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그린 | 우주의 구조

나는 ‘문돌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꽤 다양한 상황에 “문송합니다”를 속으로 외쳐야 한다. 공학자들이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나사(NASA)가 지구 밖으로 위성을 쏘아올리며 인류의 진화에 기여하고 있을 때 하릴 없이 물가상승률의 근원 따위를 고민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음에 죄책감을 느낄 때가 많다. 나처럼 뼛속까지 문과생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에게 과학, 그 중에서도 ‘N차원’의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수학과 물리학이 선사하는 장벽의 높이는 어마어마하다. 당장 내일 뭐 먹을지 고민해야 하는 미생인 우리에게 우주의 탄생이니, 힉스장이니 하는 소리는 얼마나 멀게 느껴지는가.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하루 하루의 일상이 블랙홀의 엄청난 중력장이나 1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초끈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물리학의 어려운 이론들은 더이상 나를 좌절시키는 장벽이 아니라 반드시 이해하고 싶어지는 무궁무진한 진리의 바다가 된다.

[엘리건트 유니버스]를 쓴 초끈이론의 대가 브라이언 그린의 2005년 저작 [우주의 구조]는 나와 같은 ‘물포자’ 혹은 ‘수포자’들도 쉽게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게 쓰인 우주물리학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책은 우주의 구조를 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을 시간순으로 따라간다. 뉴튼, 아인슈타인, 양자역학, 초끈이론까지, 우주물리학의 혁명적인 진화를 발생시킨 이론들에 대해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하는데, 특히 3차원 이상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같은 일반인들을 위해 현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를 그림과 함께 제시함으로써 대략적인 감 정도는 잡을 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저자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뉴튼의 고전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특수/일반 상대성 원리는 나도 어디서 조금이라도 들어본 것이 있으니 그나마 따라갈 수 있겠다 생각했지만 왠걸, 내가 알던 그 이론들이 아니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과학자들이 그 바닥(?)에서 발전을 이루어내기 위한 중요한 주춧돌이었다는 사실을 접할 때에는 나의 영웅인 거시/금융경제학계의 거장 마이클 우드포드나 조르디 갈리도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겠구나 싶어 가뜩이나 커져만 가는 겸손함이 한번 더 극적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뉴턴-아인슈타인-양자역학을 지나 초끈이론에 다다를 때 쯤이면 각 이론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극적으로 달라져 과연 어느 이론에 내 우매한 머리를 기대어야 하는지 혼라스러울 지경이 되었다.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워낙 달리는터라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수많은 페이지에 종이 플래그(flag)를 붙여 가며 한문장 한문장 따라가다 가로막혀 앞의 페이지를 다시 복습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아주 희미하게나마 우주물리학의 큰 흐름이 보이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좋은 교양서이고,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애란 |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소설가의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에는 좋은 문장들이 넘실거린다. 당대 최고의 작가와 자신의 문장사전을 비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겠지만, 책을 읽다 보면 똑같은 순간을 포착하고 느꼈음에도 난 왜 저리 아름답게 표현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우매한 내 머리를 자주 흘겨보게 된다. 김애란의 글은 참 좋다. 300쪽 가까운 책을 읽으며 단 한번도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순간을 마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그와 내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이 조금 다른 사람도 고깝게 생각하지 않고 그의 글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김애란의 글이 가진 또다른 힘 덕분일 것이다. 진심. 그의 글에서는 항상 진심이 느껴져서 좋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에서 [두근두근 내인생]의 모체를 목격하는 신비로움을 느끼게 되고, 동료 작가를 묘사하는 글에서는 타인에 대한 진득한 애정이 묻어나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느낌이라 그 묘사의 대상을 전혀 모르는 나까지도 덩달아 애정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만 같다.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는 글, 용산참사 유가족을 바라보는 글에서는 역설적으로 그와 같은 인간이 이 시대를 함께 살아주고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차가운 반지하방같은 현실을 드러내는 문장 속에서도 꿋꿋하게 스며든 유머나 긍정의 힘 뿐 아니라, 모든 문장에 대해 오롯이 책임을 지려 하는 그의 꼿꼿한 시선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이 한국사회를 함께 살아주어서 참 고맙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의 뒤에 서서 독자와 약간의 거리를 둘 수 있었다면 수필은 독자와 직접 마주 대하는 느낌이라고 밝혔는데, 독자인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에드워드 사이드 | 경계의 음악

[경계의 음악]은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미국에서 주로 활동한 음악가이자 문명비평가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클래식 음악 비평을 모은 음악비평집으로, 1983년부터 2003년까지 약 20년에 가까운 사이드의 평론을 모아 집대성한, 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지난 여름부터 책상 위에 두고 약 3개월여에 걸쳐 읽었는데, 그 이유는 책이 두꺼워서라기 보다는 빠르게 읽어내려가는 것이 아까워서였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이 책에 수록된 그의 글은 주로 [더 네이션]과 같이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비평잡지에 수록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분량 자체는 그리 길지 않지만, 그 짧은 평론글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느린 호흡으로 음미하며 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풍부한 배경지식과 깊은 성찰을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하루에 두편, 혹은 세편 이상의 평론을 읽는 것이 벅차게 느껴졌으며, 한 편의 평론에 포함된 음악가의 음악을 듣고 관련 정보를 더 찾아 본 후에야 사이드의 평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에선가 언뜻 김애란 작가도 이 책을 집 안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디저트를 먹듯 하루에 한 편씩 천천히 읽어내려갔다는 내용을 접한 기억이 있다. 실로 이 책은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는 클래식 음악과도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른다. 지식을 과시하는 용도로 음악을 활용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쪽이지만, 무언가에 대해 ‘안다’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자신감과 함께 실제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인류가 쌓아올린 가장 견고한 예술적 성취 중 하나인 클래식 음악을 그저 피상적으로 접해온 것에 대해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도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다. 사이드의 평론은 이러한 나에게 클래식 음악을 접하는 교과서적인 지침을 전달해줌과 동시에, 음악이라는 무형의 예술을 평가하는 방법론적인 차원에서도 많은 가르침을 전달해주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사이드는 특히나 클래식 공연 비평에 공을 들였는데, 기록으로 영구히 남게 되는 음반과 달리 공연은 그 이벤트가 행해진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바로 휘발되어 버린다는 특수성이 있으며, 사이드는 그 특수성을 면밀히 포착하여 당시 ‘현재’에 존재했던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까지도 생생하게 기록하고 분해한 뒤 그 안에 숨은 음악적 의미를 철저히 파헤친다. 사이드 평론의 또다른 특징은 당대의 걸출한 음악가 모두 그의 날카로운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모두가 칭송하는 연주자, 지휘자, 음악학자 모두 사이드 앞에서는 그저 수많은 단점을 가진 존재일 뿐인데, 단순히 깎아내리기 위한 비판이 아니라 사이드만이 가진 철저한 기준 위에서 단단한 논리를 가지고 행하는 비판이기 때문에 건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니까 욕을 먹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그런 수준의 비판이다. 마지막으로 사이드의 비평은 지역적인 특성을 지닌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며 유태인의 시오니즘에 반대해온 그가 반유태주의로 유명한 바그너의 음악을 면밀히 관찰한다는 그 형식 자체로 이미 책의 전반부부터 충분한 흥미를 자극하는데,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연주자 겸 지휘자 바렌보임이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여 불러일으킨 논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에 다다르면 그의 시선이 매우 객관적으로 정제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대의 지식인들이 가끔씩 놓치게 되는 대목들, 예컨대 다수의 대중에 휩쓸려 소수의 천재가 곤궁에 처할 때 그를 구출해주지 못하는 비겁함 등에 대해서까지 지적하는 모습을 통해 촘스키의 표현대로 “지행합일의 모범”으로 추켜세워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우선 이 책에서 사이드가 비판하지 않고 오직 칭찬만 늘어놓은 유일한 음악가인 글렌 굴드의 음악을 반복해서 틀었고, 미처 구입하지 못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반을 위시리스트에 올려놓았다. 음반목록 어딘가에 잠자고 있던 바그너의 오페라 선집을 꺼내들었으며, 브루크너, 쇤베르크, 바르톡 등 아직 시도해보지 못한 현대음악가들의 음반 역시 위시리스트에 올려 놓았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극적으로 넓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에 적은 것처럼 비록 조심스러울지언정 새로운 세계로 한걸음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이미 큰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무척 뛰어난 번역가에 의해 번역되어 있다는 점을 꼭 기록해두고 싶다.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는 내내 번역으로 인해 미간을 찌푸리는 일이 단 한번도 없었을 정도로 유려한 문장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 읽는 기쁨이 더욱 풍성해졌다.

구묘진 | 악어 노트

문학도 음악처럼 ‘오버’와 ‘인디’를 구분할 수 있다면, 좋은 ‘인디 문학’ 작품을 만났을 때 쾌감을 꽤 크게 느끼는 편이다. 그 인디 문학작품이 작든 크든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어 사회의 공기를 바꾸는 순간도 가끔 일어나는데, 그 때에는 일종의 통쾌함까지 느끼게 된다. 사회의 진화를 추동하는 원동력 중 하나는 과거의 시스템에 구속당하지 않는 창조성이고, 인디 문화는 그러한 긍정적인 에너지의 반동성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인디 문학가로서의 개인적인 삶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도 간접적으로나마 잘 알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인디 문학가의 개인적이 삶이 비극으로 끝났을 때, 가슴 속에는 꽤 깊은 멍자국처럼 먹먹함이 남아있게 된다. 일종의 미안함인 것 같다. 빚을 진 것 같은.

대만의 작가이자 영화감독이었던 구묘진은 1969년 대만에서 태어나 1995년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자살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대에 해당하는 국립대만대학에 입학하여 대만 문학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문학상까지 수상한 그가 머나먼 타국에서 스스로 가슴에 칼을 꽂아 생을 마감해야 했던 이유를 내가 감히 헤아릴 길은 없겠지만, 남들과 조금 다른 성정체성,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외부세계와의 내적 사투가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추측이다. 이른 나이에 생을 거둔 구묘진이 남긴 작품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 장편소설 [악어 노트]는 그의 문학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으며, 최근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1994년에 최초 발표된 이 책은 저자의 죽음과 연계되어 대만 사회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으며, 결국 2017년 대만에 아시아 국가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서구 사회에 이 작품이 알려진 시기도 2017년 즈음이다. 번역가 보니 휴(Bonnie Huie)의 노력으로 미국에 영어로 출간된 이 책은 뉴욕 타임즈 등의 매체의 즉각적인 찬사를 이끌어냈고, 더 펜 번역상 등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린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두 문단에 걸쳐 구구절절하게 이 책의 배경에 대해 조사한 바를 적은 이유는, “울면서 번역했다”고 말한 영문 번역가 보니 휴, 그리고 “미안하다”고 옮긴이의 말에 적은 한국어 번역가 방철환처럼, 이 책을 읽는 나를 비롯하여 많은 독자들 모두 이 책을 몹시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그 이유가 위와 같은 시대적 진보와 개인의 비극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라즈’라고 불리우는 주인공이 적은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대만과 중국어권 사회에서 ‘라즈’는 레즈비언 등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인공이 대학교에 막 들어간 첫 학기부터 마지막 학기인 8학기까지의 이야기가 8개의 챕터로 나뉘어 전해지는데, 한마디로 이 책은 ‘죽음’으로 가까워지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자를 사랑하는 본성을 타고난 주인공이 겪는 내적 갈등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마음의 병으로 발전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닫게 된다. 화자는 멈출 수 없는 불같은 사랑과 그 열병이 비극으로 끝났을 때 떠안게 되는 죽음과 가까운 깊이의 절망에 대해 끊이없이 이야기하며, 화자를 둘러싼 인물들 역시 주인공과 비슷한 길을 걷는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인물들이 당면한 죽음으로 가는 이 비극적 길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존재할 뿐, 이 길을 걷는 것을 피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이성애자로 스스로를 재규정하는 것인데, 주인공 라즈 역시 사랑에 실패한 후 남자를 억지로 만나 ‘여성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일 뿐 본질적인 처방전은 아니며,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구실만 제공할 뿐이다. 당시 구묘진이 느꼈던 대만사회의 폐쇄성이 책의 곳곳에서 절절하게 드러난다. 유서와 비슷한 수준으로 읽히는 이 책은 구묘진 개인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전해진다. 구묘진이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몽마르트 유서]와 함께 퀴어 문학에 있어 컬트적인 작품으로 남을만한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는 작품이다.

전자음악을 하는 키라라가 한 시상식에서 “더이상 친구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한 발언은 그 이후 지금까지 내 마음에 부채처럼 남아있다. 그들이 외부의 차별과 내부의 갈등을 동시에 상대하며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나는 사실상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키라라같은 이들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까지, 나는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외로움의 크기를 짐작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이성애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한번쯤 생각해보개 되는 계기가 된 책이다.

오테사 모시페그 | 아일린

영화 [캐롤]을 무척 좋게 봤다. 영화는 유려한 영상미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영화음악, 루니 마라와 케이트 블란쳇의 폭발적인 연기력 등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는데, 이 요소들이 설득력을 얻는 데에는 영화속 두 주인공이 직면해야 하는 시대상과 계급적 차이가 존재한다. 가난한 하위계층 여성과 부유하지만 사회적 구조에 구속당한 상류층 여성이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했을 때의 황홀감과 절망감은 영화관을 나온 뒤에도 마음 속에 남아 때때로 되새김질되었다. 이 영화의 원작인 하이스미스의 작품까지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 작품 뿐 아니라 퀴어 문학 전반에 걸쳐 파트너 간 존재하는 계급적 차이는 서사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종종 사용되어 왔다.

젊은 여성작가 오테사 모시페그의 2016년작 [아일린]은 여러 측면에서 [캐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하위계층 여성이 상류층 여성을 만나 갖게 되는 가슴뛰는 설레임을 세밀하게 포착해내었다는 직접적인 공통분모 외에도 주인공이 느끼는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의 묘사에 집중하는 기본적인 작품의 골격 및 바탕색에서 [캐롤]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만 [캐롤]처럼 서글프게 아름답진 않다. 서늘하고 불편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주인공 아일린은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자라 비뚤어진 자아를 가진 불우한 젊은 여성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인공 여성의 마음 속에서 나오지 않은채 그 속을 끈질기게 탐구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폭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은 직장생활에 시달리지만 끊임없이 자신이 속한 작은 마을을 탈출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의 거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현실에서 과감히 빠져나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큰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 계기가 리베카라는 상류층(으로 보이는) 여성으로부터 시작된다. 리베카는 아일린이 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소를 충족시키는 매력적인 여인으로 그려진다. 아일린은 리베카에게 홀딱 빠지고, 결국 자신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상황이 진전되는 가운데 뜻 밖의 마을 탈출 기회를 얻게 된다.

늙은 주인공 아일린이 과거의 상황을 회고하며 그 내면에 집중하는 서술방식은 자연스럽게 서스펜스-스릴러적 장치를 갖게 만든다. 소설의 서두에 주인공이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 마을을 떠난다는 결말을 미리 공개한 뒤 어떻게 그 결말에 다다르게 되는지 한꺼풀씩 드러내는 구조는 소설을 계속 읽게 만드는 힘 중 하나다. 하지만 정작 그 서스펜스적인 요소는 많이 지루하고 따분한 편이고(대체 언제 일이 벌어지는거야!), 이 소설의 진짜 매력이라고 한다면 정상적이지 않은 주인공 아일린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수만가지 일그러진 생각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식의 묘사로 명성을 떨친 포크너의 작품만큼이나 극단적이진 않다.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빠져들 수 밖에 없게끔 밀고 당기는 쫀득한 문장들이 이 소설이 가진 또다른 매력인데, 아마도 이 점을 인정 받아 세계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왜냐하면 그 외에는 이 소설의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흥미롭지만 지루하고, 명쾌하지만 진부했다. 충분히 잘 쓴 작품이고 모시페그만의 선명한 문체와 서사 스타일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인정받을만한 가치가 있지만 이 작가의 팬이 되기에는 확 와닿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황정은 | 백의 그림자

SNS의 내 타임라인에는 독서광인 친구들의 계정이 몇 있다. 요즘에는 그들이 극찬한 책을 즐겨찾기에 저장해두었다가 어느 정도 쌓이면 한꺼번에 주문하는 패턴으로 책을 산다. 소설가 황정은의 2010년작 [백의 그림자]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읽게된 책들 중 하나다. 170쪽 남짓한 짧은 소설인데, 읽는 내내 책을 손에서 뗄 수 없을 정도로 문장이 쫀뜩하게 맛이 있고, 책을 다 읽고 덮은 후에도 마음 속에 묵직하게 생각할 것들을 남겨주는, 좋은 소설이다. 황정은의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인데, 작가 특유의 문장이나 서사구조, 글에 색을 입혀 나가는 방식이 가히 ‘황정은풍’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압도적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척 ‘영화적’이라고 느꼈다. 시각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좋은 영화, 예컨대 허우샤오시엔이나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를 볼 때 관객은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를 따라감과 동시에 곳곳에 뿌려진 많은 단서들로부터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를 함께 파악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구조주의적 색채가 있는 영화들에서 말이다. [백의 그림자]는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는 구조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헤아리게 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화를 보는 경험과 상당히 유사한 예술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 같다. 그런데 거의 모든 문장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쓰여 소설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장시처럼 읽히기도 한다.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과정에서 독특한 리듬마저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막스 리히터나 닐스 프람의 음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다. 형식적인 면에서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다른 차원으로 날라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 형식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소설 뒤에 함께 실린 신형철의 평처럼 이 소설은 대단히 윤리적인데, 그 예술에서의 윤리성이란 것이 사실 조금만 흐트러져도 우스꽝스러워지거나 또다른 폭력으로 탈바꿈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백의 그림자]는 예술작품에서 윤리성이 담보해야 하는 최대한의 것을 성취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누구도 해하지 않지만, 피상적이지도 않은, 가만히 어루만져 주지만 깊은 위로가 되는, 절묘한 그 어딘가를 찾은 느낌이다. 책을 덮자마자 작가의 다른 작품도 얼른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여선 | 레몬

장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운, 스릴러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탓에 더 빠르게 읽히는 책으로 권여선이 돌아왔다. 그의 책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하지만, 지나치게 감상에 젖어 현실을 흐리게 보는 우를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문장은 따뜻하지만 서늘하고, 포근하지만 날카롭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레가토], [분홍 리본의 시절] 모두 그런 문장으로 쓰인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다. [안녕 주정뱅이]는 권여선이 동시대 가장 중요한 작가라는 사실을 만인에 각인시킨 의미있는 소설집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여기저기 찾아보니 [레몬]은 권여선이 과거에 연재한 중편을 다듬은 결과물이라 하고, 원작은 지금보다 더 짧았다고 한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은 복수에 대한 이야기다. 의문의 사고로 형제를 잃은 한 사람이 16,7년에 걸쳐 복수의 길을 걷는 한편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은 몇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화자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을 조금씩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스릴러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분량이 짧은 편이며 화자의 구성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기존의 권여선 소설과 다르게 서사구조 그 자체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 또한 흥미로운데, 사건의 본질에 접근해가며 서서히 변해가는 주인공의 심리와 함께 책을 덮은 후에도 꽤 묵직한 생각할 꺼리를 남겨둔다. 많은 이들이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있기도 하다. 세월호 이후 남겨진 심리적 채무, 극복될 수 없는 계급 간 차이, 신에의 의지를 통한 현실의 망각과 왜곡 등의 문제가 작품 곳곳에 꽤 묵직하게 스며들어가 전체적인 주제를 형성하는데 일조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방식대로 복수를 완수한다. 하지만 복수의 책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랑하는 형제를 온전히 떠나보내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후 남겨진 이들이 가지고 가야 할 짐의 무게는 많이 줄어들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한 권여선 특유의 연민의 정서가 소설속 낮은 계급에 속한 이들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면, [레몬]의 마지막 부분에서 연민에 더한 애도의 정서가 분출된다. 떠나보내도 떠나지 않는 것이 남아 있다. 애도는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품는 것이 아닐까. 소설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줌파 라히리 | 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가 모국어인 영어를 버리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겠다고 선언했을 때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문장과 글에 인생을 걸고, 결국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두루 쓰이는 언어를 가장 아름답게 직조한다는 찬사를 받게 된 사람이 어느 순간 다른 언어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언어적 이민을 선택할 수 있다니,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자 꽤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건 라히리 개인에 대한 찬사와 존경이지, 라히리의 글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다른 온도로 다가온다. 특히나 한국어가 모국어인 나와 같은 변방의 독자에게는, 조금 차갑게 표현하자면 라히리가 영어로 글을 쓰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든 대수롭지 않은 변화로 느껴질 수 있다. 어차피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는 입장에서는 정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국어와 영어 외에는 읽을 수 있는 언어가 없는 나에게는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를 그녀의 모국어인 영어로 읽는 것이 그녀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마찬가지 차원에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도, 이언 매큐언의 책도, 코맥 맥카시의 책도, 이창래의 책도, 주노 디아즈도, 크리스 리도, 앤드루 포터도… 최소한 한 권의 책은 그들의 모국어인 영어로 읽었다. 그래야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는다 해도 번역되기 전 원어 상태의 문장이 가지고 있던 질감을 조금이나마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어로 쓰인 책을 읽는 데에는 시간도 더 오래 걸리고 머리도 아프다. 휴대폰 영어사전을 옆에 펼쳐 놓고 모르는 단어를 계속 찾아가며 읽어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장은 그 지역의 특산품이기 때문이다. 지역을 떠난 언어는 갈 길을 잃고 방황하기 마련이다. 날 것의 문장을 발견하는 것은 그 지역을 방문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위와 같은 차원에서, 라히리와 나의 사이가 조금 더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쓴 글의 원문을 찾아낸다 해도 더이상 읽어낼 능력이 없다. 그녀의 문장들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이탈리아어로 쓴 첫번째 소설 [내가 있는 곳]이 더 쓸쓸하게 느껴지는 개인적인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은 아주 짧은 호흡의 챕터들도 엮어 있다. 짧은 것은 한 쪽, 긴 챕터라고 해봐야 일곱 쪽이나 될까. 호흡이 너무 짧아 쉽게 몰입할 수 없다는 단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이렇게 소설을 구성했다는 것은 그 짧은 분량 안에서도 충분히 라히리 특유의 풍성한 감정을 녹여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소설은 라히리의 세계에서 익히 보아온 쓸쓸한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 여성은 40대를 넘긴 여성 학자다. 학교에서 일하며 결혼을 하지 않았다. 더이상 다가갈 수 없는 친구를 사모하며, 유부남과의 뜨거운 기억도 가지고 있지만, 부모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과 몇 번의 실패한 사랑 등이 얽혀 현재는 고독을 친구 삼아 평생 살아온 도시를 방랑자처럼 경험하고 있다. 충분히 라히리의 소설이라 할만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소설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장소를 중심으로 주인공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지만 결코 특정 장소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정 지명 등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장점으로 풀이될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의 경우 그보다는 조금 상투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라히리 소설의 주독자층인 30대 이상의 여성이 쉽게 공감할만한 내용을 도구처럼 여기저기 배치시킴으로써 짧은 챕터 구성으로 인한 몰입도 저하를 상쇄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모든 남자를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는 아닌” 주인공이 행하는 거의 모든 행동은 너무나 범세계적이어서 독자는 스스로를 주인공에 투영시키기가 무척 쉽게 느껴질 것이다. 마치 “넌 소심하니까 A형이지?” 와 같은 혈액형 맞추기 게임을 보는 느낌도 든다.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범용적이고 모범적인 답변지의 인상.

[내가 있는 곳]은 줌파 라히리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범작에 가깝다. 그가 오랜만에 신작 소설을 내준 것 자체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어로 떠난 그의 언어가 더이상 내게 감동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약간 서글퍼졌다. 나는 그녀의 영어 문장을 사랑했다. 과거형이다.

에이미 골드스타인 | 제인스빌 이야기

학부 시절 경제학을 처음 배울 때 한 교수님이 일제 강점기의 생활상을 경제학적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이야기하며 당시 측정된 학생들의 신체조건의 비약적인 발전을 예로 든 적이 있다. 즉, 일제강점기 초기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한국인의 신장 및 체중이 유의한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는 통계분석 결과는 당시 피지배계층이었던 한국인의 영양상태가 전반적으로 개선되었다는 가정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는 일제 강점기를 바라보는 두 완전히 다른 시각 –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 수탈론 – 중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가 한반도의 경제적 근대화를 촉진시켰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될 여지가 있었다. 대학 시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일제 강점기에 대한 ‘상식’과 대치되는 내용이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이와 함께, 식민지화, 혹은 독립운동과 같은 ‘거시적’인 사회담론이 같은 시대를 살다간 이름 없는 민초의 ‘미시적’인 삶과 얼마나 괴리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고민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거시경제정책을 전공으로 삼아 공부하고 있지만,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과 같은 거대하고 뭉툭한 정책이 그 영향력 아래 있는 서민 개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꾸게 되는지 추적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고민의 영역이기도 하다.

[제인스빌 이야기]의 원제는 [Janesville: An American Story]다.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에이미 골드스타인이 쓴 르포르타주인데,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부터 금융위기의 여파로 제인스빌의 GM공장이 공식적으로 폐쇄된 2013년까지 5년 간 제인스빌에 사는, 혹은 이 도시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원제가 상징하듯, 이 책은 제인스빌이라는 위스컨신의 작은 도시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경제대공황 이후 미국사회가 겪은 가장 큰 경제위기였던 2008년 금융위기가 어떻게 미국인의 평균적인 삶을 바꾸어놓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다.

이 책은 크게 세 축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한 축은 제인스빌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던 중산층 가족들이다. GM와 리어, 파커 펜 등 우리도 알 법한 글로벌 대기업의 공장에서 착실히 모기지 대출을 갚아나가던 이들이 금융위기라는 외부충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직장을 잃어버린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실직자가 된 이들은 새로운 밥벌이 수단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좌절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희망을 움켜쥔다. 십만명이 채 되지 않는 인구의 소도시 제인스빌이 공동체의식을 기반으로 큰 위기를 버티어내는 과정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이 책이 전달하는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이들을 돕기 위해 애쓰는 위스컨신 지역의 공동체 리더들이 이 책의 두번째 축을 담당한다. 이들은 직업학교를 확장하여 실직자들의 재취업을 돕고, 실직자 부모를 둔 학생들이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학교 안에 생필품을 제공하는 작은 창고를 운영하며, 워싱턴의 정치인들이 위스컨신의 작은 마을에 아주 약간의 관심이라도 둘 수 있도록 동분서주한다. 이들의 노력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수천명이 직업을 잃었지만 직업학교를 통해 재취업에 성공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GM공장은 결국 영구적으로 폐쇄되었고, 제인스빌 공동체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다. 작은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워싱턴의 거대 정치가 지역사회의 실체적 삶과 괴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인스빌 출신의 정치인 폴 라이언과 위스컨신 주지사 스캇 워커 등으로 대변되는 정치인들이 이 책의 다른 한 축을 차지한다. 예산통인 폴 라이언은 고향의 민심을 등지고 워싱턴 중앙정치로 나아간다. ‘선동가’ 스캇 워커는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받은 위스컨신의 서민들을 위한 예산을 대폭 삭감한다. 지역사회의 외침은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선거 전 제인스빌 연설에서 공장을 반드시 살려 내겠다고 공언한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결국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공장들을 폐쇄했다.

이 책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영민함을 보여주면서도 르포르타주의 생생함과 금융위기 이후 시행된 경제회생 정책의 비현실성을 향한 비판의 날카로움은 놓치지 않는다. 극한 상황에 처한 개인이 가족과 공동체를 포기하기 않고 존엄성을 유지하는 과정을 과장되지 않은 묘사를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한편, 이들이 그런 어려운 상황까지 되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혹은 이후 회생의 속도를 더 빠르게 할 수도 있었을, 아니면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여인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수많은 기회들이 허무하게 사라진 현상의 본질을 맹렬하게 파고든다. 5년이 넘는 밀착취재와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 각종 정책에 대한 깊은 이해 등이 어우러져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긴박함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와 뉴욕 타임즈, 월스트릿저널 등 각종 매체에서 그 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하였고, 이 책의 조연(?) 중 한 명인 오바마 전 대통령 등으로부터도 찬사를 받았다.

이 책은 지금까지 경제학자들이 믿고 있던 통념들 중 상당 부분이 실제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일깨워준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실업자에 대한 직업교육의 효과성이다. 제인스빌 주민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 그 지역에 있는 블랙호크 직업학교를 수료한 실직자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고졸 실직자가 재취업에 성공한 사례가 더 많으며, 재교육 과정을 수료한 실직자 중 상대적으로 더 많은 비율이 간헐적 노동에 종사하며 더 낮은 임금을 받았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실업과 관련된 정책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는 부분이 실직자 재교육을 통한 구직기간의 단축인데, 제인스빌에서는 이 정책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먼저 숙련노동자(skilled labor)와 비숙련노동자(unskilled labor)간 직업이동의 차별성이 존재할 수 있다. 변호사나 대학교수는 숙련노동자에 해당하며, 상대적으로 직업안정성이 뛰어나다. 편의점 파트타이머와 같은 비숙련노동자는 언제든 비슷한 수준의 다른 노동자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직업안정성이 떨어진다. 때문에 비숙련노동자에 대해 직업안정성을 높여주는 정책이 사회 전체적인 실업률 억제를 위해서 효과적일 수 있다. 제인스빌에서 일하던 GM공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고졸이었다. 하지만 길게는 30년 가까이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이들을 비숙련노동자로 분류할 수 있을까? 고도로 분업화된 생산체계에서 10년 넘게 장기간 하나의 기술에만 종사해왔다면, 이들이 갑작스러운 실직 이후 약 2년여의 재교육기간을 거쳐 완전히 다른 직종에 지속적인, 혹은 정규직 직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까? 차라리 지금까지 해왔던 같은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다른 지역으로 터전을 옮기는 쪽을 택하는 것이 더 현명할 수 있다. 다시말해 노동이동(labor immigration)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온 맷의 예가 이에 해당한다. 고소득을 보장받는 숙련노동자도, 대체성이 높은 대신 다른 직종으로 변환하기도 쉬운 비숙련노동자도 아닌 이 장기 제조업 종사자들은 기존의 이론대로 직업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다는 결과는, 결국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터전인 특정 지역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직업적 전문성을 계속 발휘하는 일은 금융위기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인데, 이는 지역사회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 책의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우선 군산의 예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GM 군산공장은 2015년 공장의 폐쇄를 통보했다. 이 공장에서 일하던 500여명의 노동자와 GM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500여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지역사회 경기는 꽁꽁 얼어붙었다.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은 당장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해했다. 평생을 컨베이어 벨트에서 살아온 이들이 갑자기 학원을 차리거나 간호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은 실업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라다. 또한 직종간 이동이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나라다. 아직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유효하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2019년 5월, 폐쇄된 GM 군산공장을 국내 한 컨소시엄이 인수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지역 상공회의소와 중앙정부가 노력한 결과다. 고용은 대부분 승계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세금이 들어갔다. 사기업의 경영판단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을 정부가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가는 지금도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첨예한 논쟁거리다. 한국사회는 대기업의 회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정부의 과감한 개입을 요구하여 왔다.

신도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상권을 장악하는 수많은 치킨집도 떠오른다. 대기업 본사의 경영지침에 따라 자유도가 허락되지 않는 환경에서 치킨집을 운영하는 이들은 대부분 평생 치킨을 튀기는 일과 무관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실패에 대해서는 본사가 책임지지 않는다. 전문성을 충분히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은퇴자금을 쏟아부은 이들은 대부분 2년 안에 수익을 회수하지 못한다. 남들보다 조금 빠른 은퇴를 선택했거나 은퇴로 내몰린 이들이 가지고 있던 선택지 중 치킨집이 정말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대우조선과 같은 대기업에 천문학적 세금을 쏟아부으며 회생절차를 돕고 있는 정부는 하루에도 몇백개의 치킨집이 문을 닫는 현상에 대해서는 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것일까? ‘대마불사’가 아니라 ‘소마불사’의 시각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Chloe Aridjis | Asunder

이 책을 산 건 2013년이다. 어떤 경로로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주말 섹션의 책소개 코너에서 리뷰를 읽었을 수도 있고, 당시 살던 볼더의 볼더 서점(Boulder Bookstore)을 어슬렁거리다가 점원 추천 코너에서 덥석 이 책을 집어 들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이후 최근까지 약 6년의 세월동안 이 책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끝내지 못했다 함은 최소한 시작은 해봤다는 이야기다. 최근 이 책에 재도전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책에 꽂혀 있던 책갈피는 과거의 내가 99쪽까지 힘겨운 여정을 걸어 왔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당연히 책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에 1쪽부터 다시 읽어야 했다. 참고로 책은 꽤 짧다. 200쪽이 채 되지 않는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영국 옥스포드에서 프랑스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런던에 거주 중인 작가 클로에 아리히스(Chloe Aridjis)는 두번째 장편 소설 [Asunder]에서 그녀가 가진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십분 발휘한다. 소설의 주인공 마리는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서 감시원으로 10년째 일하고 있다. 소설의 주된 서사 구조는 세 축으로 구성된다. 그녀가 감시원으로 일하는 미술관에 존재하는 오래된 작품과 그 작품에 다가가려는 관람객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경계가 한 축이다. 감시원인 마리는 배경을 알 수 없는 신원미상의 관람객이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에 지나치게 깊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이 주된 임무다. 이와 함께 마리는 10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근무하면서 그 곳에 걸린 오래된 작품이 아주 느린 속도로 미세하게 늙어가는 것을 감지하기도 한다. 마리 본인은 작품의 작은 변화까지 감지할 정도로 예민하지만, 그 변화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은 관람객을 막아야 하는 입장에 서있기도 하다. 소설의 두번째 축은 마리와 그녀의 오랜 친구 다니엘 간의 관계다. 시인을 자처하는 다니엘은 마리에게 박물관에 걸린 작품과 같다. 더 깊게 다가가고 싶지만 경계를 넘는 순간 작품을 훼손하는 관람객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 두렵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우연찮게 발생하게 된 파리 여행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둘만의 여행일 줄 알았던 이 여행에 불청객 피에르가 합류하게 되고, 잔뜩 뿔이 난 마리는 오래된 고성에서 사회성을 잃고 오랜 시간 홀로 은둔하던 성주를 지나치게 자극하다 그로부터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는다. 천천히, 미세하게 홀로 무너져 가는 오래된 작품이 둘러친 경계선을 넘어선 셈이다. 이 여행이 소설의 세번째 축으로 기능한다.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 소설은 다가감과 망설임 사이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이 가진 직업의 특수성을 주인공의 심리와 긴밀히 연결하고, 그 미묘한 떨림을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통해 상징화하는 서사구조는 특별할 것 없이 솔직하고 명쾌하다.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최면술사(hypnotist)의 일화는 ‘인생의 모든 순간에는 상충관계(trade-off)가 존재한다’는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다.

이 소설이 가진 최고의 미덕은 문장의 아름다움에 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입장에서 거의 모든 문장이 하나의 숙제처럼 읽힐 정도로 어려웠다. 문장구조도 어려웠고 단어도 어려웠다. 물론 그만큼 작가가 타협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단어는 정의 그대로 완벽하게 쓰이고 있고, 문장은 다양한 변주를 통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제이디 스미스(Jadie Smith)처럼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쓰이지도 않았고, 주노 디아즈(Junot Diaz)처럼 화려한 언변을 잔뜩 뽐내지도 않는다. 문제는 이 소설의 장점이 이게 다라는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주제와 특별할 것 없는 사건을 평범한 서사구조로 묶어내기 위해 200쪽이나 낭비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을 정도로 이 소설은 무척 지루하다. 작가가 자신의 문장력을 연습하는 연습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 소설을 구상했다는 심증을 확실케 하는 순간이 너무 많다. 묘사는 치밀하지만 지나치게 수다스럽고, 불필요하며, 심지어 쓸모도 없다. 열 세개 챕터 중 아홉개 정도는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설의 종반부까지 켜켜이 쌓아올린 주인공 마리의 인격은 마지막 두 쳅터에서 갑자기 질투심에 눈이 먼 십대 소녀처럼 주저앉아 버리고, 이와 함께 소설의 장르적 특성 역시 갈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한다. (끝나기 20쪽 전부터 갑자기 소설은 정체성에 대해 방황하기 시작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려갔다. 문장은 참 좋은데, 딱 그 뿐인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