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nolaterthannow

born as Seoulite, missing Boulder, and loving wife

마틴 스콜세지 | 아이리시맨

마틴 스콜세지(공식 한국어명은 ‘스코세이지’인 것 같은데 영 어색하다) 감독의 2019년 영화 [아이리시맨]은 세시간 30분 가까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긴 영화다. 상영시간이 ‘길다’라는 묘사가 이 영화의 핵심에 맞닿아 있기에 흥미로운 영화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넷플릭스 영화 – 휴대폰으로 딴 짓을 하면서 곁눈질로 보기도 하고 냉장고에서 먹을 것을 꺼내오는 동안 잠시 멈추어 두기도 하는 등 – 와는 다르게 그 긴 상영시간동안 오롯이 영화의 세계를 체험하며 바깥세상을 잊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신비로운 영화이기도 하다.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으며 형식적으로 단 한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영화이기도 한데, 바로 그러한 특성때문에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한계까지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를 위한 영화라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작품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야기하고 있듯, 이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가 2019년에 만들었다는 점때문에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데, [어벤저스] 시리즈를 두고 “영화(cinema)가 아니다”라고 비판한 스콜세지가 지금까지 80년 가까이 쌓아올린 ‘영화’에 대한 지식이 총망라되어 전시되어 있다. 물론 나는 그가 믿는 영화(cinema)와 [어벤저스] 시리즈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movie)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극장의 스크린에 걸리거나 넷플릭스 등의 사업자를 통해 안방 TV로 배달되는 영상매체라는 속성은 동일하지만,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에서 이익창출을 위해 탄생한 상품으로서의 영화와 비상업적인 목적 하에 음악-미술-음향-의상 등 모든 종류의 현대예술의 교배를 통해 탄생한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는 분명 그 뿌리를 달리한다. [아이리시맨]은 스콜세지와 그의 오랜 친구들이 믿어온 예술로서의 영화가 어떻게 지금까지도 굳건히 버텨낼 수 있는가를 증명함과 동시에 그가 살아온 한 시대를 아름답게 종결하는, 위대한 결과물이다. 

[아이리시맨]에 대해 할 말이 참 많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앉아 하루종일 이 영화에 대해 떠들고 싶을 정도로 영화의 모든 순간, 모든 컷, 모든 씬, 배우의 표정 하나까지 보물같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스콜세지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그의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성에 대한 관대함, 여성 캐릭터의 의도적인 배제, 혹은 도구로서 존재하는 여성 캐릭터,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장면구성과 클로즈업의 빈번한 사용 등이 나의 구매욕구를 떨어뜨려왔다) 마피아영화나 갱스터영화는 한국의 조폭영화와 함께 가장 진부한 장르로 생각하는 편식적인 영화취향 탓에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한시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하다. 두 시간 반 가까운 시간동안 인물을 차근차근 소개하고 인물 간 관계를 충실히 설명하며 ‘빌드업’해온 영화가 갑자기 영화적 리듬, 혹은 호흡을 확 떨어뜨리며 프랭크(로버트 드 니로 분)의 눈동자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으며, 그 심상치 않은 일이란 역사적으로 이미 발생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로 사건이다. 흥겨운 스윙재즈풍의 노래들과 마피아들의 떠들썩한 수다로 가득 채워졌던 영화가 디트로이트 교외의 한적한 모텔을 배경으로 등장인물에게 무거운 침묵을 툭 던져주었을 때부터 우리는 이 영화적 세계가 완성단계에 다다랐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영화가 마무리되는 과정은 ‘이것이 대가의 솜씨구나’라는 탄성이 나오기에 충분할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이 한 시간은 비단 이 영화 안에서 창조된 세계가 마무리되는 한 시간이 아니라, 프랭크가 회고하는 프랭크와 러셀, 지미 등 주요인물이 경험해온 몇십년의 세월이 마무리되는 시간이기도 하며, 그들이 겪어온 세월이란 감독 스콜세지가 경험한 지난 몇십년 간의 영화의 역사를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철학적 주제를 시간으로 추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먼저 70세를 훌쩍 넘긴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등이 컴퓨터의 힘을 빌어 40대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흥미롭다고 하기엔 애처로운 감정부터 불러 일으킨다. 얼굴은 디에이징(de-aging)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배우들의 육체는 여전히 노년 그대로이기에 액션씬에서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데,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는 자신의 [필름클럽] 팟캐스트에서 이조차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영화의 대주제로 설정한다면 충분히 이해가능한 부분일 뿐 아니라 이 대배우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관객으로 하여금 독특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좋은 수단이라며 옹호하였다. 나는 그의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스콜세지가 드 니로, 파치노, 페시 등과 함께 실화를 배경으로 한 마피아영화를 만든다’는 문구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이 문구에 세시간 30분의 상영시간과 넷플릭스라는 배급사 정보까지 더해지면 영화를 보기 전부터 지루함과 진부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스콜세지가 만든 이 영화가 위대한 이유는 이와 같은 영화 외적인 피상성을 오로지 영화 내부의 완성도만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동일한 배우가 몇십년에 걸쳐 한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냄으로써 이 영화가 단지 지미 호파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실존인물에 관한 흥미로운 서사시에 그치지 않고 영화 그 자체의 역사, 혹은 필름메이킹이라는 작업과정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아우르는 거대한 담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대주제를 ‘시간’으로 본다면 프랭크의 딸 페기(안나 파퀸 분)의 존재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페기는 폭력을 도구 삼아 생계를 이어나가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와의 관계를 서서히 끊어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속한 폭력의 세계를 그저 바라만 볼 뿐 그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중에는 대화마저 단절하며 프랭크의 세계에서 완전히 떠나버린다. 페기 캐릭터가 갖는 이와 같은 속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게 한다. 예컨대 신이나 천사같은 존재 말이다. 이들은 인간이 갖는 유한성, 즉 시간으로 상징되는 한계에서 자유로운 존재다. 프랭크와 러셀(조 페시 분), 지미(알 파치노 분)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분투하는 동안(영화의 메인 시제, 즉 프랭크와 러셀 부부의 자동차 여행기간 동안 러셀과 프랭크는 많은 곳에 들려 수금을 한다. 지미 역시 출소 후 노조 위원장 자리를 되찾기 위해 생명에 대한 위협까지 무시하며 이곳 저곳을 들쑤신다. 노인이 된 ‘현재’까지도 이들은 몇 푼의 돈과 알량한 자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페기는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이들이 흘려보내는 시간을 가만히 주워담는다. 어쩌면 스콜세지 감독이 도달한 영화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지는 바로 신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흥미로운 상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고 해서 이 영화에 단점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폭력에 대한 지나친 관대함은 이 영화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주인공 프랭크는 시대의 관찰자 역할을 부여받지만, 그가 살아온 시대가 아무리 폭력과 비양심의 시대라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승승장구해온 그에게 영화 막바지 – 아주, 너무나 인간적인 – 회한의 감정을 극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미묘한 불편함을 발생시킨다. 현실을 뒤튼 블랙코메디라고 하기에는 그의 감정적 동요가 영화 안에서 상징하는 바가 너무 크다.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여성 캐릭터는 부분적이고 주변적이며 한계적으로 그려진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부분이다. 페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여성도 다층적인 차원에서 그려지지 않는데, 이건 스콜세지가 세 주인공에게 거의 모든 영화적 에너지를 쏟아붓기 위해 선택한 의도적 무시라고 백번 이해한다 해도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영화 내에서 완벽하게 여성적인 색깔이 지워져 있다. 물론 이런 단점은 영화 전체적인 맥락에서 충분히 용서될 수 있을 정도로 단편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이 영화에 별 다섯개를 줄 수 없다거나 ‘올해의 영화’로 선택하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면 아마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리시맨]은 여전히 매우 좋은 영화다. 이건 확실한 사실이다. 

브라이언 그린 | 우주의 구조

나는 ‘문돌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꽤 다양한 상황에 “문송합니다”를 속으로 외쳐야 한다. 공학자들이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나사(NASA)가 지구 밖으로 위성을 쏘아올리며 인류의 진화에 기여하고 있을 때 하릴 없이 물가상승률의 근원 따위를 고민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음에 죄책감을 느낄 때가 많다. 나처럼 뼛속까지 문과생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에게 과학, 그 중에서도 ‘N차원’의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수학과 물리학이 선사하는 장벽의 높이는 어마어마하다. 당장 내일 뭐 먹을지 고민해야 하는 미생인 우리에게 우주의 탄생이니, 힉스장이니 하는 소리는 얼마나 멀게 느껴지는가.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하루 하루의 일상이 블랙홀의 엄청난 중력장이나 1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초끈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물리학의 어려운 이론들은 더이상 나를 좌절시키는 장벽이 아니라 반드시 이해하고 싶어지는 무궁무진한 진리의 바다가 된다.

[엘리건트 유니버스]를 쓴 초끈이론의 대가 브라이언 그린의 2005년 저작 [우주의 구조]는 나와 같은 ‘물포자’ 혹은 ‘수포자’들도 쉽게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게 쓰인 우주물리학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책은 우주의 구조를 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을 시간순으로 따라간다. 뉴튼, 아인슈타인, 양자역학, 초끈이론까지, 우주물리학의 혁명적인 진화를 발생시킨 이론들에 대해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하는데, 특히 3차원 이상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같은 일반인들을 위해 현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를 그림과 함께 제시함으로써 대략적인 감 정도는 잡을 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저자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뉴튼의 고전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특수/일반 상대성 원리는 나도 어디서 조금이라도 들어본 것이 있으니 그나마 따라갈 수 있겠다 생각했지만 왠걸, 내가 알던 그 이론들이 아니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과학자들이 그 바닥(?)에서 발전을 이루어내기 위한 중요한 주춧돌이었다는 사실을 접할 때에는 나의 영웅인 거시/금융경제학계의 거장 마이클 우드포드나 조르디 갈리도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겠구나 싶어 가뜩이나 커져만 가는 겸손함이 한번 더 극적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뉴턴-아인슈타인-양자역학을 지나 초끈이론에 다다를 때 쯤이면 각 이론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극적으로 달라져 과연 어느 이론에 내 우매한 머리를 기대어야 하는지 혼라스러울 지경이 되었다.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워낙 달리는터라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수많은 페이지에 종이 플래그(flag)를 붙여 가며 한문장 한문장 따라가다 가로막혀 앞의 페이지를 다시 복습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아주 희미하게나마 우주물리학의 큰 흐름이 보이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좋은 교양서이고,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Sleater-Kinney | The Center Won’t Hold

슬리터-키니(Sleater-Kinney)의 2019년 음반 [The Center Won’t Hold]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세인트 빈센트(St.Vincent)가 프로듀스했다. 1995년부터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물론 중간에 10년 정도의 공백기가 있었지만) 전설적인 밴드 슬리터-키니와 2010년대 인디씬에서 가장 핫한 뮤지션 세인트 빈센트의 협업이라 하면 일단 가슴이 뛰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 결과물은 너무나 일방적인 세인트 빈센트의 음악이라 실망스러운 마음부터 드는 것이 사실이다. 노이지한 기타 사운드를 중심으로 그런지 음악의 한복판에 섰던 슬리터-키니의 음악을 만질 수 있다는 생각에 현시대에서 가장 독창적인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는 세인트 빈센트의 가슴도 많이 뛰었겠지만, 의욕이 앞선 나머지 대선배가 쌓아올린 과거의 유산을 말끔히 지워버리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물론 개별적인 노래들은 무척 매력적이다. 최근 세인트 빈센트의 음악세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레이저칼같은 기타사운드와 댄서블한 리듬, 귀를 찢는 듯한 보컬 등이 그대로 [The Center Won’t Hold]에 담겨 있다. “Bad Dance”같은 트랙은 2019년 최고의 싱글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섹시하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슬리터-키니의 2019년 음반으로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라고 누군가 질문한다면 “거의 아무것도”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프로듀서의 영향으로 인해 단기적으로 섹시한 음반을 뽑아낸다 하더라도 그 효과는 오래 갈 수 없다는 교훈은 마이 케미컬 로맨스(My Chemical Romance)의 사례에서 이미 명백히 증면된 바다. 물론 [Black Parade] 이후 거의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사라져간 젊은 밴드와 25년 이상 음악을 해온 관록의 밴드를 액면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슬리터-키니가 세인트 빈센트에 잠식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이 음반은 참 좋다. 잘 만든 음반이다. 다만 세인트 빈센트의 B-Side 작업물처럼 느껴질 뿐이지만.

Angel Olsen | All Mirrors

엔젤 올슨(Angel Olsen)의 커리어는 막힘이 없다. [Burn Your Fire for No Witness]와 [My Women]으로 인디록 장르에서 이룰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성취한 그녀가 2019년에 발매한 [All Mirrors]에서 가고자 하는 길은 그 방향성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존재한다. 조금 더 웅장하게, 조금 더 화려하게, 조금 더 다층적인 차원으로. 전작에서 약간의 신서사이저 음향을 도입하기 시작한 올슨은 이번 음반에서 신스 음악과 오케스트레이션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덕분에 [My Women]까지 간직하고 있던 초창기 로-파이한 정체성은 이번 음반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My Women]이 거친 입자의 필름 카메라로 찍은 헨드 헬드 인디영화에 가까웠다면, [All Mirrors]는 디지털 카메라로 깔끔하게 촬영한 촬영한 시대극 – 많은 엑스트라와 화려한 의상이 함께 하는 – 느낌이 든다.

음반 전체적으로 엔젤 올슨이 가진 아티스트로서의 야심이 강하게 느껴진다. 몇몇 노래는 그 욕망을 충실히 실현시켜주는 좋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상당히 느린 속도의 점층적 구조로 쌓아올린 “Lark”와 오케스트레이션을 주된 도구로 활용한 “Tonight”은 올슨 음악의 외형이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개인적으로는 전작의 “Shut Up Kiss Me”같은 노래에서 보여준 올슨만의 재기발랄하고 담대한 트랙이 발견되지 않아 아쉬움이 느껴진다. 후기를 보면 원래 하나의 노래를 상이한 버전으로 두 번 녹음하여 더블 앨범으로 발매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녹음을 진행하면서 현재의 버전만을 싣기로 결정했다고 하는데, 다른 방식으로 편곡을 거친 노래들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살짝 궁금해진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올해의 음반으로 거론하고 싶어하겠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경로 안에서 안전한 방식을 택하여 화학적인 진화만을 이루어냈다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듯 하다.

FKA twigs | Magdalene

남들과 다른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예술가가 어린 시절의 변곡점을 무사히 통과하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비로소 완성시켰을 때, 우리는 그가 “브레이크 아웃”하는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한 때 트윅스로 불리운 여자(FKA twigs), 혹은 탈리아 바넷(Tahliah Barnett)은 지금 그러한 순간을 우리에게 드러내보이고 있다. [Magdalene]은 그녀의 음악세계가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게 될 첫번째 음반이자 아마도 2019년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중요한 음반으로 기억될 확률이 높다. 개인적으로 [LP1]이 더 훌륭한 음반이라고 생각하지만, [Magdalene]은 트윅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비로소 대중의 기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분명 유의미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트윅스가 음반 단위로 평가되거나 소비되는 방식이 그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는데, 그 이유는 뛰어난 음악가임과 동시에 뛰어난 안무가, 뛰어난 스토리텔러, 혹은 독보적인 페미니스트이기도 한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반을 그냥 플레이시키는 차원을 넘어서 보다 다층적인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트윅스가 구현하는 섹슈얼리티는 음향으로, 멜로디로, 그녀의 춤으로, 의상으로, 가사로, 혹은 특유의 분위기 그 자체로 청자에게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마조히즘과 페미니즘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트윅스라는 몸뚱아리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는 과정이 신비롭게도 자연스럽게 이해되는데, 이건 단순히 헤드폰을 끼고 음반을 반복해서 듣는다고 해서 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존하는 대중적인 설득력을 가진 음악가 중 가장 진보적이며, 또한 가장 도전적이다.

Vagabon | Vagabon

올뮤직(allmusic.com)에서 배가본(Vagabon)의 디스코그래피를 검색하면 2019년 발매된 음반을 두 건 발견할 수 있다. 똑같은 음반 커버와 똑같은 수록곡을 가진 이 두 음반은 사실 한 음반이다. 배가본의 두번째 음반은 원래 [All the Women in Me]라는 이름을 달고 발매될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곧 [Vagabon]으로 이름을 바꾸어 10월 18일 정식발매되었다. 위의 공식 음반 사진에도 ‘All the Women in Me’ 글귀가 찍혀 있는걸 보면 정말 급하게 음반명을 바꾼 것처럼 보인다. 카메룬 이민자 가정 출신 뮤지션 레티시아 탐코(Laetitia Tamko)는 이번 음반에서 ‘세상의 모든 여성’과 베가본(방랑자, 떠돌이 등의 의미를 갖는 ‘vagabond’의 의도된 오타로 보여지는)이라는 무대이름을 갖는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작은 해프닝으로부터도 많은 추측을 하고 싶게끔 만드는 이 음반은, 우선, 음악이 무척 좋기 때문에 계속 듣게 되는 매력이 있다.

전작 [Infinite Worlds]는 단 8곡이 22분의 짧은 시간 안에 수록된, 배가본이라는 뮤지션을 세상에 소개하는 간략한 안내서였다. 아마도 배가본 본인에게는 음악을 통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다는 의미 역시 컸을, 그래서 인디록과 포크를 기반으로 한 로파이하고 성긴 감성의 노래들이 다수를 차지할 수 밖에 없었던 음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던지는 간결하고 묵직한 메시지와 옹골찬 에너지는 인상적이었다. 후속작 [Vagabon]은 일단 더 길고(38분), 형식적으로 훨씬 세련되어졌다. 전작을 발매하고 떠난 투어 여행 중 호텔에서 랩탑을 이용하여 만든 곡들이 주로 실려있다는 정보를 알고 나면 그래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대부분의 노래들은 조용한 방에서 헤드폰으로 들으면 좋을 정도의 적당한 포근함과 조용하고 내성적인 보컬, 전자음악의 힘을 상대적으로 많이 빌린 부드러운 편곡 등을 주된 인자로 하고 있다. 가사도 조금 더 자기성찰적이고 사색적이며 은유적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되는 가운데 그 한가운데에 여성으로서의 깊은 자각이 자리잡고 있다. 배가본이 음악적으로나 내면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루어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음악 스타일이 많이 바뀌어서 놀란 팬들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이 변화를 ‘성장’의 관점에서 읽어내고 싶다. 다음 음반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킬링 트랙도 꽤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다. 캐치한 싱글컷으로도 손색이 없을 “Water Me Down”은 물론이고 음반을 여는 첫 곡 “Full Moon in Gemini” 등에서 전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어떤 낭만, 혹은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Full Moon in Gemini”는 음반의 마지막에서 뮤지션 모나코(Monako)에 의해 수미쌍응처럼 되풀이되는데, 조금 다른 분위기로 음반을 마무리짓는 과정이 흥미롭다. 개인적인 베스트 트랙은 “Flood”인데, 우선 이정도로 담대한 사운드스케이프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놀랐고(또 대견했고), 이 짧은 곡 안에서도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며 지루한 틈을 1초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미있었다.

제니퍼 리, 크리스 벅 | 겨울왕국 2

다양성. 최근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일종의 생존전략이다. [모아나]와 [코코]에서는 지금까지 만화속 주인공 역할에서 꾸준하게 소외되어 왔던 유색인종과 비백인 문화권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토피아]와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이 영화철학의 근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주제의식이 된다. [겨울왕국]은 남자’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꽤 인상적이었는데, 안나와 엘사라는 젊은 자매가 전면에 나서는 가운데 남자 캐릭터들은 찌질한 악당이나 충실한 사이드킥으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즈니 에니메이션이 대단히 진보적인 사상을 충실하게 실현하는 그런 존재는 아니라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여전히 전 세계의 모든 여자 아이들은 엘사의 여성스러운 흰색 드레스에 열광한다. (물론 [겨울왕국 2]에서는 엘사가 바지를 입는다는 점에서 약간의 발전을 내비치지만, 디즈니의 ‘진보’는 딱 이정도 수준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기도 한다) [코코]와 [인사이드 아웃]이 그토록 찬란하게 펼쳐 놓았던 서사구조의 마지막 지점에는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로의 공손하게 회귀본능이 존재한다. 최근 가장 성공적인 프랜차이즈였던 [토이스토리]는 4편에 이르러 결국 새로운 세상으로의 확장을 이루어내지만, 이 역시 ‘정상’적인 남성 장난감과 여성 장난감 간의 이성적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아주 혁신적인 엔딩은 아니었다.

디즈니는 항상 이 정도의 애매한 성장을 이루어내면서 생존해왔다. 그 성장의 정도가 사회철학, 혹은 사회적 가치의 성장속도보다 느릴 때에는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 문제는 그 반대의 경우에도 그리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겨울왕국]처럼 이미 공고하게 형성된 새로운 페러다임 – 여성 중심의 서사 – 에 엘사의 목소리와 같은 킬러 컨텐츠를 살짝 끼얹는 방식의 ‘수요 맞춤 전략’이 통할 때에만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셈이다. [겨울왕국 2]는 약간 뒤따라 가는 느낌이다. 여전히 엘사는 압도적이고 안나는 진취적이며, 남자 캐릭터는 수동적이다. 개그를 담당하는 캐릭터들은 마치 그렇게 태어나기라도 한 것 마냥 웃기는 데에만 집중한다. 결말은 누구나 알고 있듯 해피엔딩이지만,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는 더이상 아닐 것이라는, 누군가는 희생을 할 것이라는 사실도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이런 구도는 이제 식상하다. 새로운 것이 없다. 이 사회는 이미 현실에서 그러한 가치들을 충분히 실현하고 있다. 에니메이션은 상상력이 극대화된, 현재의 사회가 가고 싶어하는 아주 가까운 미래의 세상일 것이고, 그 상상력이 이미 현실이 되어 영화 속에서 구현될 때 우리는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겨울왕국 2]의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하품 포인트’는 이 영화에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엘사가 다시 한번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드레스를 꺼내 입기 위해서는, 디즈니가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판이 필요한데, 현재의 디즈니에게는 그걸 세상에 역으로 먼저 제시할 정도의 역량은 없어보인다. [겨울왕국 3]는 이 사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꽤 많이 움직였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Nick Cave and the Bad Seeds | Ghosteen

닉 케이브는 항상 좋은 음악을 낸다. 지난 40여년 간 항상 그래왔다. 닉 케이브를 전혀 듣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닉 케이브의 음악을 듣기 시작하다 중도에 관두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내가 그런 경우다. 닉 케이브의 이름을 기억한지는 꽤 오래 되었지만, 최초로 구입한 음반은 2001년작 [No More Shall We Part]였다. [Murder Ballads], [Let Love In], [The Good Sun]같은 초-중기 걸작을 그냥 지나친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거의 모든 음반을 구입해 듣고 있다. 그리고 단 한번도 실망하지 않았다. 2019년에 발매된 17번째 음반 [Ghosteen] 역시 마찬가지다. 우선 이 음반이 올해의 음반 목록에 들어갈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부터 미리 기록해두고 시작해야겠다. 이 음반은 그냥 ‘죽이게’ 좋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아야 할 부분들이 참 많다.

3년 전 발매된 [Skeleton Tree]는 닉 케이브의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과 맞물려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물론 이 음반에 수록된 거의 모든 곡들이 아들의 죽음 이전에 쓰여졌고, 오직 몇몇 부분만이 음반의 마지막 녹음 일정 당시 닉 케이브에 의해 즉흥적으로 수정되었을 뿐이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 음반과 ‘죽음’을 직접적으로 연결짓고 싶어한다. 2017년 투어가 끝난 후 닉 케이브는 곡을 전혀 쓰지 않았는데, – 우리가 보통 닉 케이브의 천재성만을 기억하느라 잊고 있던 – ‘The Bad Seeds’의 한 축을 담당한 키보디스트 콘웨이 새비지(Conway Savage)가 뇌종양 선고를 받게 된다. 그는 1990년부터 닉 케이브와 함께 한 오래된 동료였는데(아마 동료 이상의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암 선고를 받고 1년 뒤 숨을 거두었다. 이후 다시 시작된 닉 케이브의 작업의 결과물로 탄생된 [Ghosteen]은 (당연히) 콘웨이 새비지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니까 죽음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 닉 케이브의 최근 작업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Skeleton Tree]보다는 [Ghosteen]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 음반은 밴드 역사에서 약 15년만에 처음으로 더블 음반으로 기획되었다. 첫번째 음반에는 총 여덟곡이 실려 있는데 닉 케이브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자식들(the Children)”의 노래이고, 음반의 두번째 장에 실린 세 곡은 “부모들(the Parents)”의 노래에 해당한다고 한다. 음반에 실린 노래들은 전작들과 달리 무척 정적이다. 앰비언트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운데 신디사이저와 키보드가 음악을 주도하고 드럼과 베이스는 보조를 맞추는 정도에 그친다. 바리톤에 가까웠던 닉 케이브는 팔세토 창법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낭독(spoken words)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극적인 부분을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물론 미치도록 아름다운 순간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닉 케이브의 음악의 핵심으로 남아있다. “Bright Horses”를 듣고 가슴이 울리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40년 가깝게 활동을 지속해온 뮤지션이 “Galleon Ship”같은 젊디 젊은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Night Raid”가 선사하는 따뜻함은 전과 달라진 닉 케이브 음악만이 주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가사 역시 음악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방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각 노래마다 명확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것이 특징이었던 닉 케이브의 작사법은 2015년(그러니까 아들이 죽던 해)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고 하는데, “하나의 직선 위에 마치 이야기의 흐름처럼 흘러가는 것이 삶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오스에 가깝다”는 닉 케이브의 말처럼 가사는 분절적이고 조금 더 은유적이며 표현은 대담해졌다.

아마도, 아직까지도, ‘닉 케이브는 너무 올드하고, 나랑은 잘 맞지 않아. 선뜻 내키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한번 빠지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음악이 닉 케이브이고, 나는 지금 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엉뚱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봤다. 닉 케이브가 일본에 태어났다면? 아마 류이치 사카모토가 되어 있을 것이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호주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닉 케이브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둘이 공통분모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다른 장르의 음악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둘이 공유하는 음악적, 미적 요소가 꽤 많다고 생각한다. 하나만 예로 들면 신디사이저에 대한 깊은 이해? 쓸데 없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만큼 이 음반에 대해 계속 떠들고 싶다. [Ghosteen]은 너무 좋은 음반이다.

린 램지 | 너는 여기에 없었다

린 램지 감독의 전작 [케빈에 대하여]는 보지 않았다.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이 영화를 볼 기회가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략적인 시놉시스를 읽은 후 그 영화를 봐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보지 않았다. 영화를 감상한 후 어떤 감정이 들어설지,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느끼게 될 그 감정이, 해야 할 그 이야기가 싫었다. [킬링 디어]를 보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때문이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색깔의 영화들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도 원래 나의 영화취향에 따르면 챙겨 볼 확률이 극히 낮은 쪽에 속하지만, 출근길에 들었던 [김혜리의 필름클럽] 팟캐스트에서 김혜리 기자가 그녀가 평소에 구사하지 않는 상당히 예외적인 표현을 동원해가며 찬사를 보냈기에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특히 그가 [드라이브]를 두어번 반복해서 언급했을 때(비록 그것이 조니 그린우드의 영화음악에 대한 묘사였다 하더라도) 마침내 이 영화를 집에 가자마자 꼭 챙겨봐야겠다 마음먹게 되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감독/각본을 담당한 린 램지와 화면을 꽉 채운 주연배우 와킨 피닉스와 영화의 청각적 요소를 담당한 조니 그린우드, 이 삼총사가 빚어내는 호흡이 특유의 흥미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는 영화다. 영화의 서사구조는 단순하며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직관적이다. 전직 군인으로 추측되는 ‘조’는 해결사로 일하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다. 거의 매일 자살을 시도하는데, 어머니가 살아있는 한 정말 자살할 생각은 없어보인다. 그가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어린 시절 겪었던 학대와 군인 시절 경험한 살인, 혹은 죽음에 대한 경험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조’의 회상으로 그려지는 이와 같은 과거 장면들은 찰나의 시간동안 단편적으로 스쳐지나갈 뿐이다. 과거 회상씬 뿐 아니라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이 ‘조’, 혹은 그를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으로 처리되는데, 그러니까 영화는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진행이 되거나, 그런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서사구조가 헐겁다고 느끼는 관객이 있을 수 있으며 영화의 단순한 서사구조만을 따라가다 금세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친절하게 선후관계를 설명해주기보다 한 상황을 넌지시 제시하고 관객에게 많은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데, 그 설계가 꽤나 촘촘하게 이루어져 있어 영화 속 상징을 오독하거나 숨어있는 서사를 놓치는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빈틈이 많기 보다는 비어있는 공간을 관객이 적극적으로 채워나가게 하는 매력이 있는 영화인 셈이다. 음악으로 치면 The XX의 1집 음반같달까. 이 묘한 ‘비어있는 꽉참’은 독의 연출과 피닉스의 연기, 그리고 그린우드의 음악/음향이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영화의 제목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그 자리에 없는 것으로 추정되어야 하는 해결사 직업을 가진 ‘조’의 삶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조금 더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 ‘조’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 가졌던 관계성을 전이시키게 되는 ‘나나’와 함께 떠나게 되는 새로운 여정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가 맞이하는 터닝포인트는 ‘조’가 현역 주지사의 심복인 상원의원으로부터 그의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뒤 어린 소녀들을 감금하고 유린하는 사창굴로 찾아 들어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안에 ‘나나’가 있다. ‘나나’의 발견은 ‘조’의 유일한 삶의 이유였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귀결되고, ‘조’는 자신과 같은 괴물로 변해버린 ‘나나’와 함께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상원의원과 주지사가 사망한 이 꽤 큰 사건의 한복판에 서 있는 ‘조’와 ‘나나’가, 현역 경찰관까지 매수되어 아무한테나 함부로 총질을 해대는 이 세상에서 전과 같이 온전히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디로 갈지 알 수도 없으며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조차 없다.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 ‘나나’는 “날씨가 참 좋다”고 웃으며 말하고, 아마도 ‘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좋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 정도일 것이다. 즉, 그들은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죽음으로 가고 싶어했던 한 사내가 자신이 모든 것을 걸고 지키려 했던 어떤 존재를 상실한 후, 사실상의 죽음을 얻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그리 틀린 설명은 아닐 것이다.

연출은 감각적이다. 피닉스의 연기는 여전히 훌륭하다. [마스터]와 [그녀], [조커]를 지나 [너는 여기에 없었다]까지 다다르니 살짝 피로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 얼굴보다 황정민 얼굴을 더 많이 볼 때의 피로감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그가 다작을 한다고 사실때문에 그의 연기력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조니 그린우드의 영화음악은 [데어 윌 비 블러드]에 비하면 훨씬 정교하고 노련해졌다. 그래서 그 당시의 참신한 맛은 많이 사라졌지만, 이제는 정말 당당히 당대 최고의 영화음악가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린 램지의 영화는 처음 접했는데, 호불호가 갈릴 법한 방법론을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저력이 느껴져 오히려 더 좋았다.

김애란 |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소설가의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에는 좋은 문장들이 넘실거린다. 당대 최고의 작가와 자신의 문장사전을 비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겠지만, 책을 읽다 보면 똑같은 순간을 포착하고 느꼈음에도 난 왜 저리 아름답게 표현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우매한 내 머리를 자주 흘겨보게 된다. 김애란의 글은 참 좋다. 300쪽 가까운 책을 읽으며 단 한번도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순간을 마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그와 내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이 조금 다른 사람도 고깝게 생각하지 않고 그의 글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김애란의 글이 가진 또다른 힘 덕분일 것이다. 진심. 그의 글에서는 항상 진심이 느껴져서 좋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에서 [두근두근 내인생]의 모체를 목격하는 신비로움을 느끼게 되고, 동료 작가를 묘사하는 글에서는 타인에 대한 진득한 애정이 묻어나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느낌이라 그 묘사의 대상을 전혀 모르는 나까지도 덩달아 애정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만 같다.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는 글, 용산참사 유가족을 바라보는 글에서는 역설적으로 그와 같은 인간이 이 시대를 함께 살아주고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차가운 반지하방같은 현실을 드러내는 문장 속에서도 꿋꿋하게 스며든 유머나 긍정의 힘 뿐 아니라, 모든 문장에 대해 오롯이 책임을 지려 하는 그의 꼿꼿한 시선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이 한국사회를 함께 살아주어서 참 고맙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의 뒤에 서서 독자와 약간의 거리를 둘 수 있었다면 수필은 독자와 직접 마주 대하는 느낌이라고 밝혔는데, 독자인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