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dge of Daybreak|Eyes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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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즐겨보았다. 회차마다 챙겨보았던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열심히 시청했다. 이 드라마가 시작하기 얼마전 한 인터넷 사이트에 연재된 만화를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고, 이때부터 교도소 생활에 대한 관심이 조금 더 구체화되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여러 매체의 평을 종합해보면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실제 교도소 생활에 대한 고증이 꽤 잘된 편이라고 한다. 눈으로 보여지는 구체적인 생활상을 재현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위의 만화와 드라마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을 꽤 섬세하게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교도소에 들어간, 소위 죄를 지은 사람들의 내면은 그렇지 않은 ‘일반인’이 쉽게 깔아뭉개고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조금 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말해보자면, 감옥에 사는 사람들의 ‘영혼’은 맑고 건강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

흔히 현대 대중음악의 뿌리 중 하나로 블루스를 꼽는다. 이 블루스의 형식을 만든 ‘시조’ 중 상당수가 감옥생활을 하던 흑인 노예들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더이상 그리 놀랍지 않은 부분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백인 주인을 살해한 노예, 배가 너무 고파 먹을 것을 훔친 노예, 매를 맞는 것이 너무 아파 구역을 벗어나 도망치다 잡힌 노예, 그외 이런저런 이유로 감옥에서 만난 흑인들이 모여 신세를 한탄하며 흥얼거린 가락이 구전으로 전해져 블루스라는 짧고 우울한 형식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나쁜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오히려 감옥이라는 삭막한 공간에서조차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나의 눈에는, 이들에게 감옥 안에서 노래 한줄 부를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엄청난 특혜나 불평등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감옥과 평생 인연을 맺을 일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죄수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처벌’에 대한 중세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이들에게 허락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조차 박탈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1970년대 버지니아 주립 교도소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6년에서 60년까지 다양한 형량을 선고받은 흑인들이 ‘포우헤이튼(Powhatan)’이라는 애칭을 가진 버지니아 주립교도소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단순 강도부터 살인까지, 이들의 죄목은 다양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 꽤 괜찮은 음악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던 맥어보이 첼리스 로빈슨(McEvoy Chellis Robinson)은 열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들끼리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지만 1969년 약국에서 물건을 훔친 죄로 구속되었다. 제임스 캐링턴(James Carrington)은 가스펠 그룹에서 활동하며 버지니아 지역의 뛰어난 R&B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당시 사귀던 백인 여자친구의 부모가 그를 여자친구 폭행혐의로 고발하면서 모든 것이 뒤틀렸다. 자할 누비(Jamal Jahal Nubi)의 아버지는 블루스맨이었다. 그 역시 버지니아 지역에서 다양한 그룹을 이끌며 퍼커션 주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어느 파티에서 친구들이 그의 차를 몰래 훔쳐타고 나간 사건이 발생했고, 그 차가 나중에 범죄단체에 이용되면서 차의 주인이었던 누비는 순식간에 공범으로 몰려 구속되었다. 이 외에도 코넬리우스 “닐” 케이드(Cornelius “Neal” Cade), 해리 콜먼(Harry Coleman) 등 각자의 사연을 가진 ‘전직’ 음악가들이 교도소로 모여들었다. 이들이 감옥에서 만나 엣지 오브 데이브레이크(The Edge of Daybreak)라는 그룹을 결성한 것은 그래서 우연이라기 보다는 필연에 가까웠다.

누메로(Numero) 레코드에서 내놓은 61번째 복각판은 이 엣지 오브 데이브레이크라는 그룹이 포우헤이튼 교도소에서 만든 최초이자 마지막 정규 음반 [Eyes of Love]다. 이 음반은 1979년 9월 14일, 단 하루, 다섯시간만에 녹음되었다. 그룹의 멤버 캐링턴은 버지니아의 리치몬드에 위치한 알파 오디오(Alpha Audio) 스튜디오에 녹음을 부탁했지만, 교도소 당국은 보안상의 이유로 외부 녹음을 거절했다. 당시 3천불 정도였던 녹음비용 역시 죄수 신분이었던 그룹 멤버들에겐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결국 당시 알파 오디오의 사장이 모든 금액을 지불하고 8명의 특별 감시관을 추가로 고용한 뒤에야 교도소 당국의 감시 하에 녹음을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다섯시간 뿐이었다. 모든 곡은 원테이크 형식으로 녹음되어야 했다. 음반에 수록된 8곡 중 “Our Love”는 교도소측의 빨리 끝내라는 독촉을 받으며 서둘러 녹음된 노래다. 그 와중에 지역 오케스트라를 동원하고 비싼 퍼커션까지 빌려 녹음을 마쳤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Eyes of Love]는 1980년 몇몇 지역 라디오와 언론에서 주목하기도 했지만, 초판으로 발매된 약 3천장의 음반이 홍수로 인해 유실되면서 서서히 잊혀져갔다. 멤버들은 각기 다른 교도소로 뿔뿔히 흩어졌고, 두번째 음반은 녹음되지 못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어떤 멤버는 출소하여 새로운 그룹을 결성하고 활동을 재개했지만, 다른 멤버는 끝내 바깥 공기를 다시 마시지 못하고 교도소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이 음반은 버지니아 로어노크시의 한 레코드샵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이후 누메로 레코드를 통해 복각되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이 완성한 8곡의 소울-블루스 발라드는 무척 아름답다. 다섯시간만에 녹음되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만큼 여유롭고 따뜻하다. 이 음반의 발매사는 ‘포우헤이튼 교정당국’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위와 같은 뒷배경을 모르는 사람이 음반을 처음 듣는다면 꽤 특이한 이름을 가진 레이블이 훌륭한 음반을 발매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감옥이라는 삭막함(이 역시 평범한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눈물나게 아름다운 선율과 이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악기 연주가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데, 단 여덟곡만이 존재하는 바람에 바이닐의 앞뒷면을 뒤집고 다시 플레이시키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듣고 또 들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이 음반을 계속해서 플레이시키면서, 더 깊게 생각하게 된다. 이들의 영혼을, 우리가 감히 재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말이다.

Jackie Shane: Any Other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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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쉐인(Jackie Shane)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누메로 레코드에서 나온 복각판 [Any Other Way]의 발매소식을 통해서였다. 그 전까지 이런 아티스트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전부터 잊혀진 음악가를 발견해서 새롭게 조명받게 만드는 미국 음악산업의 마케팅 기법이 참 부럽기도 하다) 1971년 토론토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진 뒤 그녀는 ‘완전히’ 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캘리포니아에서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기정사실처럼 퍼져나갔다. 2006년 음악연구가 빌 먼슨(Bill Munson)이 재키 쉐인의 트럼펫 연주자였던 프랭크 모틀리(Frank Motley)로부터 그녀의 전화번호를 넘겨받아 직접 통화에 성공하기 전까지, 음악계에서 재키 쉐인은 사자(死者)로 기억됐다. 누메로 레코드에서 발매된 [Any Other Way]은 재키 쉐인이 발매한 여섯장의 7인치 음반과 공연 실황에서 뽑은 노래 25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음악가로서 넘치는 끼와 폭발적인 에너지, 음악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열정,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드는 펑크-소울 음악과 끈적한 블루스 음악이 한가득 담겨 있다. 1960년대 토론토와 보스턴 지역의 인디 R&B 씬에 대한 흔적을 찾고 싶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료이기도 하다. 또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흑인 여성 음악가가 백인 중심의 타지에 뿌리를 내리고 인정을 받기까지 거쳐야 했던 많은 과정들을 따라가다보면 재키 쉐인이라는 인물이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 캐나다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 자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198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이 재키 쉐인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숫자로 정리된 그녀의 커리어는 단촐하지만, 그녀의 삶은 영화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강렬하다. 그녀는 1940년 내쉬빌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조부모와 함께 생활했는데, 네살 무렵부터 여자아이 옷을 입고 노는 것을 즐겼고 여섯살 무렵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의 회고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운명이 어느 정도 정해진 셈이다. 1947년 조부모가 사망한 뒤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오하이오로 이주했지만 열살 때 다시 내쉬빌로 돌아왔고, 그곳에 있는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스펠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녀의 첫번째 우상은 냇 킹 콜이었다. 13살때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여성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러한 그녀를 인정하고 지지했다.

여성 음악가로서 재키 쉐인의 커리어는 십대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동네 근처에 있는 펍에서 드러머로 채용되어 정기적인 공연을 가지기 시작한 그녀는 곧 주목을 받아 엑셀로/내쉬보로(Excello/Nashboro) 스튜디오 밴드의 정규 멤버로 채용되었고, 자신의 밴드 라벨 앤 먼데이(Lavelle and Monday)를 이끌어나갔다.

1958년 고향을 떠나 새로운 음악적 정착지를 찾던 그녀가 새롭게 발견한 곳은 캐나다의 몬트리얼이었다. 흑인들이 그나마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내쉬빌을 떠나 당시 백인과 가톨릭이 중심이 된 도시였던 몬트리얼에 정착하게 된 계기가 흥미롭다. 그녀와 그녀의 밴드가 한 클럽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 머물던 호텔에 갑자기 갱스터 무리가 들이닥쳐 그들을 내쫓으려 했다. 그러던 와중 갱스터 집단의 리더가 그만 재키 쉐인에게 꽂혀버렸다. 자신이 키워줄테니 이곳에 계속 머물러라, 만약 나를 떠난다면 당장 죽여버릴 것이다, 라고 그녀를 협박했다. 당시 19살이었던 그녀는 이것이 운명인갑다, 싶어 그곳에 남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갱스터 두목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농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음악활동을 이어나갔고, 시내 다운타운의 한 클럽에서 프랭크 모틀리를 만나 그녀 커리어의 마지막까지 함께 할 밴드를 얻었다. 모틀리는 디지 길레스피에게서 트럼펫을 사사했다. 쉐인과 모틀리는 1959년부터 몬트리얼의 여러 클럽을 돌며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청중은 보통 200명, 혹은 300명 내외였다. 그때까지 쉐인은 화장을 예쁘게 했지만 남성 정장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당시에는 주로 미드-슬로우 템포의 블루스 넘버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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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토론토로 넘어와 조금 더 큰 규모의 공연을 갖기 시작했다. 윌리엄 벨(William Bell)의 노래 “Any Other Way”를 처음으로 커버한 것도 1962년, 토론토에서였다. 이 노래에는 윌리엄 벨이 직접 쓴 가사가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Tell her that I’m happy, tell her that I’m gay

쉐인은 가사 중 이부분이 좋아 즐겨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래는 Cookin’ 레코드에서 발매되었고, 보스턴과 토론토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토론토에는 R&B만을 다루는 라디오 방송국이 없었지만 “Any Other Way”는 지역 차트에서 2위까지 상승했다. 토론토는 이후 1971녀까지 쉐인과 모틀리가 실제로 거주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그녀의 첫번째 전성기가 펼쳐졌다. 토론토와 보스턴 뉴욕에서 그녀가 커버한 노래들이 7인치 음반으로 발매되었고 빌보드에도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남성 정장을 입고 무대에 올랐지만, 머리를 한껏 길렀고 하이힐도 신기 시작했다. 1967년부터는 토론토의 사파이어 터번(Saphire Tavern)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가지게 되었는데, [Any Other Way]의 뒷부분을 채우는 라이브 실황도 바로 이곳에서 녹음되었다. 토론토 지역사회에서 인기스타로 자리매김하며 그녀의 정체성도 보다 확실히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한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마치 마이클 잭슨을 만난 것 같았다”며 기뻐했고, 그녀와 누군가가 데이트라도 하면 다음날 그 남자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많은 지역 음악가들이 그녀와 교류하는 것을 즐겼으며, 그녀의 공연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찬사를 늘어놓았다. 재키 쉐인의 공연은 당시 토론토에서 하나의 중요한 문화적 구성요소로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체성을 찾은 후부터 지속적으로 차별을 경험한 그녀지만 대외적으로 활발한 양성평등 운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만 그녀 역시 자신이 다르게 취급받는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공연장에서 종종 모놀로그를 길게 행하곤 했는데(누메로 레코드의 복각판에도 “Money”라는 제목의 트랙에서 그녀의 유쾌한 모놀로그를 경험할 수 있다), 그 중 상당부분이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수근거림에 대한 그녀의 쿨한 반응과 마음다잡기에 할애되었다고 한다.

“당신들은 나랑 함께 여행을 해봐야 아, 예수가 재림했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거예요.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엄청 몰려다닌다니까요. 그들은 제가 손을 잡아주고 축복을 내려줄거라는 것을 알죠. 영혼도 치료해주고요. 그러니까 나에게 돈을 좀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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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그녀는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에서 새로운 집을 구했고, 이후 내쉬빌과 토론토, LA 등에서 공연을 하며 커리어를 마무리짓는다. 1971년의 대부분을 LA에서 보냈는데, 당시 그녀는 10년 넘게 계속된 공연에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고 한다. 프랭크 모틀리는 여전히 토론토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모틀리는 그녀가 컴백하기를 바랬지만, 쉐인은 콩코드 터번(Concord Tavern)에서 단 한번의 공연을 더 행한 뒤 완전히 사라진다. 몇번의 공연이 더 약속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모틀리는 공연 약속을 이행하라며 칼을 들고 쉐인을 위협했지만, 이번에는 몬트리얼에서 만난 갱스터 두목의 위협에 응했던 때와는 달리 초연하게 거절하고 뒤돌아섰다. LA에는 연인과 어머니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1997년 그녀의 어머니 제시(Jessie)가 숨질 때까지 그녀 옆에서 조용히 삶을 이어나갔다.

2016년, 토론토 도심에 위치한 22층짜리 한 빌딩에 벽화가 그려졌다. 토론토의 음악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그곳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의 초상화였다. 글렌 굴드(Glenn Gould)와 B.B.킹(B.B. King)처럼 우리에게 잘 열려진 뮤지션들 사이 한가운데에 위치한 재키 쉐인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제가 잊혀졌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더군요. 제가 했던 공연들이 쓸모없는 것들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굉장히 가치있는 일이었어요. 사람들이 저에게 고마움을 표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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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실망스러웠던 음반들.

구입은 했으나 별로 좋게 듣지 못한 음반에 대해서는 블로그에 글로 그 감상을 남기는 것을 꺼려하는 편이다. 순수한 아마추어 입장에서 특정 음반에 대해 굳이 나쁜 말을 해서 얻을 것이 뭐가 있나, 하는 심정이 들기 때문이다. 음반을 구입하기 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문적인 평을 확인하고 미리 음악을 들어보는 과정을 거치지만, 그러한 조심스러운 사전작업에도 불구하고 실망스러운 음반을 손게 들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올해 음악계는 큰 기대 그에 걸맞는 클 실망을 안겨준 음반이 많이 나온 것이 하나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중 ‘굳이 언급해야만 하는’ 음반을 딱 다섯장만 추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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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빈센트(St.Vincent)는 아마도 현재 활동 중인 기타리스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뛰어난 테크니션이자 그녀만의 독창적인 기타사운드를 멋진 음악에 무리없이 버무릴 수 있는 천재적인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작 [Masseduction]은 기타소리 속에 뮤지션이 파묻혀 보이지 않는 재앙이 발생했다. 톡톡 튀는 기타소리는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그것 외에는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지루함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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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D 사운드시스템의 음악을 좋아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들이 위대한 밴드라는 사실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단 한번도, 단 한곡도 내 마음과 이들의 음악이 제대로 연결된 적이 없다. 이번에 나온 음반 [American Dream]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이번에는 다르겠지’라는 기대를 안고 음반을 사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들의 음악은 정말 지루했고 재미가 없었다. 그냥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고 하고 넘어가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너무 많다. 그것을 매너리즘이라고 표현해도 많이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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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엑스엑스(The XX)가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 그리고 이들이 불어넣은 엄청난 기대감, 더 나아가 이들의 어린 나이까지 감안했을 때 [I See You]는 결코 이정도의 완성도에 머물면 안되는 것이었다. 음반은 산만하고 어지럽다. 완성도의 측면을 떠나 정말 절망적이었던 것은 이들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대단함, 그러니까 ‘비워냄으로써 채워지는’ 신묘한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극단을 보여주었던 1집과 비교할 때 상당한 퇴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 음반이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다.

Threefuttorres
토레스(Torres)의 전작 [Sprinter]는 무척 좋았다. 혹자는 그 해의 음반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젊은 여성 뮤지션, 깨어 있고, 신선한 음악을 들려주는 젊은 여성 뮤지션! 이정도면 다음 음반부터 쭉쭉 앞으로 나아갈 길만 남은 것처럼 느껴져야 한다. [Three Futures]는 나처럼 터무니없는 기대까지 하는 사람까지 토레스가 감당해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게감을 이겨내지 못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음반의 흐름은 종종 끊기고 곡마다의 이미지는 설득력 없이 겹치거나 분리된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오히려 중심이 흔들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음반에서 회복될 여지는 충분하다.

아케파
하지만 그 누가 뭐라 해도 올해의 최악의 음반은 단연코 아케이드 파이어의 몫이다.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믿음, 혹은 근거없는 자신감이 극단적인 수준에 도달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참사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음반이다. 그들은 뛰어나다. 천재적이다. 그런데 멍청하다! 가장 사랑하는 밴드에서 가장 기대되지 않는 밴드로 격하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Japanese Breakfast with ADOY at V-Hall in Seoul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첫번째 서울 공연에 대한 기억은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공연시간이 너무 짧아 채 달아오르기도 전에 끝나버린 느낌이 들었고 피드백 소음이 거의 매 곡마다 발생하는 등 사운드도 개판이었기 때문에(이 피드백때문에 무대 위 연주자들도 완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인상을 받았다) 내 생애 최고의 공연이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한국 공연이 확정된 이후 공연을 준비한 당사자들부터 나를 비롯한 관객까지 우리 모두가 조금은 더 감정적이 되었던 것 같고, 아마도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잊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여운이 강하게 남아 있기에 어제 저녁의 기억을 꾹꾹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미쉘 ‘정미’ 자우너는 무대 위에서 많이 행복해보였다. 유난히 무대 위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아보였는데, 그녀가 여러번 밝혔듯 이 공연이 매우 감정적일 수 밖에 없는 많은 이유들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어제 서울 공연은 재패니즈 브렉퍼스트가 2017년 가진 120여 차례의 투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공연이었다. 미쉘 개인으로서는 며칠 뒤 파라솔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할 예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화려하고도 잊지 못할 2017년 투어는 어제부로 종료되었기에 조금은 감정적이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안도감같은 것이 그녀에게 찾아왔던 것 같다. 또한 이 공연은 그녀에게 매우 사적(personal)인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어제가 (외)할머니의 10주기이기도 했고, 그녀의 큰이모와 작은이모가 공연장을 직접 찾아와 주었으며, 3년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모국이자 미쉘 본인이 태어난 곳에서 갖는 첫번째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전하자 큰이모는 “어떤 회사에 다니길래 그런 지원을 해주니?”라고 물었고, 미쉘은 서울 공연장에 사람이 들어차지 않을 것을 매우 걱정했다고 한다. 다행히 어제 공연장은 사람들로 꽉 들어찼고, 미쉘은 아마도 “최고의 회사 식구들”과 함께 퍽 안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연은 감정적인 부분을 떠나 약속에 의해 철저하게 맞추어진 여러 요소들을 결합시키며 진행되는 기술과 공학의 영역이기도 하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멤버들은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프로페셔널했다. 피드백이나 하울링 등 기술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두 음반의 대표곡들을 무리없이 연주해냈다. 여러 매체에서 상찬을 받은 두번째 음반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의 시작을 알리는 “Diving Woman”으로 공연의 문을 연 이들이 두번째 곡으로 “In Heaven”을 선택했을 때, 공연의 절정을 장식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노래가 너무 빨리 나와서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Oh, do you believe in heaven? Like you believe in me”로 시작하는 후렴구가 미쉘 자우너 특유의 비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나올 때 그녀의 사생활과 전혀 관계없는 나까지 코끝이 찡해졌고, 그녀 역시 그 곡으로 무언가를 털어버린 듯 이후 곡들에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무리 없이 노래와 연주를 소화해냈다. 공연 중 가장 인상깊었던 곡은 육중한 쇳소리를 내는 “Jane Cum”이었다. 음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우너의 폭발적인 성량을 유감없이 경험할 수 있었고, 그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공연장을 압도해버리는 순간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함께 무대에 선 남편을 위한 노래 “The Woman That Loves You”, 긴 투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느껴지는 감정을 담았다는 “This House”도 인상깊었고, 오토튠을 입힌 보컬과 전자음악의 요소를 잔뜩 첨가한 이질적인 트랙인 “Machinist”로 공연을 마무리한 점도 흥미로웠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도 스튜디오형 밴드가 아닌 공연장형 밴드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넘치는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꽤 긴 커리어를 보낼 이들의 첫 발걸음을 목격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미쉘 자우너가 첫 곡을 끝내고 한 멘트가 마음에 깊이 남아있다. 첫번째 음반 [Psychopomp]를 만들 당시 아마도 이 음반을 끝으로 꽤 오랫동안 음악 프로젝트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올해에만 120번의 공연을 한 끝에 자신이 태어난 서울에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고, 단 한번도 자신을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진 않았지만 어디선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신들을 지켜봐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는 그 말이 나로 하여금 그들을 오랫동안 응원하고 싶게 만들었다. 코아첼라나 파노라마같은 A급 페스티벌에 가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이 떠오르는 신예 뮤지션을 서울의 작은 공연장에서 볼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아 참, 오프닝 공연을 한 아도이도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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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은 국내 음반들

시간이 흐를수록 블로그에서 국내 음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국내 음악과의 ‘거리’ 설정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에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 아주 최소한의 정보라고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쓴다. 단순히 ‘존나좋군’ 정도에서 끝날 이야기라면 굳이 언어를 통해 정리된 글을 공개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보통 정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확보해야 할 것인데, 국내 음악에 대해 글 을 쓸 때 바로 이 부분에서 자신감을 갖기 어렵다. 해외 음악의 경우 나의 물리적 위치가 외부자적 시선에 머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를 완전히 체득하기 어렵다는 한계와 함께 자연스럽게 최소한의 객관성을 확보하게 되는 반면, 한국에 살면서 한국에서 발매되는 한국 음악을 듣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머리나 귀보다 마음으로 먼저 듣게 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블로그에 우리나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또 지우기를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그냥 마음으로만 즐기며 살기에는 최근 국내에서 좋은 음반들이 많이 나온지라 이를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 다른 말로 하면 마음부터 먼저 움직이게 되는 음악들이다.

 

김사월


김사월: 7102

김사월은 첫 음반을 발매한 후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마치 한국에서 독립 음악인이 음악으로만 먹고 사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절망에 담대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많은 공연장에서 노래를 불러왔다. 이건 마치 한국에서 여성으로, 또 여성 음악인으로 사는 것이 참 많이 피곤하고 불편하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적극적으로 정공법적인 대답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었을 것이고, 또 그만큼 달지만은 않은 현실을 삼켜야 했을 것이다. 김사월의 새음반은 기족의 곡들에 더해 새로운 노래들이 라이브 공연 실황녹음 형태로 담겨 있다. 김사월의 현재, 그리고 그녀가 살고 있는 한국의 현재를 담아내기 위한 가장 좋은 형태의 음반 구성이다. 또한 포크음악 장르의 생명력을 확인시켜 주는 가장 절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녀의 음악은 약간 변했다. 대중음악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따르기도 하고, 무반주 독백처럼 하고 싶은 말을 조금 더 직설적으로 쏟아내기도 한다. 그녀는 지금도 서울을 여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면 벌써 멈추어 서서 정착하기엔 조금 더 살펴봐주었으면 싶은 마음의 구석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새소년 여름깃

새소년: 여름깃

많은 이들이 칭찬한 바로 그 새소년, 듣던대로 역시 좋은 요소들이 듬뿍 들어가 있는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실리카겔의 김한주와 함께 작업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몽실몽실한 드림팝의 색깔도 느낄 수 있어서 더 반가웠다. 내가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이들의 음악을 들을 때 중요하게 고려하는 부분은 장르 안에서의 문법을 확실히 익히고 있는지의 여부보다는 개별 노래 안에서 확실한 훅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느냐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유전자에 가까워서 가르칠 수 없는 부분처럼 느껴지기도 하다가도 노력을 게을리하다가는 평생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재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새소년의 [여름깃]에서는 살짝 미소짓게 하는 좋은 훅들이 많이 보인다. 이게 소속사와 프로듀서가 가진 좋은 상업적 감각덕분인지(마이 캐미컬 로맨스가 그렇게 끌려가다 망했지..) 뮤지션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에 기인한 것인지는 다음 음반에서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전자양 던전

전자양: 던전

사실 전자양의 음악을 습관적으로 많이 듣는 편은 아니다. 우선 보컬의 톤에 대한 호불호에서 나는 불호에 가까운 편이고, 이들이 내세우는 사운드의 핵심 색깔이 ‘반드시 전자양이어야만 한다’처럼 느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자양의 음악을 듣고 싶다면, 그와 비슷한 색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보다 더 좋은 음악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던전]은 조금 더 전자양만이 낼 수 있는 음악에 집중한 듯한 느낌이 들어 반가웠다. 조금 덜 불편하면서도 조금 더 확실해졌다. 그래서 전자양쪽으로 조금 더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몇몇 곡들은 눈이 확 떠질 만큼 정말 좋다.

 

아도이

아도이: Catnip

아도이의 [Catnip]은 최근 가장 좋게 들은 음반 중 하나다. 리얼 에스테이트(Real Estate)의 음악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청량감 넘치는 드림팝 사운드를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적절한 수준의 고민과 적절한 수준의 깊이, 적절한 수준의 정체성 등을 야무지게 뭉쳐서 적절한 수준의 대중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장치를 잘 고안해낸 것 같다. 국내 음반을 들을 때 종종 느꼈던 공통적인 아쉬움이 “너무 레퍼런스가 뻔히 보인다”는 것이다. 아도이의 이번 음반은 나의 그러한 불평을 마치 꿰뚫고 있었다는 듯 정면돌파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했어. 좋으면 됐잖아.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도 동의하게 된다.

 

실리카겔

실리카겔: SiO2.nH2O

실리카겔의 정규 1집은 지난해 가장 인상깊게 들었던 음반 중 하나였다. 남자 멤버들의 군 입대 전 마지막으로 내놓은 EP [SiO2.nH2O]는 1집에서 정돈이 다 된 것처럼 느껴졌던 이들의 사운드가 다시 자유롭게 날뛰기 시작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들의 음악을 듣다보면 익살맞음과 서정성이 묘한 방식으로 얽혀 드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번 EP에서는 이들만의 그런 화학작용이 100% 잘 발휘되는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통일성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음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듣기도 힘들다. 하지만 실리카겔은 우리나라 인디씬을 말할 때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만한 가치가 있는 그룹이고, 이 음반은 이들이 잠시 활동을 멈추기 전 내놓은 마지막 기록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을 하면 콩쿠르같은 과정을 통해 군면제를 받을 수 있는데 왜 대중음악은 그런게 없는지 모르겠다.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Mogwai: Every Country’s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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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혹은 한번이라도 들어본 모과이(Mogwai)의 음반을 세어보았다. 대충 짐작해보아도 8,9장 정도는 넉넉히 들어본 느낌이다. 모과이는 단 한번도 나의 ‘최애’ 뮤지션이었던 적이 없다. 포스트록으로 장르를 국한지어도 항상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이나 익스플로전스 인 더 스카이(Explosions in the Sky)의 이름이 이들 앞에 먼저 나왔다. 심지어 모노(Mono)의 음반 몇 장을 더 인상깊게 들었다고까지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과이보다 더 많은 수의 음반을 내 선반에 꽂게 만든 동시대 뮤지션은 찾기 힘들다. 상 중 으뜸상이 개근상이라고 했던가. 모과이는 내가 음악을 처음 듣기 시작하던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내 곁에서 멀리 떨어진 적이 없었다. 내 음악듣기 인생의 개근상같은 밴드다.

이들은 4,5년에 한 장씩 음반을 발표하는 천년기념물같은 밴드가 아니다. 2년, 아니 어쩌면 1년에 한장씩 새로운 음반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첫번째 정규음반 [Young Team]을 1997년에 발표한 뒤 20년 가까이 활동을 한 이 스코틀랜드 출신 밴드의 모든 정규음반 수는 (라이브 음반과 영화음악까지 합치면) 16장에 이른다. 보통 음반을 준비해서 발표하고 투어를 돌면 2,3년의 시간은 훌쩍 지나기 마련이다. 거기에 개별적으로 휴식을 취하거나 개인활동을 하게 되면 음반과 음반 사이 간격이 4,5년씩 벌어지는 것도 그리 비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모과이는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근면성실하게 음악을 만들어왔다. 정말 놀라운 점은 그렇게 정력적으로 많은 음악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모과이의 음악을 꾸준히 들어 왔다는 사실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 음반을 매년 발표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구매목록에서 쉽게 삭제되지도 않는다. 늘 구미를 당기는 음악을 만들어내고 또 실제로 지갑을 열어 이들의 새 음반을 구매하게 만든다.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정도 수준의 창작력을 꾸준히 보여주었던 뮤지션이 얼마나 있나 세어본다면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모과이는 최근 새음반 [Every Country’s Sun]을 발표했다. 영화음악을 제외하면 2014년작 [Rave Tapes]이후 3년만이다. 밴드의 첫 출발부터 함께 했던 기타리스트이자 주축 멤버였던 존 커밍스(John Commings)가 탈퇴한 이후 발표하는 첫번째 음반이기도 하다. 무언가 큰 변화가 있으리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과이의 열렬한 팬이 아닐 것이다. 20년동안 모과이는 늘 모과이의 음악을 해왔다. 슈게이징의 끝물이 세상을 휩쓸 때에도, 핌프록같은 선정적인 음악이 세상을 지배할 때에도, 말랑말랑한 기타팝이 인디씬을 휩쓸 때에도 모과이는 모과이의 음악을 해왔고, 모과이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을 해왔다. 이번 음반에서도 마찬가지다. [Hardcore Will Never Die, But You Will] 이후 조금씩 감지되어 온 새로운 ‘리듬’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모과이 음악이 주축으로 자리잡은 것 정도가 표면적으로 느껴지는 변화라고 할 수 있지만, 1997년 데뷔 음반의 질감을 떠올리게 하는 트랙이 발견될 정도로 이들이 유지해온 고유한 감정, 혹은 음악적 공간감은 일정한 수준 안에서 잘 간직되어지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이러한 꾸준함이 정체로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 이들의 위대함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음반은 ‘올해의 음반’ 목록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의 파괴력은 없다. 하지만 모과이의 오랜 팬들의 귀를 즐겁게 할만한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도 별다른 고민없이 지갑을 열었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었다.

Joshua Redman & Brad Mehldau: Near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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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소포니스트 조슈아 레드먼(Joshua Redman)과 피아니스트 브래드 멜다우(Brad Mehldau)의 협연은 90년대 초반 레드먼 쿼탯 투어에 멜다우가 참여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이 두 명의 음악가는 우정을 나누어오며 서로에 대한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2011년 본격적으로 하나의 팀을 이루어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들의 음악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된다. [Nearness]는 두 재즈 음악가의 유럽 투어 실황을 녹음은 라이브 음반이다. 스페인, 스위스, 독일, 노르웨이, 네덜란드에서 가진 공연에서 연주된 음악들이 실려있다.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의 고전을 새롭게 해석한 곡들도 들어있고 두 음악가가 직접 작곡한 현대적인 노래들도 들어있다. 재즈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나조차 이 두 음악가가 공연에서 성취한 경지가 매우 높은 수준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음반을 듣다 보면 레드먼과 멜다우가 연주를 통해 매우 재미있고 치열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멜다우가 리드미컬한 피아노 연주를 트랙을 열면 레드먼이 격렬한 섹소폰 연주로 회답한다던지, 레드먼이 작곡한 섹소폰 위주의 트랙에 멜다우가 자신만의 색깔로 피아노 소리를 덧칠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이들의 연주는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몇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지겹지 않고, 거기에 더해 몇번을 더 반복해서 듣고 싶게 만든다.

Valerie June: The Order of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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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들어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뮤지션을 꼽다보면 그 중 발레리 준(Valerie June)은 반드시 포함될 것 같다. 그녀는 테네시에서 태어나 19살 무렵부터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테네시를 떠나 집시 뮤지션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2013년 발매된 첫번째 정규음반 [Pushin’ Against the Stone]의 곡 대부분은 이시절 기차나 지하철, 버스 안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후 테네시로 돌아와 올해 초 발표한 두번째 정규음반 [The Order of Time]은 그녀의 음악세계가 드디어 활짝 만개했다는 평가와 함께 대중적으로도 좋은 호응을 이끌어냈다. 밥 딜런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느껴지는 그녀의 음악은 미국 포크음악을 기반으로 소울, 블루스, 가스펠 등 흑인음악을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그녀의 음악에서 내가 대단하다고 부분은 위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그녀의 목소리 안에 꾹 눌러담는 카리스마와 아우라다. 그 어떤 음악 장르도 그녀의 목소리를 거치면 그녀의 음악으로 자연스럽게 다시 태어난다. 하나의 장르로 정의내릴 수 없는 편안하고 아름다운 노래들이 오직 ‘발레리 준의 음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두번째 음반만에 대단한 성취를 해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공연으로 들으면 훨씬 더 좋다고 한다.

Mitski: Puberty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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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 음악을 한국에서, 혹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듣는 우리들은 종종 그 음악을 감싸고 있는 지역의 문화적 환경, 혹은 음악을 만든 뮤지션이 가진 개인적인 감수성(이 역시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았겠지만)을 음악 자체와 분리시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한국, 혹은 한국 문화라는 프레임 안에서 영미원 음악을 받아들일 때 발생하는 독특한 반응같은 것이 존재하는데,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과 같은 새로운 장르(?)의 발현도 이와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영미권 문화 바깥에서 성장한 뮤지션이 그 지역의 자장 안에서 영미권 음악을 만들 경우 느껴지는 고유한 감수성도 있다. 우리로 치면 검정치마가 대표적인 경우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알라바마 공장에서 ‘아제라’ 간판을 달고 나온 그랜저의 느낌이랄까. 분명 한국인이 만든 한국음악으로 들리는데 영미 대중음악의 ‘국적’ 역시 느껴지는 음악 말이다.

미츠키(Mitski)는 출산 당시 콩고에 살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자녀에게 일본 국적을 물려주기 위해 일본으로의 원정출산(?)을 감행하는 바람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 콩고로 돌아와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이후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과 함께 약 12개국에서 생활했다. 20세가 되어 뉴욕에 있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은 뒤에야 비로소 ‘정착’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1990생이니 이제 만 27살이 된 그녀는 7년째 뉴욕주 브루클린에 머물며 음악을 만들고 있다. 2016년에 발표된 데뷔 정규음반 [Puberty 2]는 하나의 ‘국적’으로 그녀를 규정할 수 없는 위와 같은 물리적 배경을 음악적으로도 잘 느낄 수 있는 음반이다. 이 음반이 나온 뒤 거의 대부분의 매체에서 호평이 이어졌고 주요 음악매체에서는 이 음반을 ‘올해의 음반’ 목록에 올려놓았다. “Your Best American Girl”은 그해 가장 많이 들려진 인디 파워발라드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미츠키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좋긴 하지만 흔하기도 한 인디 음악’ 정도로 받아들였다. 퍼지한 기타를 바탕으로 하는 곡 전개방식도, 세인트 빈센트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독특한 음색도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소리였다. 탄탄한 음반의 구성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미츠키만의 특징을 잘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미츠키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그녀의 개인적인 삶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게 되면서 미츠키의 음악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평생을 무국적자처럼, 혹은 경계인처럼 떠돌아다닌 그녀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가감없이 풀어놓는 과정에 공감하게 되었고, 그러한 26년의 삶에서 그녀가 느끼고 극복했을 감정들이 [Puberty 2]에서 아주 솔직한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음반은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확장적인 음반이기도 하다. 문학계에서 이제 꽤 인기있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정체성을 인디음악의 형식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Puberty 2]는 미츠키가 해낼 수 있는 디아스포라 인디음악의 단단한 결과물이다. 영미 음악의 경계선을 인종과 지역이라는 고전적인 틀 바깥의 영역으로 조금 더 확장시킨 셈이다. 미츠키는 그녀의 삶 자체로 ‘탈지역화’된 음악을 들려준다. 검정치마의 음악과는 또 다른 형태의 탈국적화한 영미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Puberty 2]는 뮤지션을 둘러싼 환경 안에서 태어난 음악이 역설적으로 그 환경의 견고한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는 흥미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블러드 오렌지가 필립 글래스를 만났을 때

아래 영상은 NPR에서 제공한 6분짜리 짧은 인터뷰를 담고 있다. 인터뷰어는 블러드 오렌지로 잘 알려진 데브 헤인즈, 인터뷰이는 클래식과 팝의 경계선상을 넘나드는 피아니스트 필립 글래스(Philip Glass)다. 헤인즈와 글래스 모두 장르의 구분을 무색하게 만드는 범용적인 음악을 구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터뷰 내용 중 필립 글래스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 재미있다. 아버지는 기계수리공이었는데 창고에서 라디오를 계속 고치다보니 어느새 음반을 팔기 시작했고, 음반을 팔기 시작하다 아예 작정하고 음반가게를 차리게 되었다고 한다. 글래스는 그런 아버지를 따라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그에게 음악은 그저 음악일 뿐, 클래식 음악도, 팝 음악도 존재하지 않았다. 볼티모어에서 태어나고 자란 글래스는 57년, 21살 때 줄리어드 음대에 진학하여 뉴욕으로 올라왔다. 뉴욕에서 처음 가진 직장은 가구 배달업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피아니스트로의 삶을 선택했을 때 평생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할 것이라며 걱정했다. 글래스는 그 말을 듣고 “그거 참 괜찮은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헤인즈 역시 약 21살 무렵 무작정 런던에서 뉴욕으로 건너왔다. 지하철에서 먹고 자며 노숙생활을 하던 그는 뉴욕의 “맥박”에 끌려 아직까지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이 새롭게 떠오르는 뉴욕 인디씬의 대표주자를 만나 들려주는 이 짧은 대화에서 서로에 대한 충분한 존경심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