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스터에 감독의 이름보다 배우의 이름이 더 큼지막하게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커]는 호아킨 피닉스의 원맨쇼를 유희적으로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는 작은 얼굴 근육 하나부터 전체적인 몸짓의 형상까지 촘촘하게 설계하고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무엇을? 조커의 그것을. [조커]는 피닉스의 연기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며 조커가 악당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던 가난한 청년이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부모의 학대로부터 시작된 비극의 크기가 비정한 고담시의 현실과 맞닿아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나 머릿속 이성을 지배하게 되어버린다는 서사구조는 새롭지 않다. 오히려 만화에서 영화로 넘어온 히어로물의 흔한 성장담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 서사를 ‘평범한 개인이 우연한 계기를 통해 능력을 깨닫고 특별한 행동을 행하게 되어 대중을 주목을 받게 된다’고 짤막하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나, [조커]는 흔한 영웅, 혹은 반영웅의 서사가 아니다. 윤리적인 부분을 깊게 고려하지 않고 감성적인 부분에 호소하며 만들어진, 상당히 위험하고 불안정한 영화다.
피닉스의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를테니, 차라리 짧게 줄이는 편을 택하겠다. 그는 좋은 연기를 펼쳤다. 하지만 최고의 연기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한국영화적 연기를 했다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영화의 구조적 결점을 배우의 에너지를 갈아넣어 메우려는 의도가 느껴져 박수를 아주 세게 쳐줄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조커를 완벽하게 재창조해냈지만, 그의 조커-아서 플렉 캐릭터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창조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그는 그냥 조커였는데, 매우 뛰어난 연기를 펼쳤을 뿐이다. 대중이 여러 영화로부터 ‘교육’받은 조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혹은 ‘배트맨’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조커의 최종적 캐릭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상상하며 만들어진 조커의 초기 모습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며 그다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영화의 첫장면부터 영화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흐름으로 2차원 직선 위에서 진행되는데, 이 영화는 사실상 조커-아서 플렉의 내면의 변화를 다루고 있으므로 조커의 캐릭터 자체가 2차원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커는 누구인가? 만화책의 유명한 캐릭터다. 마블과 DC코믹스가 본격적으로 종이에서 벗어나 필름으로 그 판을 옮긴 후 히어로물 영화는 오히려 더 만화적으로 변했다. 영화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만화책의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만화책에서 팬들이 읽었던 장면을 영화속에서 재현해내는 것에 충실한 나머지, 오히려 영화적인 혁신은 둔화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마블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블의 오랜 팬들은 가슴이 두근거리겠지만, 그냥 보통의 영화를 좋아하는 나의 눈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CG로 떡칠된 장면들이 새로운 영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만화책 속 장면의 재현에 그칠 때 힘이 쭉 빠진다. 돈이 또 이렇게 낭비됐구나 싶다. 그 와중에 서사구조는 점점 더 빈약해졌다. 마블영화에서 제대로 된 서사를 보여준 영화는 사실 거의 없다. 그들이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든지 10년이 넘었는데 앞서 언급한 ‘평범한 개인이 블라블라~’ 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굳이 예외를 찾자면 [다크나이트] 시리즈 정도일텐데, 이조차 나는 사람들의 열렬한 숭배를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 열광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만든 배트맨 시리즈 3편이 썩 괜찮게 만든 오락영화 수준이라는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튼, 조커는 이런 흐름 위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캐릭터이고 아마도 가장 사랑받는 악역일텐데, [조커]는 대중이 궁금해하는 그 지점, 히어로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당의 탄생비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상업적이고, 충분히 자극적이며, 적당히 자연스러운 시나리오와 정말 좋은 배우의 연기만 합쳐지면 박스오피스 1위는 거뜬히 가능하겠다, 싶은 그런 영화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다.
[조커]에 대해 비판할 지점은 참으로 많지만, 가장 중요한 딱 하나만 언급해야 한다면 윤리성의 결여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며, 현실이 존재하지 않으면 영화도 존재할 수 없다. 현실에서 사회적 구성원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맺어진 윤리적 합의가 영화로 옮겨진다고 해서 완전히 새롭게 재정의될 수 없는 이유다. 이 영화는 마지막에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어 반영웅으로서 폭도들의 찬양을 받는 것을 보여주는데, 일반인이 살인자가 되어가는 심리적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건 [조커]가 지난 10여년의 기간동안 대중이 반복적으로 교육받은 히어로물 영화의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관객은 그가 자신의 힘을 폭발시키게 되는 과정에서 많은 외부적 요인이 있음을 반복적으로 주입받게 된다. 그 결과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한다. 이게 지나친 비약이라면, ‘영화 모방 범죄’를 구글에서 검색하도록 하자. 영화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강력한 전달매체다. 두시간여의 시간동안 어두운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커다란 화면을 통해 아서 플렉의 ‘성장담’을 보게 되면 그의 악마성에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영화적으로 새로울 것이 없는 뻔한 서사구조를 만든 감독이 배우의 미친듯한 연기력에 떼를 쓰며 만들어낸 결과가 윤리적으로 아주 얄팍한 영화라면, 마음이 상당히 불쾌해진다. [위플래쉬]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런 류의 영화는 조금 더 많이 비판받아야 한다.
심지어 이 영화는 조커 캐릭터를 알뜰살뜰하게 보살피지도 못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고, 그 결과 의도와 상관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는 정신병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직장과 사회로부터 차별받고 핍박받는 와중에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때문에 머릿속 정신병이 점점 더 심화된다는 설정은 얼마나 형편없고 성의없는가. 우리가 궁금했던 것은 아서 플렉이 어떻게 조커가 되어가는지였는데, 감독이 던져주는 해답은 ‘부모에게 맞아서’였다. 아서 플렉이 내면 속에 잠자고 있던 폭력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는 이벤트는 동료 광대가 건네주는 총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왜 동료가 갑자기 총을 건네주는지에 대한 설명도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갑자기 총이 생기고 그걸 우연히 마주친 폭력적인 취객에게 사용하며, 여기서부터 숨겨진 광기를 되찾게 되는데.. 글쎄, 이게 최선의 흐름이었나 싶다. 정신착란에 빠진 어머니가 고담시의 최고 엘리트인 웨인 가문에 대해 착각-톰 웨인이 아서 플렉의 아버지라는-을 한다는 설정은 내가 지금 아침 드라마를 보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헷갈리게 만들었다. 문제는 어머니의 이 어이없는 착각이 아서 플렉을 광기로 몰아넣는 또다른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아서 플렉에게는 아버지의 부재가 상당히 큰 부분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토크쇼 진행자를 아버지로 여기는 것, 톰 웨인을 아버지로 믿는 점 등등), 그 부정의 결핍이 악마성의 탄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다. 이 영화는 오롯이 아서 플렉의 내면에 대한 영화인데, 영화관을 나왔을 때 우리가 조커의 내면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가정교육이 참 중요하구나, 정도?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빈약한 서사구조와 게으른 윤리성을 배우의 연기와 감각적이 편집, 긴장을 고조시키는 음악 등으로 한껏 치장하며 변명하는, 꽤 잘만든 오락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