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오너 | 비크람: 요가 구루의 두 얼굴

어렸을 때부터 몸이 그리 유연하지 못한 편이었다. “유연하지 못했다”라는 표현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자기보호적인 성격이 강한데, 일반적으로 나와 같은 몸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더럽게 뻣뻣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잘 구부러지지 않는 몸은 젊은 시기에는 약간의 불편함 만을 수반할 뿐이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건강, 혹은 목숨과 직결되는 위험을 가져온다. 탄력성과 유연성이 결여된 내 몸을 잘 아는 지인들은 요가를 권하는데, 마흔이 다 되어가는 아직까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게으름이 가장 큰 적이겠지만, 아마도 언젠가는 반드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몇 년 전 한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핫 요가’라는 것이 있단다. 40도 가까운 고온에서 땀을 잔뜩 흘리며 진행하는 요가인데 효과가 좋아서인지 꽤나 많은 이들이 핫 요가에 빠졌다. 이와 같은 요가 스타일을 흔히 ‘비크람 요가’라고 한다는데, 26개의 동작과 2개의 호흡법으로 구성된 이 비크람 요가를 창시했다고 알려진 비크람 차우다리(Bikram Choudhary)는 인도 출신으로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요기, 혹은 요가 구루로 알려져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비크람: 요가 구루의 두 얼굴](원제는 [Bikram: Yogi, Guru, Pradator])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요가 사업가가 교육과정에서 수많은 성추행과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피해자들이 직접 인터뷰이로 등장해 당시 상황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이와 관련된 소송과정에서 비크람이 행한 폭력적이고 도발적인 행동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심지어 재판 과정에서 비크람이 창시했다고 알려진 ‘비크람 요가’가 사실은 그의 스승이 창시한 것이고, 비크람은 그것을 그대로 베껴 사용한 뒤 마치 자기가 창시한 것인양 포장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게 되면서 비크람 차우다리는 미국 내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닉슨 대통령을 치료한 대가로 영주권을 선물받았다는 주장도 당연히 거짓이었으며, 정부에 파산신청을 한 후 그의 자녀들에게 선물한 고급 승용차는 캘리포니아 주정부 소유라는 황당한 거짓말을 재판정에서 뻔뻔하게 늘어놓아 배심원들로 하여금 허탈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결국 비크람의 성폭행건에 대해 조사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법률담당 부하직원이 제기한 소송에서 거액의 징벌적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은 비크람은 아내와 가장 이혼을 하여 재산을 은닉하고 배상금 지급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도피한다. 다큐멘터리는 지금도 비크람이 멕시코, 스페인 등에서 대규모의 요가 학원을 꾸리면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지난 몇십년 간 비크람은 상습적으로 여제자들을 성추행, 혹은 성폭행해왔고, 이 중 일부가 소를 제기하면서 궁지에 몰리자 미국 내 활동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도피했으며, 민사소송만이 진행되고 성폭행 건에 대한 형사소송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제송환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현재까지 미국 외 지역에서 활발하게 요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폐쇄적인 공간에서, 전문기술을 가진 권위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때 발생하는 슬픈 사건을 우리는 적지않게 목격해왔다. 최근에는 대학원생 제자에게 똥물을 먹인 교수도 있었다. 한국에서. 비크람 사건은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그나마 전세계에서 가장 시민의식이 발달했다는 미국인들조차 완전히 당해버렸다는 점에서 씁슬함의 정도가 조금 더 크게 다가온다. 계급과 권력이 폐쇄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은 개인의 현명함을 완전히 무용하게 만들어버린다. 시스템 디자인이 이와 같은 최악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향으로 공고하게 발달해야 하는 이유다.

셀린 시아마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어제 포털 사이트의 뉴스란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색깔의 기사들이 올라왔다. 군인을 직업으로 삼는 한 부사관이 상관의 허락을 구한 뒤 외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하고 복귀했는데 군에서는 이를 복무부적합으로 판단하여 강제전역시켰다는 기사와, 그러한 상부의 지시에 수긍할 수 없어 본인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한 뒤 기자회견을 통해 부당함을 토로한 당사자에 대한 기사였다. 댓글은 예상한대로 그 부사관이 지나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성전환수술은 “신체훼손”에 해당하니 계약파기가 정당하다는 논리부터 “당신의 인권만큼 당신 동료들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뜬금없는 인권동등론까지 다양한 이유를 들어 남군에서 여군으로의 복무전환신청 기각에 찬성하는 의견이 이어졌다. 대체 남성의 성기가 국경을 방위하는데 있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혹은 남성의 성기를 포기하였다고 하여 함께 일하는 동료가 어떤 혐오감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한국사회에 쌓아올려진 단단한 벽의 거친 질감을 오랜만에 손으로 쓰다듬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쓸쓸해졌다.

한국사회가 문화적 갈라파고스섬으로 자신을 정의내린지 꽤 오랜 기간이 흐른 것 같다. 서울 시내에는 문신한 오빠들이 운영하는 힙한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지만 문 앞에는 어린아이를 받지 않는다거나 반려동물은 함께 할 수 없다는 문구가 당당히 걸려있는 경우를 많이 목격한다. 지하철 안에서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고 홍카콜라 유튜브 방송을 시청하는 할아버지는 무사히 그 날 하루를 마감할 수 있지만, 길거리에서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여성 연인들은 단단히 각오하고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2018년 WHO에서 발표한 인구 10만명 당 자살인구 비율 추정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여성 자살율은 15.4명으로 세계 2위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보다 여성이 높은 확률로 자살하는 나라는 레소토(Lesotho) 왕국이 유일한데, 1인당 GDP가 2천달러를 조금 넘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둘러싸인 가난한 국가다. 참고로 이곳의 인구 10만명 당 강간발생률은 90명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나라를 제외하고는 한국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여성이 더 자주 발생하는 나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면서 나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떠올렸는데, 19세기 유럽사회의 보수성과 21세기(심지어 원더키디가 나온다는 2020년이다) 한국사회의 보수성을 병렬적으로 연결시킨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이 부끄러움은 한국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부채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거부할 수 없고 청산해야만 하는 그런 성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실로 완벽한 영화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장면이 컷 단위로 완전하게 설계되어 있고, 카메라와 세트, 음악과 배우는 최선을 다해 감독이 설계한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배우의 표정 하나하나부터 세트의 구석진 곳, 거친 파도와 같은 자연환경까지 화면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영화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상징들이 침착하게 하나로 모여 엔딩씬의 엘로이즈(아델 에넬 扮)의 얼굴에 집중되는 순간 이 영화의 세계는 비로소 완성된다. 이 영화를 여성에 대한 억압적인 시선이 팽배해 있던 시대적 배경 하에 사랑을 나눈 여성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받아들인다면 조금 섭섭한 감이 있다. 영화는 그보다 훨씬 깊고 다양한 층위를 관객과 함께 나누고 싶어한다. 우선 형식적인 측면에서 남성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지금까지 영화 등 각종 예술장르에 관습적으로 내려져온 남성 중심적 시각에 도전하고 있다. 카메라의 시선은 등장인물 중 누군가의 시선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데, 영화의 처음과 끝에 도구적으로만 등장하는 남성 인물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건 여성의 주체성 관점에서 봐도 꽤 중요한 시도다. 기존 사회적 문법에 대한 형식적 도전은 억압적 기제(어머니)가 부재한 가운데 행해진 귀족과 하녀 간 평등한 관계 형성, 오르페우스 신화의 전복,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아카펠라 합창 등 서사구조 내에서의 다양한 변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적 구조와 형식, 서사와 이미지가 모두 하나의 통일된 주제의식 안에서 조화롭게 움직이는데, 그 모든 과정이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매우 독창적이기까지 하다.

개인적으로 다르덴 형제의 근작 [언노운 걸]에서 매우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주어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던 아델 에넬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이 배우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하여 역시 걸출한 연기를 선보인 노에미 메를랑을 가끔 아마추어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기운을 뽐낸다. 영화 속에서 오랫동안 쌓아올린 감정을 폭발시키는 엔딩씬은 배우의 연기가 조금만 틀어져도 굉장히 유치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는데 그 복잡한 감정까지 성실하고 치밀하게 표현해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저 감탄만 나왔다. 클레르 마통의 카메라도 매우 인상적이다. 이 카메라 감독이 찍은 또다른 영화 [애틀랜틱스]를 넷플릭스를 통해 접할 수 있다 하니 얼른 봐야겠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느껴진다.

다시 이 감상문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국사회에서 이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해보는 것은 이 사회의 폐쇄성을 고려할 때 분명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해외 언론이 한국의 문화적 보수성에 놀라워하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나라 눈치볼 필요 없이, 현재 한국사회 안에서 용인되는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정도가 너무 얄팍하지는 않나 하는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면, 이 아름다운 영화가 하나의 계기 정도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타오르는” 감정이 박제된 초상화 안에 갇혀 있음에도 훨훨 불타고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감정, 한국인들이 참 좋아하는 그 감정, 술 마시고 감정적이 되면 얼굴을 뭉개놓아도 자궁을 부셔놓아도 정상참작이 되어 형량도 줄어든다는 신비한 그 감정, 사회적으로 같은 인간 취급 못받고 소외당하는 소수자들에게도 그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보고 좀 알아봐 주었으면 한다. 아무리 억압하고 가두어놓아도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접어놓은 ’28쪽’은 영원히 기억되리라는 것도 함께 깨달았으면 좋겠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하면 트렌스젠더 군인을 강제전역시켰다는 그 뉴스의 댓글란에 글을 쓰고 좋아요를 누른 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사회에 하는 말이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페르난두 메이렐리스 | 두 교황

가장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가장 나중에 먹는 타입으로 살아왔다. 요즘에는 취향이 바뀌었다. 대부분의 식사를 아내와 함께 하다보니 맛있는 것을 뒤로 미루어두면 큰 일이 날 수도 있어 요즘에는 맛있어 보이는 것을 최대한 빨리 먹는 편이다. 무척 보고 싶은 영화는 요즘에도 조금 뒤로 미루어 두는 편이다. 스스로를 조바심내게 만드는 타입은 아닌데, 그 영화를 볼만한 더 나은 타이밍이 왠지 있을 것만 같아서다.

[두 교황]도 몇 주는 묵혀둔 것 같다. 넷플릭스에 최초 공개되기 몇 주 전부터 새로 나온 영화를 알려주는 기능을 켜두고 기다렸지만, 막상 영화가 공개된 뒤에는 차일피일 미루며 영화를 보지 않았다. 이 영화를 본 지인들이 괜찮았다 이야기해줄 때마다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고, 어서 빨리 보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했지만, 아내와 함께 가장 편한 상태에서 보고 싶어 미루고 미루는 과정을 반복하다 오늘에야 보았다. 몸이 무거워 밖에 잘 나가지 못해 답답해하던 아내를 데리고 천안에 가서 맛있는 보리굴비와 간장게장을 먹고 와서였기 때문일까, 오늘은 괜히 이 영화가 보고 싶었다.

[두 교황]은 [시티 오브 갓]으로 유명한 페르난두 메이릴리스 감독의 신작이다. [시티 오브 갓]이 나온지 벌써 15년 쯤 되었으니, 그동안 대표작을 갱신하지 못한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약간 빈약해보여 걱정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독의 영향력이 그리 크게 두드러지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작업에 참여한 앤써니 맥카튼(Anthony McCarten)의 촘촘한 대사들과 그 대사들을 완벽하게 빚어낸 두 배우, 조너선 프라이스(Jonathan Pryce)와 앤서니 홉킨스(Anthony Hopkins)의 연기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다. 실로 이 영화는 프라이스와 홉킨스의 연기에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 두 대배우는 그 무거운 짐을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으며 훌륭한 앙상블을 선보인다. 오히려 영화는 초반부 교황 베네딕도 16세와 주교 시절의 프린치스코 교황이 별장에서 처음 만나자마자 벌이는 대단한 설전에서의 팽팽한 긴장감을 제외하면 상당히 평이하게 흘러가는 편이다. 4:3 프레임에 흑백으로 처리되는 과거 회상 장면은 조금 진부하며, 중간중간 실제 녹픽션 화면이 삽입되는 것은 메이렐리스가 [시티 오브 갓]에서 활용했던 올드한 방식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독재 정권과의 관계에 대한 묘사는 고해성사라는 형식을 차용하여 지나치게 미화되어 표현된 듯 보인다. 마스터피스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구성의 영화를 살리는 것은 앞서 설명했듯 오로지 이 두 배우의 연기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연기란 것이 너무나 뛰어난 나머지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가 보편적으로 교황에게 느끼는 어떤 감정 – ‘성스럽다’라고 표현해도 될런지 모르겠다 –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세심한 대사 처리와 표정, 심지어 뒷모습만으로도 이 두 배우는 12억의 신자를 책임지는 리더로서 짖눌린 두 어깨의 무게감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교황의 고뇌와 보수적인 종교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 사이의 충돌 등을, 굳이 신자가 아니어도 한번쯤 생각하고 공감하게 만든다. 실로 대단한 연기를 본 것 같다.

노아 바움백 | 결혼 이야기

노아 바움백 감독을 ‘작가’ 반열에 올리는 영화팬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프랜시스 하]로 화려하게 복귀하기 전까지는 웨스 앤더슨과의 협업으로 더 많이 알려졌고, [프랜시스 하] 이후 내놓은 작품들도 기대에 많이 못미쳤기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았을까, 하는 점이 사실상 내가 그에 대해 가진 거의 유일한 궁금증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올해 나온 [결혼 이야기]는 그의 영화 커리어에 하나의 전기로 기록될만하다. 정식 개봉 전부터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손꼽혔고, 두 주연 배우의 호연 만큼이나 감독의 치밀한 조립능력과 치열한 시선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영화는 매우 뛰어나다. 과거 보아왔던 노아 바움백의 영화들과 그 무게감에서 차원을 달리 할 뿐 아니라 영화의 ‘결’도 전작들과 살짝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각본이 갖는 무게감이 전작들과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상당히 일찍 캐스팅된 두 주연배우, 그리고 또 다른 여성작가와 함께 각본을 함께 구성했다고 하는데, 이 덕분에 과거 바움백 영화들이 고질적으로 드러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문제에서 탈피한 것처럼 보인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류승완 감독의 영화 중 거의 유일하게 서사라는 형식을 가진 [부당거래]가 류감독의 손을 거치지 않은 각본 덕분에 탄생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또다른 이유라면 바움백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인 바움백은 이혼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출신의 그레타 거윅과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본인의 이야기이기에 조금 더 깊은 수준에서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노아 바움백은 이 영화를 통해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게 되겠지만,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이 작품 이후 바움백의 필모그래피가 엄청 화려하고 멋질 것이라는 기대는 크게 갖지 않게 된다. 이 영화는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라는 두 걸출한 배우가 바움백의 디렉팅과 만나 환상의 합을 보여주는 와중에 탄생한, 행운과도 같은 작품이다.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그녀는 [어벤저스] 시리즈 등으로 소모된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매우 뛰어난 연기파 배우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스스로 증명해낸다. 그동안 헐리우드 팝콘 무비에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쉽게 발견하기 힘들었던 복잡한 내면연기를 영화 내내 보여주는데, 한 배우의 절정을 목격한 느낌이 들어 감사한 마음마저 생겼다. 아마도 바움백이 후세에 칭송을 받는다면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좋은 배우의 대표 영화를 연출했다, 라는 이유가 반드시 따라올 것이다. 아담 드라이버는 요즘 상당히 자주 접하게 되는 배우인데, 그만큼 작품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고 배우로서의 역량도 최고조에 다다른 듯한 인상도 받지만, 이 영화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연기를 했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패터슨]에서의 아담 드라이버가 훨씬 좋았다. 다만 극중 찰리의 LA 임시 거처에서 요한스닝 분한 니콜과 격정적으로 싸우는 시퀀스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훌륭했다. 영화에서 좋은 액션을 받쳐주는 것은 좋은 리액션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애덤 드라이버는 참 좋은 배우임이 확실하다. 아마도 많은 여성 관객이 좋아할 니콜의 변호사 노라 캐릭터는 주변에서 들어온 호평만큼 깊게 와닿진 않았다. 주도면밀한 비즈니스맨 그 이상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이상으로 캐릭터에 깊이 빠진 팬들이 많아 그 이유가 오히려 궁금해졌다. ‘위닝 워먼’에 대한 판타지 때문인지, 혹은 그런 캐릭터가 전시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에 존재하는 이런 여성은 ‘위닝 비즈니스워먼’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닌 경우가 많다.

아내와 함께 이 영화를 봤다. 이제 우리가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이 영화의 주제라던가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삶의 궤적 위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게 느껴졌다. 니콜이 이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도 절절하게 이해가 되었으며, 찰리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이혼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니라는 점, 찰리가 뉴욕과 그의 극단에 집착하며 LA를 적대시하는 점 모두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었다. 찰리가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니콜이 조금만 더 일찍 자신을 아끼고 희생을 거부했다면, 이 부부는 슬기롭게 위기를 겪지 않고 계속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멍청한 한 부부가 우스꽝스럽게 이혼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히 사려 깊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가족을 지극히 아끼는 한 부부가, 결국 넘을 수 없는 어떤 벽에 가로막혀 고통스러운 이혼과정을 감내해가는 이야기다. 영화의 포스터처럼 한 때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삶과 가족이 이제는 극복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장벽으로 다가올 때,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는 한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다’는 말은 그 자체로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런건 없다. 그 누구도 어른이 될 수 없다. 다만 조금씩 더 배워나갈 뿐이다. 그래서 과거의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영화는 바움백의 전작들이 했던 그런 이야기를, 아주 현명한 방식으로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있다.

마틴 스콜세지 | 아이리시맨

마틴 스콜세지(공식 한국어명은 ‘스코세이지’인 것 같은데 영 어색하다) 감독의 2019년 영화 [아이리시맨]은 세시간 30분 가까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긴 영화다. 상영시간이 ‘길다’라는 묘사가 이 영화의 핵심에 맞닿아 있기에 흥미로운 영화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넷플릭스 영화 – 휴대폰으로 딴 짓을 하면서 곁눈질로 보기도 하고 냉장고에서 먹을 것을 꺼내오는 동안 잠시 멈추어 두기도 하는 등 – 와는 다르게 그 긴 상영시간동안 오롯이 영화의 세계를 체험하며 바깥세상을 잊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신비로운 영화이기도 하다.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으며 형식적으로 단 한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영화이기도 한데, 바로 그러한 특성때문에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한계까지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를 위한 영화라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작품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야기하고 있듯, 이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가 2019년에 만들었다는 점때문에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데, [어벤저스] 시리즈를 두고 “영화(cinema)가 아니다”라고 비판한 스콜세지가 지금까지 80년 가까이 쌓아올린 ‘영화’에 대한 지식이 총망라되어 전시되어 있다. 물론 나는 그가 믿는 영화(cinema)와 [어벤저스] 시리즈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movie)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극장의 스크린에 걸리거나 넷플릭스 등의 사업자를 통해 안방 TV로 배달되는 영상매체라는 속성은 동일하지만,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에서 이익창출을 위해 탄생한 상품으로서의 영화와 비상업적인 목적 하에 음악-미술-음향-의상 등 모든 종류의 현대예술의 교배를 통해 탄생한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는 분명 그 뿌리를 달리한다. [아이리시맨]은 스콜세지와 그의 오랜 친구들이 믿어온 예술로서의 영화가 어떻게 지금까지도 굳건히 버텨낼 수 있는가를 증명함과 동시에 그가 살아온 한 시대를 아름답게 종결하는, 위대한 결과물이다. 

[아이리시맨]에 대해 할 말이 참 많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앉아 하루종일 이 영화에 대해 떠들고 싶을 정도로 영화의 모든 순간, 모든 컷, 모든 씬, 배우의 표정 하나까지 보물같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스콜세지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그의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성에 대한 관대함, 여성 캐릭터의 의도적인 배제, 혹은 도구로서 존재하는 여성 캐릭터,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장면구성과 클로즈업의 빈번한 사용 등이 나의 구매욕구를 떨어뜨려왔다) 마피아영화나 갱스터영화는 한국의 조폭영화와 함께 가장 진부한 장르로 생각하는 편식적인 영화취향 탓에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한시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하다. 두 시간 반 가까운 시간동안 인물을 차근차근 소개하고 인물 간 관계를 충실히 설명하며 ‘빌드업’해온 영화가 갑자기 영화적 리듬, 혹은 호흡을 확 떨어뜨리며 프랭크(로버트 드 니로 분)의 눈동자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으며, 그 심상치 않은 일이란 역사적으로 이미 발생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로 사건이다. 흥겨운 스윙재즈풍의 노래들과 마피아들의 떠들썩한 수다로 가득 채워졌던 영화가 디트로이트 교외의 한적한 모텔을 배경으로 등장인물에게 무거운 침묵을 툭 던져주었을 때부터 우리는 이 영화적 세계가 완성단계에 다다랐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영화가 마무리되는 과정은 ‘이것이 대가의 솜씨구나’라는 탄성이 나오기에 충분할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이 한 시간은 비단 이 영화 안에서 창조된 세계가 마무리되는 한 시간이 아니라, 프랭크가 회고하는 프랭크와 러셀, 지미 등 주요인물이 경험해온 몇십년의 세월이 마무리되는 시간이기도 하며, 그들이 겪어온 세월이란 감독 스콜세지가 경험한 지난 몇십년 간의 영화의 역사를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철학적 주제를 시간으로 추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먼저 70세를 훌쩍 넘긴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등이 컴퓨터의 힘을 빌어 40대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흥미롭다고 하기엔 애처로운 감정부터 불러 일으킨다. 얼굴은 디에이징(de-aging)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배우들의 육체는 여전히 노년 그대로이기에 액션씬에서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데,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는 자신의 [필름클럽] 팟캐스트에서 이조차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영화의 대주제로 설정한다면 충분히 이해가능한 부분일 뿐 아니라 이 대배우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관객으로 하여금 독특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좋은 수단이라며 옹호하였다. 나는 그의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스콜세지가 드 니로, 파치노, 페시 등과 함께 실화를 배경으로 한 마피아영화를 만든다’는 문구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이 문구에 세시간 30분의 상영시간과 넷플릭스라는 배급사 정보까지 더해지면 영화를 보기 전부터 지루함과 진부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스콜세지가 만든 이 영화가 위대한 이유는 이와 같은 영화 외적인 피상성을 오로지 영화 내부의 완성도만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동일한 배우가 몇십년에 걸쳐 한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냄으로써 이 영화가 단지 지미 호파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실존인물에 관한 흥미로운 서사시에 그치지 않고 영화 그 자체의 역사, 혹은 필름메이킹이라는 작업과정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아우르는 거대한 담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대주제를 ‘시간’으로 본다면 프랭크의 딸 페기(안나 파퀸 분)의 존재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페기는 폭력을 도구 삼아 생계를 이어나가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와의 관계를 서서히 끊어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속한 폭력의 세계를 그저 바라만 볼 뿐 그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중에는 대화마저 단절하며 프랭크의 세계에서 완전히 떠나버린다. 페기 캐릭터가 갖는 이와 같은 속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게 한다. 예컨대 신이나 천사같은 존재 말이다. 이들은 인간이 갖는 유한성, 즉 시간으로 상징되는 한계에서 자유로운 존재다. 프랭크와 러셀(조 페시 분), 지미(알 파치노 분)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분투하는 동안(영화의 메인 시제, 즉 프랭크와 러셀 부부의 자동차 여행기간 동안 러셀과 프랭크는 많은 곳에 들려 수금을 한다. 지미 역시 출소 후 노조 위원장 자리를 되찾기 위해 생명에 대한 위협까지 무시하며 이곳 저곳을 들쑤신다. 노인이 된 ‘현재’까지도 이들은 몇 푼의 돈과 알량한 자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페기는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이들이 흘려보내는 시간을 가만히 주워담는다. 어쩌면 스콜세지 감독이 도달한 영화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지는 바로 신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흥미로운 상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고 해서 이 영화에 단점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폭력에 대한 지나친 관대함은 이 영화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주인공 프랭크는 시대의 관찰자 역할을 부여받지만, 그가 살아온 시대가 아무리 폭력과 비양심의 시대라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승승장구해온 그에게 영화 막바지 – 아주, 너무나 인간적인 – 회한의 감정을 극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미묘한 불편함을 발생시킨다. 현실을 뒤튼 블랙코메디라고 하기에는 그의 감정적 동요가 영화 안에서 상징하는 바가 너무 크다.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여성 캐릭터는 부분적이고 주변적이며 한계적으로 그려진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부분이다. 페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여성도 다층적인 차원에서 그려지지 않는데, 이건 스콜세지가 세 주인공에게 거의 모든 영화적 에너지를 쏟아붓기 위해 선택한 의도적 무시라고 백번 이해한다 해도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영화 내에서 완벽하게 여성적인 색깔이 지워져 있다. 물론 이런 단점은 영화 전체적인 맥락에서 충분히 용서될 수 있을 정도로 단편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이 영화에 별 다섯개를 줄 수 없다거나 ‘올해의 영화’로 선택하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면 아마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리시맨]은 여전히 매우 좋은 영화다. 이건 확실한 사실이다. 

제니퍼 리, 크리스 벅 | 겨울왕국 2

다양성. 최근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일종의 생존전략이다. [모아나]와 [코코]에서는 지금까지 만화속 주인공 역할에서 꾸준하게 소외되어 왔던 유색인종과 비백인 문화권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토피아]와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이 영화철학의 근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주제의식이 된다. [겨울왕국]은 남자’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꽤 인상적이었는데, 안나와 엘사라는 젊은 자매가 전면에 나서는 가운데 남자 캐릭터들은 찌질한 악당이나 충실한 사이드킥으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즈니 에니메이션이 대단히 진보적인 사상을 충실하게 실현하는 그런 존재는 아니라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여전히 전 세계의 모든 여자 아이들은 엘사의 여성스러운 흰색 드레스에 열광한다. (물론 [겨울왕국 2]에서는 엘사가 바지를 입는다는 점에서 약간의 발전을 내비치지만, 디즈니의 ‘진보’는 딱 이정도 수준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기도 한다) [코코]와 [인사이드 아웃]이 그토록 찬란하게 펼쳐 놓았던 서사구조의 마지막 지점에는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로의 공손하게 회귀본능이 존재한다. 최근 가장 성공적인 프랜차이즈였던 [토이스토리]는 4편에 이르러 결국 새로운 세상으로의 확장을 이루어내지만, 이 역시 ‘정상’적인 남성 장난감과 여성 장난감 간의 이성적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아주 혁신적인 엔딩은 아니었다.

디즈니는 항상 이 정도의 애매한 성장을 이루어내면서 생존해왔다. 그 성장의 정도가 사회철학, 혹은 사회적 가치의 성장속도보다 느릴 때에는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 문제는 그 반대의 경우에도 그리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겨울왕국]처럼 이미 공고하게 형성된 새로운 페러다임 – 여성 중심의 서사 – 에 엘사의 목소리와 같은 킬러 컨텐츠를 살짝 끼얹는 방식의 ‘수요 맞춤 전략’이 통할 때에만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셈이다. [겨울왕국 2]는 약간 뒤따라 가는 느낌이다. 여전히 엘사는 압도적이고 안나는 진취적이며, 남자 캐릭터는 수동적이다. 개그를 담당하는 캐릭터들은 마치 그렇게 태어나기라도 한 것 마냥 웃기는 데에만 집중한다. 결말은 누구나 알고 있듯 해피엔딩이지만,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는 더이상 아닐 것이라는, 누군가는 희생을 할 것이라는 사실도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이런 구도는 이제 식상하다. 새로운 것이 없다. 이 사회는 이미 현실에서 그러한 가치들을 충분히 실현하고 있다. 에니메이션은 상상력이 극대화된, 현재의 사회가 가고 싶어하는 아주 가까운 미래의 세상일 것이고, 그 상상력이 이미 현실이 되어 영화 속에서 구현될 때 우리는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겨울왕국 2]의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하품 포인트’는 이 영화에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엘사가 다시 한번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드레스를 꺼내 입기 위해서는, 디즈니가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판이 필요한데, 현재의 디즈니에게는 그걸 세상에 역으로 먼저 제시할 정도의 역량은 없어보인다. [겨울왕국 3]는 이 사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꽤 많이 움직였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린 램지 | 너는 여기에 없었다

린 램지 감독의 전작 [케빈에 대하여]는 보지 않았다.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이 영화를 볼 기회가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략적인 시놉시스를 읽은 후 그 영화를 봐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보지 않았다. 영화를 감상한 후 어떤 감정이 들어설지,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느끼게 될 그 감정이, 해야 할 그 이야기가 싫었다. [킬링 디어]를 보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때문이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색깔의 영화들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도 원래 나의 영화취향에 따르면 챙겨 볼 확률이 극히 낮은 쪽에 속하지만, 출근길에 들었던 [김혜리의 필름클럽] 팟캐스트에서 김혜리 기자가 그녀가 평소에 구사하지 않는 상당히 예외적인 표현을 동원해가며 찬사를 보냈기에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특히 그가 [드라이브]를 두어번 반복해서 언급했을 때(비록 그것이 조니 그린우드의 영화음악에 대한 묘사였다 하더라도) 마침내 이 영화를 집에 가자마자 꼭 챙겨봐야겠다 마음먹게 되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감독/각본을 담당한 린 램지와 화면을 꽉 채운 주연배우 와킨 피닉스와 영화의 청각적 요소를 담당한 조니 그린우드, 이 삼총사가 빚어내는 호흡이 특유의 흥미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는 영화다. 영화의 서사구조는 단순하며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직관적이다. 전직 군인으로 추측되는 ‘조’는 해결사로 일하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다. 거의 매일 자살을 시도하는데, 어머니가 살아있는 한 정말 자살할 생각은 없어보인다. 그가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어린 시절 겪었던 학대와 군인 시절 경험한 살인, 혹은 죽음에 대한 경험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조’의 회상으로 그려지는 이와 같은 과거 장면들은 찰나의 시간동안 단편적으로 스쳐지나갈 뿐이다. 과거 회상씬 뿐 아니라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이 ‘조’, 혹은 그를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으로 처리되는데, 그러니까 영화는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진행이 되거나, 그런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서사구조가 헐겁다고 느끼는 관객이 있을 수 있으며 영화의 단순한 서사구조만을 따라가다 금세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친절하게 선후관계를 설명해주기보다 한 상황을 넌지시 제시하고 관객에게 많은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데, 그 설계가 꽤나 촘촘하게 이루어져 있어 영화 속 상징을 오독하거나 숨어있는 서사를 놓치는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빈틈이 많기 보다는 비어있는 공간을 관객이 적극적으로 채워나가게 하는 매력이 있는 영화인 셈이다. 음악으로 치면 The XX의 1집 음반같달까. 이 묘한 ‘비어있는 꽉참’은 독의 연출과 피닉스의 연기, 그리고 그린우드의 음악/음향이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영화의 제목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그 자리에 없는 것으로 추정되어야 하는 해결사 직업을 가진 ‘조’의 삶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조금 더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 ‘조’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 가졌던 관계성을 전이시키게 되는 ‘나나’와 함께 떠나게 되는 새로운 여정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가 맞이하는 터닝포인트는 ‘조’가 현역 주지사의 심복인 상원의원으로부터 그의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뒤 어린 소녀들을 감금하고 유린하는 사창굴로 찾아 들어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안에 ‘나나’가 있다. ‘나나’의 발견은 ‘조’의 유일한 삶의 이유였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귀결되고, ‘조’는 자신과 같은 괴물로 변해버린 ‘나나’와 함께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상원의원과 주지사가 사망한 이 꽤 큰 사건의 한복판에 서 있는 ‘조’와 ‘나나’가, 현역 경찰관까지 매수되어 아무한테나 함부로 총질을 해대는 이 세상에서 전과 같이 온전히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디로 갈지 알 수도 없으며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조차 없다.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 ‘나나’는 “날씨가 참 좋다”고 웃으며 말하고, 아마도 ‘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좋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 정도일 것이다. 즉, 그들은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죽음으로 가고 싶어했던 한 사내가 자신이 모든 것을 걸고 지키려 했던 어떤 존재를 상실한 후, 사실상의 죽음을 얻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그리 틀린 설명은 아닐 것이다.

연출은 감각적이다. 피닉스의 연기는 여전히 훌륭하다. [마스터]와 [그녀], [조커]를 지나 [너는 여기에 없었다]까지 다다르니 살짝 피로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 얼굴보다 황정민 얼굴을 더 많이 볼 때의 피로감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그가 다작을 한다고 사실때문에 그의 연기력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조니 그린우드의 영화음악은 [데어 윌 비 블러드]에 비하면 훨씬 정교하고 노련해졌다. 그래서 그 당시의 참신한 맛은 많이 사라졌지만, 이제는 정말 당당히 당대 최고의 영화음악가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린 램지의 영화는 처음 접했는데, 호불호가 갈릴 법한 방법론을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저력이 느껴져 오히려 더 좋았다.

타마라 젠킨스 | 프라이빗 라이프

최근, 그러니까 몇 개월 전 우리 부부는 임신을 했다. 2016년 말 결혼 이후 약 2년 반 만에 처음으로 가진 아이인데, ‘첫 아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한꺼번에 생긴, 약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새로운 생명으로 인해 우리 가정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부부를 둘러싼 다른 가족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뻐했다. 이번 임신을 꽤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고작’ 결혼 후 2년 반 만에 가진 아이였다. 본격적으로 임신을 준비한지는 1년이 채 되지 않았고, ‘불과’ 몇 개월 간의 실패(그러니까 부모 양 쪽의 몸으로부터 출발한 난자와 정자가 정해진 시간에 적절한 방식으로 만나지 못한 결과로 조용히 각자의 생을 마감하는 것을 이쪽 업계에서는 보통 실패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끝에 임신을 하게 되었으니,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난임, 불임 부부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우리 부부는 상당히 무난하게 임신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몇 개월의 ‘실패’의 기간동안 많이 힘들어했다. 함께 많이 울었고, 또다른 실패를 겪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을 새롭게 공부해야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성교육 시간에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며 여성의 ‘주기’와 착상 등의 정보에 예민하게 집착했고,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임신이 힘들다는 판정받을 경우 받아들여야 하는 여러 대안들을 준비해야 했다. 인공수정, 체외수정, 난자기부 등 다양한 기법들을 먼저 경험한 부부들의 경험담을 들으며 그들이 겪은 고통을 마음 속으로 나누기도 했고, 우리가 대체 얼마나 큰 행복을 얻으려고 이 고생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아마 우리 부부만 이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부부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었고, 이 세계에 미리 들어와 고군분투 중인 수 많은 엄마, 아빠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프라이빗 라이프]는 넥플릭스에서 제작한 영화로, 타마라 젠킨스라는 감독이 자신이 직접 쓴 각본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이 감독의 전작들을 본 적은 없지만 이 영화가 발표된 해 최고의 영화들 중 하나로 손꼽혔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고, 최소한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로 올라갈 정도의 작품은 꼭 보고 싶어하는 성미 덕분에 넷플릭스 위시리스트에 오래 전부터 올려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이 영화를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영화의 줄거리가 우리 부부가 최근 겪어온 현실과 지나치게 가깝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영화라는 예술은 현실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만 관객이 속해있는 현실과 지나치게 가까울 경우 오히려 그 관객으로부터 거부당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화란, 현실에 기반하여 제작하되 어느 정도의 추상화(abstraction) 과정을 거쳐 보편화, 일반화(universalization)시켜야 비로소 관객이 조금은 마음을 놓고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실을 환기시키되 현실로부터의 도피처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 조금은 복잡한 영화의 속성 때문에 우리같은 ‘기피’관객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프라이빗 라이프]의 주인공 레이첼과 리처드 부부는 뉴욕에 사는 40대 중산층으로, 거실 한켠에 쌓여 있는 주사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마도 꽤 오래 전부터 임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듯 보인다. 두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면서 각자의 직업도 충실히 꾸려오고 있는 부부지만, 오직 삶에서 아이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 둘을 임신에 대한 “집착”으로 이끌게 된다(영화 속 이들 부부와 친한 친구 부부 간 대화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영화는 인공수정과 입양이라는, ‘정상’적인 임신방법을 통하지 아니하고 아이를 가정에 들일 수 있는 ‘대안’을 마주하게 되는 이 부부의 이야기를 주된 서사로 다룬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체외수정의 건조한 각 단계가 하나의 챕터를 형성하는 가운데 인공수정을 위해 한 부부가 겪어야 하는 끔찍한 병원에서의 체험이 긴 인트로처럼 보여진다. 어떠한 이유로 인해 타인의 난자를 제공받아야만 하는 상황과 과거 입양을 시도했으나 어이없는 이유로 실패한 사연 등이 순차적으로 보여진 후, 영화는 일종의 순환고리와 같은 구조로 부부의 ‘반복되는’ 삶을 조금씩 뒤틀어 다시 보여준다. 과거에도 수많은 시도를 했고 실패를 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밝힌 후, 이 부부가 또 한번의 실패를 겪는 과정을 영화의 주된 서사구조로 활용하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또 다른 시도의 첫 출발점을 보여줌으로써 이 부부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삶을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 것임을 적극적으로 증명하고 예언하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조카 세이디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 떠들썩한 한바탕 소동이 마무리된 후, 주인공 부부인 레이첼과 리처드는 다시 평범한 일상 속으로 들어가 반복되는 삶을 경험하지만, 큰 사건을 겪은 그들의 삶은 더이상 전과 같지 않다. 그 예로 할로윈 기간 사탕을 얻기 위해 부부의 집을 찾아온 꼬마들을 대하는 부부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들 수 있다. 오직 임신에만 집착하여 동네 꼬마들에게 사탕 하나 내어줄 마음 속 여유조차 갖지 못했던 이들이 닉슨과 힐러리 클린턴의 가면을 쓰고 아이들에게 어떤 분장을 했는지 물어볼 정도의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영화는 딱 이정도의 성장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다. 50대의 문턱에 다다른 중년의 부부가 아이의 ‘결여’를 내적으로 극복해내는 과정은,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사실 그렇게 극적이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동안, 충분한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며 아주 서서히 성장하는 가운데 이겨내야 하는 것이 보통의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의 과제다. 영화는 그 과정을 상당히 현명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나름대로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 절실히 기다렸던 아이가 이번달에도 오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 고통은 커져갔다.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을 찍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남들은 다들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임신이라는 것이 왜 우리에게만 이토록 어렵게 오는지 괜히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쌍둥이를 아내의 배에 가득 안은 지금, 당시 상황을 복기해보면 ‘왜 그렇게 오버했나’ 싶어 금세 부끄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 그 자체임을 잊으면 안된다. 우리 모두는 아이를 갖던 갖지 않던, 결혼을 하던 하지 않던, 그 어떤 상황에 있건, 매우 미숙하고 어리석은 존재다. 그 미숙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과 아주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인생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느린 속도로 어떤 방향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는 말도 맞다. 거북이처럼, 달팽이처럼, 조금씩 인내하며 움직이다보면 어떤 지점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임신의 과정을 통해 이 교훈을 조금 더 배웠다. [프라이빗 라이프] 역시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 언노운 걸

다르덴 형제는 변화하고 있다. 전작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어슴프레한 희망을 내비쳤던 이들은 [언노운 걸]에서 본격적으로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작과 이번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잘 알려진 전문배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일텐데, 이와 함께 이 두 영화를 다르덴 형제의 필모그래피의 다른 영화들과 구분지을 수 있는 지점은 희망의 메시지를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영화적 시선의 변화에 있다.

젊고 유능한 의사 제니 다방은 이제 막 3개월 임시 주치의 생활을 마치고 꽤 좋은 조건을 제시한 큰 병원으로 옮길 참이다. 하지만 마침 그날 저녁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같은 병원에서 수련의로 있던 인턴 줄리앙에게 의사로서의 사명감에 사로잡혀 몇 마디 쓴 소리를 하던 와중 밖에서 들려온 벨소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게 된다. 병원 문을 닫은지 한 시간 지난 뒤 찾아온 손님을 웬만해서는 받아들이는 그녀였지만, 왠지 그날따라 줄리앙을 훈육시킬 목적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외부의 손님을 거부한 것이다. 줄리앙은 무언가를 느낀채 화가 나 뛰쳐나가고, 제니는 다음날 자신을 찾아온 형사들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자신이 거부했던 그 손님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젊은 흑인 여자였고, 그날 밤 병원으로 들어가려는 요청이 거부된 뒤 근처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큰 병원으로부터의 이직을 거부한채 임시 주치의로 있던 병원을 아예 물려받기로 결심하고, 그날로부터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채 죽어야 했던 흑인여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와 함께 자신에게 심하게 혼난 후 의사로서의 꿈을 꺾은 제자 줄리앙을 찾아가 다시 의사의 길을 걸어갈 것을 설득한다.

사회의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에 위치한다고 보아야 할 위태위태한 영혼들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대표적인 중산층 직업인 의사의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속 인물의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다르덴 형제는 이 사회의 부조리함이 빚어내는 윤리의 위기는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고, 이 윤리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 역시 사회의 구성원 그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감정들이 이끌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는 죄의식, 죄책감, 부채의식과 같은 감정들인데, 영화가 극적인 반전을 맞이하게 되는 지점 역시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에서 익히 보아온 바대로, 죄책감을 느낀 주인공의 마음 속으로부터 출발한다. 환자들을 프로페셔널하게 치료하는 것에만 집중하던 제니는 자신의 무신경함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한 여성의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속죄와 참회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실 어쩌면 그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우연한 기회를 맞이하여 마음속에서부터 그 감정을 꺼내는 과정을 겪었을 뿐이다.

그녀가 짧은 순례의 길을 걷는 동안 마주치는 세상은 그녀에게 새로운 차원의 구원과 자유를 경험하기에 충분한 순교의 고통을 선사한다. 서류가 미비되어 원하는 치료를 받지 못하자 제니를 위협하는 사람도 있고, 제니가 타고 가던 차를 억지로 세운채 더이상 깊게 파지 말라고 협박하는 사내도 있다. 윤리가 결여된 세상에서 그녀가 걷는 속죄의 길은 의사라는 직업적 특수성과 결부되어 영화의 주제의식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늘 환자의 부름을 받는다. 환자가 있는 곳에는 언제, 어디라도 뛰어간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자신을 찾아온 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때문에, 더이상의 늦은 시간 벨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아예 잠자리를 병원으로 옮겨 새우잠을 청한다. 비록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환자가 죽음의 비밀을 감추려는 사람, 자신을 위협한 사람이라 해도 제니는 왕진가방과 함께 그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순간, 공권력으로부터도 경고를 당한 그녀에게 이름 모를 여성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고, 제니가 쌓아올린 속죄와 참회의 마음을 나누어담는다. 이것이 영화 속 작은 기적일까. 영화의 마지막 씬은 평화로운 표정으로 또 다른 환자를 맞이하는 제니의 모습을 담는데, 이 장면에서 비로소 제니도 구원을 얻은 것처럼 보이고, 그녀가 속한 세계에서 자유를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제니가 정성을 쏟은 또다른 인물인 줄리앙이 전해준 기쁜 소식은, 제니가 구축하려 한 세계가 다음 세대로 전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친다.

우울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다르덴 형제 영화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선사하는 희망찬 메시지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다르덴 형제의 오랜 팬들이 가질법한 또다른 불만은, 제니가 당면하는 과제들이 어쩌면 쉬워보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삶은 생존의 경계에서 몸부림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윤택하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베푸는’ 쪽에 속하는 사람이며, 그녀는 단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어떤 여성에게 가지는 죄책감으로 인해 이 모든 일을 행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지점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 이전까지의 영화들은 너무나 극한 상황에 몰린 이들이 겪게 되는 심리적 고통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 인물들이 선택하거나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어떤 상황들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지는 면이 다소 존재했다. 리얼리즘이라고 하지만 너무 극적인 것이다. 하지만 [내일을 위한 시간]과 [언노운 걸]은 결이 조금 다르다. 얼굴이 많이 알려진 전문 배우가 화면을 가득 채운 이 영화들은, 어쩌면 피할 수도 있었을 미묘한 상황에서 피하지 않고 용기를 내는 보통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가 과감히 마리옹 꼬티아르와 아델 아에넬을 캐스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보통의 관객들에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기 위해서는 이런 배우들이 아니면 안되는 거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나가는 아델 아에넬의 연기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표정 하나, 동작 하나에서 제니의 고뇌가 느껴진다. 다르덴 형제의 원래 방식대로 무명의 연기자를 캐스팅했다면 어쩌면 매우 위험해질 뻔한 영화였다는 생각도 든다.

이동우 | 노후 대책 없다

영화는 홍대 놀이터 앞에서 공연 중인 한 펑크밴드의 모습을 담는 것으로 시작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와 차라리 소음에 가까운 디스토션 기타, 드럼을 때려부수기 위해 스틱을 휘두르는 듯한 드러머 등이 어우러진 이 4인조 하드코어펑크 밴드는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노후 대책 없다]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파인더스팟이고, 영화는 또다른 주인공 스컴레이드와 파인더스팟이 함께 떠나는 짧은 여정을 함께 한다. 영화의 감독이자 카메라를 주로 들고 있는 촬영감독이기도 한 이동우 본인이 밴드의 멤버이기도 하다. 멤버들의 인터뷰와 공연장면이 교차 편집되는 기본 구성에 로-파이 가득한 홍대 지하실의 습한 공기를 가득 품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 굳이 서사구조가 있다면, 두 밴드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작은 하드코어펑크 페스티벌에 참여하면서 겪게 되는 크고작은 소동들의 연대기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비추어지는 한국의 하드코어펑크씬은 규모가 그리 커보이지는 않는데, 어쨌든 그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맺어지고 열정이라던지 실망과 같은 구체적인 감정들이 오고가는 와중에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 사는 젊은이 몇몇이 멀지만 가까운 해외로 나가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무언가를 느끼고 돌아온다. 언뜻 보면 ‘일베’같아 보일 정도로 입에서 욕이 떠날 때가 없으며, 때로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답없는 젊은 세대의 망가진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멤버들은 번듯한 직업이 있거나, 사회운동을 하다 감옥에 들어갈 처지에 놓였거나, 오래전부터 꾸준히 일관된 프로젝트에 몰두하거나 하는 식으로 각자의 세상을 소중히 꾸려온 사람들이다. 부모의 집에 얹혀 사는 처지이지만 최소한 자신의 생계는 스스로 꾸려가기 위해 노력하며, 사고를 쳐서 직장에서 잘렸다면 편의점에서라도 그 삶을 이어가려 애쓴다. 이들이 말하는 ‘펑크’정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군대 휴가를 나와 술에 취한 나머지 멀쩡한 식당의 수족관을 깨부순 이가 몇 달 뒤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 가게 사장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은 ‘한국’의 특수성과 어떻게든 타협해보려는 ‘펑크’의 모습처럼 읽히기도 한다. 중간에 단편선과 같은 꽤 유명한 사람도 등장하는데, 이들이 언급하는 여러 무거운 이슈들은 두 밴드 멤버들의 어처구니 없이 웃긴 모습에 치중하던 전반부에서 어느정도의 ‘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제법 진지해지는 영화의 후반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영화에 따르면, 스컴레이드와 파인더스팟,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는 동지들은 나름의 진지함을 가지고 있다.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예술인’들이며, 자신들의 시선에서 충분히 부조리한 세상에서 나름의 행동을 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동하는 지성인들이다. 물론 이들의 행동이 사회의 평균적인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는 또다른 문제이지만, 절망보다는 희망을, 냉소보다는 연대를, 말 뿐인 위로보다는 현장에서의 행동으로 상징되는 이들의 모습이 마냥 ‘대책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펑크라는 음악장르가 기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 혹은 남성중심주의의 한계는 영화 속 밴드들의 모습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밴드 안에 여성멤버가 있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부분의 공연장면과 인터뷰장면에서 강하고 그릇된 형태의 남성성의 발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정작용을 바라는 것은 씬의 특징을 고려할 때 아무래도 무리이겠지만(실제로 SNS를 통해 감독 및 출연진의 성추행 의혹 논란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러한 한계까지 적나라하게 관찰된다는 점에서는 영화가 갖는 또다른 의미가 없지는 않은 셈이다.

2016년 이 영화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공개된 후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고 결국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기존에 존재하던 정적인 방법론에서 과감히 벗어나 날 것 그대로의 ‘펑크’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론을 택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영화는 무겁지 않고 오히려 밝은 편이다. 멤버들이 또 어떤 사고를 칠지 몰라 전전긍긍해 하지만 않는다면, 노이즈 가득한 기타사운드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마지막까지 즐거운 기분으로 볼 수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