로 서사구조를 단단히 붙들어 매는 가운데 배우들의 호연과 배경이 되는 동네 그 자체의 얼굴을 통해 많은 감정을 성공적으로 담아낸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왜 ‘Our Home’이 아니고 ‘The House of Us’인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상자로 상징되는 집이라는 물질적 공간 속에 무언가를 담아내거나 덜어내고 싶어하는 소녀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혹은 “우리집에 놀러와”의 그 ‘집’이 갖는 물질성, “저녁은 가족이 함께 먹어야지”에서 드러나는 저녁식사 식탁이 갖는 그 물질성이 소녀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계속 생각하게 된다.

김보라 | 벌새

김보라 감독이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직접적으로 밝혔던 것처럼, [벌새]는 불안하고 서늘하지만 따뜻하고 희망적인 영화다. 영화는 중학생 여자아이의 등 뒤를 조용히 쫓으며 그녀가 겪는 세상의 편협함과 폭력성을 가만히 비추는 동시에 그 거친 세상에서 날개짓을 바삐 하는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을 조용히 감싸 안는다. 주인공 은희가 2년째의 중학교 생활을 견디어 내는 1994년은 해방 이후 진화해온 한국사회의 전근대적인 병폐들이 별다른 도전을 받지 않은채 그 존재감을 뽐내며 이곳 저곳을 괴롭히고 다니던 시기였다. 그 병폐들이란 가족 단위에서 발견되는 가부장제와 가정폭력, 가정과 학교가 합심하여 힘을 발휘한 학력제일주의, 사회 차원에서 비극을 초래하는 인자였던 안전불감증과 개발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 등으로 간추려질 수 있을텐데, 은희는 그 모든 것의 총집체이자 상징이었던 대치동의 고층 아파트에서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함께 산다. 아버지로부터 서울대 진학이라는 꿈을 부여받지만 공부를 아주 썩 잘하지 못하는 오빠는 은희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8학군에 진학하지 못한 언니는 밤마다 거리를 배회하며 집에 잘 녹아들지 못한다. 은희 역시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삐삐로 ‘1004 486’ 메시지를 보내는 남친과 한문학원에서 키득거리를 수 있는 단짝 친구가 있으니 불안하고 서늘한 현실을 어느정도 버티어 낼 수 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받아치고 불안함을 따뜻함으로 둘러치던 은희의 삶에 몇가지 파장이 발생한다. 배우지 못한 설움을 자신의 딸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여대생’이 되길 바라는 엄마나 옆에 앉은 ‘날라리’를 적어내라고 강요하는 학교 선생님 등, 주변의 보수적이고 완고한 어른들과 달리 20대 여성인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는 은희에게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는지 묻고, 그 누구에게도 맞지 말라고 용기를 준다. 아마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자신의 10대 시절 만난 각자의 영지 선생님을 떠올렸거나, 영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 자시의 10대 시절을 위로했을 것이다. 은희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해준 영지 선생님은 영화에서 유독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인 존재로 비추어지는데, 천국에서 홀연히 날아와 숨을 불어넣고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천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강하고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감독의 분신처럼 생각되는 한편, 은희에게 철거농성장의 현수막의 의미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서 언급한 ‘완전히 사라지는’ 계기가 사회적인 비극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인공 개인과 그녀를 둘러싼 불안한 사회를 연결시켜주는 가교로 기능하기도 한다. 어쩌면 미래의 은희가 과거의 은희에게 잠시 돌아온 것일 수도 있겠다.

은희의 신체에도 변화가 하나 일어나는데, 귀 뒤에 혹이 생겨 이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간단한 수술이라 하지만 수술은 수술인지라 가족들은 자신을 때린 오빠를 두둔하던 아버지는 병원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목놓아 불러도 대답이 없던 엄마는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영화 속에서는 처음으로) 가만히 쳐다보기 시작한다. 수술에서 깨어난 은희가 주변 사람들(아마도 간호사)에게 떼어낸 혹을 어찌 했는지 묻고, 그 혹을 버렸다는 말에 ‘왜’냐고 반문하는 대목에서 이 일화는 조금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즉, 지금까지 은희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인자들이 조금씩 제거된다는 차원에서 그녀의 서늘한 마음을 조금을 덜어낸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은희는 집을 잘못 찾는 바람에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도 엄마를 만날 수 없다. 영화 중간, 어딘가를 멍하게 쳐다보는 엄마를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돌아보지 않는다. 오빠의 폭력으로부터 구원해달라고 조금 더 센 힘을 가진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늘 묵살당한다. 은희의 마음 한구석에는 결코 해결되지 못하는 우울함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고, 그 중심에는 부모와의 관계가 일정 부분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이 작용했을 것이다. 귀 뒤에 붙어있는 혹을 제거하면서 그 부분이 조금 해결되는 양상을 보인다. 수학여행 장면에서 이를 조금 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엄마는 딸을 위해 김밥을 싸주고 아빠는 경주에 도착하면 전화하라고 당부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은희는 혼자이지만, 주변 친구들을 바라보면서도 더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조금 마음이 놓이게 된다.

마지막으로 성수대교 붕괴사건이 있다. 불안하고 서늘한 10대 시절을 통과해야 하는 은희의 마음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보인다. 친구가 있어 좋고 남친이 있어 좋지만, 좋아하는 영지 선생님은 더이상 만날 길이 없고 지난 학기 고백 받았던 후배는 어느새 마음을 정리해버렸다. 멍청한 남친은 언제 다시 바람을 피울지 모르고 그의 어머니는 떡집 딸을 썩 내켜하지 않는다. 날개짓을 열심히 한 덕분에 조금씩 나아지는 부분도 있지만 결코 해결되지 않는 부분도 여전히 존재한다. 은희의 마음속에 툭 끊어진 부분, 단절된 부분이 성수대교의 끊어진 부분으로 상징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참 많다.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끝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영화의 모든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게 이야기할만한 가치가 있다. 은희의 뒷모습을 가만히 조망한다는 점에서 에드워드양이, 은희의 앞모습을 지긋이 비춘다는 점에서 허우샤오시엔이 생각났고, 지옥같은 십대를 사회상과 연결짓는다는 점에서는 [파수꾼], [릴리슈슈의 모든 것] 등이 생각났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영화의 색깔을 빌려다 썼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충분한 오리지널리티가 있고,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하게 기록될 이유를 분명히 가지고 있으며, 여성주의 영화로 읽어도 의미있는 지점을 많이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차원이 깊고 다양하다. 1994년을 힘들게 이겨낸 은희는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자기만한 딸을 하나 두고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힘든 시절을 이겨낸 여성 모두에게 바치는 조용한 위로같은 영화다.

라야 | 집의 시간들

건축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아파트의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지만, 한국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공급되기 시작한 시점과 여러가지 – 한국사회의 조급증, 비리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날림 시공 등, 재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세차익에 대한 숭배현상 – 를 고려한 한국 아파트의 일반적인 수명 등에 비추어볼 때 우리나라, 특히 서울에서 두 세대 이상 한 아파트 단지의 기억을 공유한 사람의 수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봤다. 만들어진지 대략 3-40년 쯤 된 아파트는 거의 대부분 허물어지기 마련인데 한 세대가 다음 세대와 기억을 공유하기 위해 필요한 기간도 대략 그 쯤 되니, 정말 운이 좋지 않고서는 나의 부모가 태어난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나의 부모가 뛰어 놀던 놀이터에서 성장한 사람은 정말 진기한 체험을 한 셈이다. 그만큼 한국사회는 세대 간 단절을 촉진하는 것에 온 신경이 팔려있다. 과거의 유산은 다음 세대에서 깡그리 무시되기 일쑤며, 수많은 사람들의 손떼가 뭍어 있는 거리와 건물은 너무나 쉽게 부수어지고 사라져 간다. 가뜩이나 짧은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집단적 기억의 전승에 대한 가치마저 얕게 대한다면, 대체 이 사회는 어떤 동력을 이용하여 성장할 것인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답은 이미 정해져있다. 재건축! 시세차익!)

라야 감독의 [집의 시간들]은 한시간이 조금 넘는 짤막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송파구와 경계선을 대고 있는 강동구의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둔촌주공아파트는 5천 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다. 최근 재건축이 결정되어 공사에 들어갔고, 조만간 1만세대가 넘는 대규모 신축 아파트 단지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수십년간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함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던 나무들도 송두리째 뽑혀 나가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그 공간의 거의 모든 기억들은 물질적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이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둔촌주공아파트의 모습을 기록한 영화이자,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이 단지에서 느꼈던 것들을 보관하고자 하는 일종의 타임캡슐이다. 열명 남짓한 인터뷰이들은 자신이 살던 공간을 얼굴 대신 보여주며 좋았던 기억, 좋지 않았던 기억, 앞으로 삶에 대한 걱정과 기대 등을 담담하게 구술한다. 한국사회에서, 특히 서울에서 집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영화다. 누군가는 이 곳에서 아이들을 무사히 키워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는 뒤늦게 단지에 들어와 텃새를 경험해서 아쉽다고 이야기한다. 자산 가치가 상승하니 결국 좋을 것이라는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 이도 있고, 단지 뒷편에 있던 오솔길을 걷는 것이 참 좋았다는 기억을 공유하는 이도 있다. 이런저런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집이다. 내 몸뚱아리 하나 누일 수 있는 작은 곳, 그 곳에서 우리의 삶이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40년 가까이 수만명의 삶을 보듬어 안던 콘크리트 덩어리들은 이제 폐기물처럼 어딘가로 버려지고 있다. 결국 하나의 순환주기에 따라 벌어져야만 하는 일이라지만, 집의 가치가 반드시 통화가치로 환산될 필요는 없지 않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명 쯤은 있어도 좋을 것 같다. 라야 감독은 흔들리지 않는 곧고 바른 카메라의 시선과 그 곳에 살던 이들의 목소리의 힘을 바탕으로 집이 품은 시간의 가치가 사실 꽤 다양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진다.

이 둔촌주공아파트는 조합원 분양권이 현재 15억에서 20억원에 팔리는 등 상위계층을 위한 자산으로 탈바꿈했다. 거기서 살게된 이들은 똑같은 공간에서 0부터 다시 역사를 쌓아올려야 한다. 심지어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는 삶은 반드시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어이 없을 정도로 빠르고 차가운 단절의 순간이 서울에서 너무 많이 발생하는 것 같아 슬프다.

오기가미 나오코 | 요시노 이발관

여기 이상한 마을이 하나 있다. 익명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작은 규모의 이 마을에 사는 모든 미성년 남자아이는 하나같이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마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이발관에서 동일한 스타일의 머리모양으로 깎아야만 하는 이유는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때문이다. 전통인지 강압인지 알 수 없는 이 마을의 관습을 지키기 위해 마을의 모든 어른들은 합심하여 아이들의 머리모양을 적극적으로 통제하는데, 도쿄에서 전학 온 도시소년 한명이 여기에 반기를 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카메모 식당], [안경] 등 잔잔한 영화를 만든 오기가미 나오코의 2004년작 [요시노 이발관]은 단순하고 소박한 시놉시스에서 시작하여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으로 마무리짓는다. 두발의 자유화를 부르짓는 소년은 곧 몇명의 동지를 구하지만, 이 어린 소년들이 오랜 마을의 전통을 지키려는 어른들의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과정은 쉽지 않다. 논리나 이유는 없다. 감정적인 설득도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어른들만 있을 뿐이다. 어른들의 강압적인 태도 뒤에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있을 수도 있다. 목적이 선의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아이들이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명백한 폭력이 된다. 자신이 원하는 머리모양을 하기 위해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는 아름답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상당히 섬뜩한 이데올로기 간 충돌에 관한 이야기다.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통제 기제가 머리모양으로 상징화되고 있는 셈인데, 어째서인지 영화는 마냥 평화롭게 마무리된다. 머리 모양을 제멋대로 바꾼 아이들은 결국 강제로 머리를 짧게 깎이게 되지만, 여전히 평화롭게 어른들과 공존하며 조금은 나아진 머리모양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그동안 조심스럽게 쌓아온 서사구조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결국 ‘타협’이 결론인건가? 적당히 굴복하되(혹은 굴복당하는 현실을 인정하되) 상존하는 시스템 안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쪽을 택해라는 것인가? [안경]에서 꽤 그럴듯한 멋진 마무리를 선사했던 감독은 [요시노 이발관]에서는 선명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한다. ‘화합’이나 ‘이해’ 같은 것을 이끌어내고 싶었다면 이 영화는 지나치게 게으르고 건방지다. 조금 더 세심하게 고려해야 하는 장면들이 많다. 열린 결말로 시청자에게 어느 정도의 몫을 남겨두기에는 모든 이야기가 명확한 마침표를 가지고 있다. 관객이 개입할 여지도 많지 않다. 이래저래 답답한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