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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 as Seoulite, missing Boulder, and loving wife

신임교수 연수 첫날

1박 2일 일정으로 신임교수 연수를 받기 위해 대전에 내려와 있다. 아내와 떨어져 혼자 잠자리에 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편하고 울적한 일인데, 연수 첫날 일정이 일곱시가 채 되기 전 끝나버리는 바람에 대전에서 굳이 1박을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더 우울해졌다. 오늘밤을 보낼 곳은 유성온천에 자리잡은 관광호텔이어서 그런지 욕실이 무척 크다. 목욕에 모든 것을 양보한 듯한 객실 구조가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쇠락한 온천 관광지여서 과거의 영광을 초라하게 간직한 유흥가와 온천에 더이상 관심없는 젊은이들을 위한 카페거리가 어지럽게 뒤섞인 호텔 주변을 내일 아침 시간이 닿는대로 둘러볼 생각이다.

나와 함께 이번 학기에 새로 임용되신 분은 모두 열두명 정도인데, 공대쪽 분들은 나보다 훨씬 더 너디한 것 같아 역시 아직 나는 갈 길이 멀구나 싶었고, 의대쪽에서 오신 분들은 일반적인 교수와는 많은 면에서 차이를 보여 흥미로웠다. 대부분 나처럼 사회성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똘망똘망해진 눈망울을 내비치며 거침없이 의견을 쏟아내는 모습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조금 더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직장을 옮긴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컸다. 바쁜 연수 와중에도 쉬는 시간마다 어디론가 열심히 전화를 돌리며 네트워킹에 열중하는 남다른 부류도 물론 있었다.

오늘 아마도 이 학교에 있는 보직자 중 높은 분들은 거의 다 본 것 같다. 보직자들의 모습만 보면 이 곳도 한국에 있는 회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며 돈을 벌고 연구 업적을 쌓아 자리를 보전받는 것까지는 기본, 여느 회사와 마찬가지로 위계가 높은 사람에게 신임을 얻고 아래로부터는 덕망을 쌓아 더 높은 곳으로 차근차근 올라가고자 하는 사회생활하는 사람이 갖는 기본적인 욕망과, 그래서 우리가 ‘정치’라고 부르는 오묘한 관계의 기술을 갈고닦고자 하는 근면한 삶의 자세를 학교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의 멘토 교수님은 연구업적도 훌륭하시고 보직도 너끈하게 소화하시는 멀티플레이어 유형이신 것 같다. 그 분의 연구실을 물려받아 사용하게 될 것 같은데, 나는 과연 어느쪽으로 가닥을 잡아 나가게 될지 궁금하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당시 내가 회사생활에 이렇게 잘 적응(?)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막상 학교로 돌아온다고 해서 반드시 연구에 몰두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지금은 연구비를 어떻게 타낼지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다.

총장님의 인사말씀을 듣다가 문득 [보이후드] 생각이 났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각고의 노력 끝에 교수로 일하게 되는데, 집을 수리하러 온 막노동꾼에게 “너는 재능이 있으니 공부를 해보라”고 조언한다. 몇년 뒤, 고급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일하게 된 그 막노동꾼을 다시 만나게 되고, 매니저가 된 그는 “당신이 내 인생을 바꾸었어요”라고 말하며 그날 식사비를 대신 내겠다고 말한다. 그 장면이 왠지 나에게 하나의 중요한 레슨을 주는 것만 같았다. 이제 인생에서 별다른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반평생을 교수로 살아가게 될텐데, 죽기 전까지 [보이후드]에서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만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기회를 딱 한번이라도 얻고 싶다. 교수가 되기 전까지는 인정을 받고 명성을 쌓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런데 막상 교수가 되어 어떻게 커리어를 꾸려갈지 고민하기 시작하자 단 한명이라도 좋으니 누군가의 인생을 더 나은 길로 이끌고 싶다는 욕심이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것을 느낀다. 이런걸 보면 아직 나 자신에 대한 연구도 너무 부족해보인다.

건이로부터 배우는 것들

지난 주말에는 조카 건이를 만나러 갔다. 그가 사는 집에는 하나뿐인 누나도 있고 늘 인자한 자형도 있고 건이의 사랑스러운 여동생 은호도 있지만, 나는 그 집에 갈 때마다 “건이를 보러 간다”라고 이야기한다. 실제 마음가짐도 그러하다. 35년을 형제로 살아온 누나에 대한 애틋함이 조카 건이를 생각할 때의 뭉클함보다 크지 않다고 느낄 때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만큼 나는 건이를 조금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나의 가장 큰 스승 중 한명이기 때문이다. 건이는 그의 삶 자체로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처음에는 그의 여리고 부드러운 마음씨가 세상을 받아들이기에 지나치게 연약하다고 생각해 걱정을 많이 했다. 우는 모습을 참 많이 본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섬세한 마음이 가진 아름다운 색깔이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했다.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여동생에게 하루종일 시달리면서도 우애라는 것을 천천히 배워나가고 있다. 장난감 하나를 동생에게 빼앗기면 다른 하나를 더 내어준다. 거절당하고 무시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동네 놀이터에서 처음 만난 형아들의 뒷꽁무니를 줄기차게 쫓아다니는 용기도 가지게 되었다. 동년배의 친구에게 예쁘다고, 아름답다고 칭찬할 줄 아는 여유로운 마음, 지구본에 비친 별자리 하나하나에게 애칭을 지어주고 그것을 까먹지 않고 기억하려는 열린 마음은 최근에야 발견한 그의 놀라운 부분이다.

그저 평범해보이는 위와 같은 행동들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감동과 충격을 받는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어른들은, 아니 최소한 나는, 건이처럼 마음먹고 건이처럼 행동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를 빼앗겼을 때 다른 하나마저 내어줄 수 있는가, 용기를 내어 마음을 건넨 상대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했을 때, 전과 같이 순수하게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는가, 질투와 시기심을 완전히 거둔채 상대방의 아름다운 면을 발견하고 칭찬할 수 있는가, 아주 미미한 존재에게도 애정을 나누어 주고 개별적인 존재로서 존중해줄 수 있는가. 나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가. 혹은 그렇게 살아 왔는가. 부끄럽지만 자신있게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건이보다 훨씬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건이가 존경스럽고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그가 세상을 껴안는 방법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쩌면 오래전에 나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시간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을 수도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건이를 통해 다시 발견한다. 2년 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건이의 입학식에 꼭 참석하고 싶다. 세상을 향해 본격적으로 달려나가는 시작점에서 그의 앞날을 축복해주고 싶다. 작년 세상을 떠난 하나뿐인 삼촌은 나의 국민학교 입학식에 와주었고, 나는 둘이 함께 나온 입학식 사진을 아직 가지고 있다. 당시 삼촌이 어떤 생각으로 대구에서 서울까지 먼 길을 달려와주었는지 이제 더이상 알 길이 없지만, 나의 조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점점 다가오자 나 역시 나의 삼촌처럼 간절한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건이의 인생에서 중요한 한 순간을 직접 지켜보고 싶은 마음, 그래서 조카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싶은 그런 마음. 건이덕분에 더이상 만날 수 없는 삼촌의 마음 속을 아주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The Edge of Daybreak|Eyes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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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즐겨보았다. 회차마다 챙겨보았던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열심히 시청했다. 이 드라마가 시작하기 얼마전 한 인터넷 사이트에 연재된 만화를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고, 이때부터 교도소 생활에 대한 관심이 조금 더 구체화되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여러 매체의 평을 종합해보면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실제 교도소 생활에 대한 고증이 꽤 잘된 편이라고 한다. 눈으로 보여지는 구체적인 생활상을 재현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위의 만화와 드라마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을 꽤 섬세하게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교도소에 들어간, 소위 죄를 지은 사람들의 내면은 그렇지 않은 ‘일반인’이 쉽게 깔아뭉개고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조금 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말해보자면, 감옥에 사는 사람들의 ‘영혼’은 맑고 건강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

흔히 현대 대중음악의 뿌리 중 하나로 블루스를 꼽는다. 이 블루스의 형식을 만든 ‘시조’ 중 상당수가 감옥생활을 하던 흑인 노예들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더이상 그리 놀랍지 않은 부분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백인 주인을 살해한 노예, 배가 너무 고파 먹을 것을 훔친 노예, 매를 맞는 것이 너무 아파 구역을 벗어나 도망치다 잡힌 노예, 그외 이런저런 이유로 감옥에서 만난 흑인들이 모여 신세를 한탄하며 흥얼거린 가락이 구전으로 전해져 블루스라는 짧고 우울한 형식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나쁜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오히려 감옥이라는 삭막한 공간에서조차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나의 눈에는, 이들에게 감옥 안에서 노래 한줄 부를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엄청난 특혜나 불평등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감옥과 평생 인연을 맺을 일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죄수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처벌’에 대한 중세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이들에게 허락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조차 박탈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1970년대 버지니아 주립 교도소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6년에서 60년까지 다양한 형량을 선고받은 흑인들이 ‘포우헤이튼(Powhatan)’이라는 애칭을 가진 버지니아 주립교도소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단순 강도부터 살인까지, 이들의 죄목은 다양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교도소에 들어오기 전 꽤 괜찮은 음악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던 맥어보이 첼리스 로빈슨(McEvoy Chellis Robinson)은 열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들끼리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지만 1969년 약국에서 물건을 훔친 죄로 구속되었다. 제임스 캐링턴(James Carrington)은 가스펠 그룹에서 활동하며 버지니아 지역의 뛰어난 R&B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당시 사귀던 백인 여자친구의 부모가 그를 여자친구 폭행혐의로 고발하면서 모든 것이 뒤틀렸다. 자할 누비(Jamal Jahal Nubi)의 아버지는 블루스맨이었다. 그 역시 버지니아 지역에서 다양한 그룹을 이끌며 퍼커션 주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어느 파티에서 친구들이 그의 차를 몰래 훔쳐타고 나간 사건이 발생했고, 그 차가 나중에 범죄단체에 이용되면서 차의 주인이었던 누비는 순식간에 공범으로 몰려 구속되었다. 이 외에도 코넬리우스 “닐” 케이드(Cornelius “Neal” Cade), 해리 콜먼(Harry Coleman) 등 각자의 사연을 가진 ‘전직’ 음악가들이 교도소로 모여들었다. 이들이 감옥에서 만나 엣지 오브 데이브레이크(The Edge of Daybreak)라는 그룹을 결성한 것은 그래서 우연이라기 보다는 필연에 가까웠다.

누메로(Numero) 레코드에서 내놓은 61번째 복각판은 이 엣지 오브 데이브레이크라는 그룹이 포우헤이튼 교도소에서 만든 최초이자 마지막 정규 음반 [Eyes of Love]다. 이 음반은 1979년 9월 14일, 단 하루, 다섯시간만에 녹음되었다. 그룹의 멤버 캐링턴은 버지니아의 리치몬드에 위치한 알파 오디오(Alpha Audio) 스튜디오에 녹음을 부탁했지만, 교도소 당국은 보안상의 이유로 외부 녹음을 거절했다. 당시 3천불 정도였던 녹음비용 역시 죄수 신분이었던 그룹 멤버들에겐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결국 당시 알파 오디오의 사장이 모든 금액을 지불하고 8명의 특별 감시관을 추가로 고용한 뒤에야 교도소 당국의 감시 하에 녹음을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다섯시간 뿐이었다. 모든 곡은 원테이크 형식으로 녹음되어야 했다. 음반에 수록된 8곡 중 “Our Love”는 교도소측의 빨리 끝내라는 독촉을 받으며 서둘러 녹음된 노래다. 그 와중에 지역 오케스트라를 동원하고 비싼 퍼커션까지 빌려 녹음을 마쳤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Eyes of Love]는 1980년 몇몇 지역 라디오와 언론에서 주목하기도 했지만, 초판으로 발매된 약 3천장의 음반이 홍수로 인해 유실되면서 서서히 잊혀져갔다. 멤버들은 각기 다른 교도소로 뿔뿔히 흩어졌고, 두번째 음반은 녹음되지 못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어떤 멤버는 출소하여 새로운 그룹을 결성하고 활동을 재개했지만, 다른 멤버는 끝내 바깥 공기를 다시 마시지 못하고 교도소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이 음반은 버지니아 로어노크시의 한 레코드샵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이후 누메로 레코드를 통해 복각되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이 완성한 8곡의 소울-블루스 발라드는 무척 아름답다. 다섯시간만에 녹음되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만큼 여유롭고 따뜻하다. 이 음반의 발매사는 ‘포우헤이튼 교정당국’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위와 같은 뒷배경을 모르는 사람이 음반을 처음 듣는다면 꽤 특이한 이름을 가진 레이블이 훌륭한 음반을 발매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감옥이라는 삭막함(이 역시 평범한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눈물나게 아름다운 선율과 이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악기 연주가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데, 단 여덟곡만이 존재하는 바람에 바이닐의 앞뒷면을 뒤집고 다시 플레이시키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듣고 또 들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이 음반을 계속해서 플레이시키면서, 더 깊게 생각하게 된다. 이들의 영혼을, 우리가 감히 재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말이다.

Jackie Shane: Any Other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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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쉐인(Jackie Shane)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누메로 레코드에서 나온 복각판 [Any Other Way]의 발매소식을 통해서였다. 그 전까지 이런 아티스트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전부터 잊혀진 음악가를 발견해서 새롭게 조명받게 만드는 미국 음악산업의 마케팅 기법이 참 부럽기도 하다) 1971년 토론토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진 뒤 그녀는 ‘완전히’ 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캘리포니아에서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기정사실처럼 퍼져나갔다. 2006년 음악연구가 빌 먼슨(Bill Munson)이 재키 쉐인의 트럼펫 연주자였던 프랭크 모틀리(Frank Motley)로부터 그녀의 전화번호를 넘겨받아 직접 통화에 성공하기 전까지, 음악계에서 재키 쉐인은 사자(死者)로 기억됐다. 누메로 레코드에서 발매된 [Any Other Way]은 재키 쉐인이 발매한 여섯장의 7인치 음반과 공연 실황에서 뽑은 노래 25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음악가로서 넘치는 끼와 폭발적인 에너지, 음악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열정,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드는 펑크-소울 음악과 끈적한 블루스 음악이 한가득 담겨 있다. 1960년대 토론토와 보스턴 지역의 인디 R&B 씬에 대한 흔적을 찾고 싶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료이기도 하다. 또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흑인 여성 음악가가 백인 중심의 타지에 뿌리를 내리고 인정을 받기까지 거쳐야 했던 많은 과정들을 따라가다보면 재키 쉐인이라는 인물이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 캐나다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 자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198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이 재키 쉐인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숫자로 정리된 그녀의 커리어는 단촐하지만, 그녀의 삶은 영화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강렬하다. 그녀는 1940년 내쉬빌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조부모와 함께 생활했는데, 네살 무렵부터 여자아이 옷을 입고 노는 것을 즐겼고 여섯살 무렵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의 회고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운명이 어느 정도 정해진 셈이다. 1947년 조부모가 사망한 뒤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오하이오로 이주했지만 열살 때 다시 내쉬빌로 돌아왔고, 그곳에 있는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스펠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녀의 첫번째 우상은 냇 킹 콜이었다. 13살때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여성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러한 그녀를 인정하고 지지했다.

여성 음악가로서 재키 쉐인의 커리어는 십대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동네 근처에 있는 펍에서 드러머로 채용되어 정기적인 공연을 가지기 시작한 그녀는 곧 주목을 받아 엑셀로/내쉬보로(Excello/Nashboro) 스튜디오 밴드의 정규 멤버로 채용되었고, 자신의 밴드 라벨 앤 먼데이(Lavelle and Monday)를 이끌어나갔다.

1958년 고향을 떠나 새로운 음악적 정착지를 찾던 그녀가 새롭게 발견한 곳은 캐나다의 몬트리얼이었다. 흑인들이 그나마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내쉬빌을 떠나 당시 백인과 가톨릭이 중심이 된 도시였던 몬트리얼에 정착하게 된 계기가 흥미롭다. 그녀와 그녀의 밴드가 한 클럽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 머물던 호텔에 갑자기 갱스터 무리가 들이닥쳐 그들을 내쫓으려 했다. 그러던 와중 갱스터 집단의 리더가 그만 재키 쉐인에게 꽂혀버렸다. 자신이 키워줄테니 이곳에 계속 머물러라, 만약 나를 떠난다면 당장 죽여버릴 것이다, 라고 그녀를 협박했다. 당시 19살이었던 그녀는 이것이 운명인갑다, 싶어 그곳에 남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갱스터 두목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농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음악활동을 이어나갔고, 시내 다운타운의 한 클럽에서 프랭크 모틀리를 만나 그녀 커리어의 마지막까지 함께 할 밴드를 얻었다. 모틀리는 디지 길레스피에게서 트럼펫을 사사했다. 쉐인과 모틀리는 1959년부터 몬트리얼의 여러 클럽을 돌며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청중은 보통 200명, 혹은 300명 내외였다. 그때까지 쉐인은 화장을 예쁘게 했지만 남성 정장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당시에는 주로 미드-슬로우 템포의 블루스 넘버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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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토론토로 넘어와 조금 더 큰 규모의 공연을 갖기 시작했다. 윌리엄 벨(William Bell)의 노래 “Any Other Way”를 처음으로 커버한 것도 1962년, 토론토에서였다. 이 노래에는 윌리엄 벨이 직접 쓴 가사가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Tell her that I’m happy, tell her that I’m gay

쉐인은 가사 중 이부분이 좋아 즐겨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래는 Cookin’ 레코드에서 발매되었고, 보스턴과 토론토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토론토에는 R&B만을 다루는 라디오 방송국이 없었지만 “Any Other Way”는 지역 차트에서 2위까지 상승했다. 토론토는 이후 1971녀까지 쉐인과 모틀리가 실제로 거주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그녀의 첫번째 전성기가 펼쳐졌다. 토론토와 보스턴 뉴욕에서 그녀가 커버한 노래들이 7인치 음반으로 발매되었고 빌보드에도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남성 정장을 입고 무대에 올랐지만, 머리를 한껏 길렀고 하이힐도 신기 시작했다. 1967년부터는 토론토의 사파이어 터번(Saphire Tavern)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가지게 되었는데, [Any Other Way]의 뒷부분을 채우는 라이브 실황도 바로 이곳에서 녹음되었다. 토론토 지역사회에서 인기스타로 자리매김하며 그녀의 정체성도 보다 확실히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한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마치 마이클 잭슨을 만난 것 같았다”며 기뻐했고, 그녀와 누군가가 데이트라도 하면 다음날 그 남자에 대한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많은 지역 음악가들이 그녀와 교류하는 것을 즐겼으며, 그녀의 공연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찬사를 늘어놓았다. 재키 쉐인의 공연은 당시 토론토에서 하나의 중요한 문화적 구성요소로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체성을 찾은 후부터 지속적으로 차별을 경험한 그녀지만 대외적으로 활발한 양성평등 운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만 그녀 역시 자신이 다르게 취급받는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공연장에서 종종 모놀로그를 길게 행하곤 했는데(누메로 레코드의 복각판에도 “Money”라는 제목의 트랙에서 그녀의 유쾌한 모놀로그를 경험할 수 있다), 그 중 상당부분이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수근거림에 대한 그녀의 쿨한 반응과 마음다잡기에 할애되었다고 한다.

“당신들은 나랑 함께 여행을 해봐야 아, 예수가 재림했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거예요.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엄청 몰려다닌다니까요. 그들은 제가 손을 잡아주고 축복을 내려줄거라는 것을 알죠. 영혼도 치료해주고요. 그러니까 나에게 돈을 좀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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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그녀는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에서 새로운 집을 구했고, 이후 내쉬빌과 토론토, LA 등에서 공연을 하며 커리어를 마무리짓는다. 1971년의 대부분을 LA에서 보냈는데, 당시 그녀는 10년 넘게 계속된 공연에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고 한다. 프랭크 모틀리는 여전히 토론토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모틀리는 그녀가 컴백하기를 바랬지만, 쉐인은 콩코드 터번(Concord Tavern)에서 단 한번의 공연을 더 행한 뒤 완전히 사라진다. 몇번의 공연이 더 약속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모틀리는 공연 약속을 이행하라며 칼을 들고 쉐인을 위협했지만, 이번에는 몬트리얼에서 만난 갱스터 두목의 위협에 응했던 때와는 달리 초연하게 거절하고 뒤돌아섰다. LA에는 연인과 어머니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1997년 그녀의 어머니 제시(Jessie)가 숨질 때까지 그녀 옆에서 조용히 삶을 이어나갔다.

2016년, 토론토 도심에 위치한 22층짜리 한 빌딩에 벽화가 그려졌다. 토론토의 음악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그곳에서 활동했던 음악가들의 초상화였다. 글렌 굴드(Glenn Gould)와 B.B.킹(B.B. King)처럼 우리에게 잘 열려진 뮤지션들 사이 한가운데에 위치한 재키 쉐인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제가 잊혀졌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더군요. 제가 했던 공연들이 쓸모없는 것들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굉장히 가치있는 일이었어요. 사람들이 저에게 고마움을 표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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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첫인상

지난 월요일에는 아내와 함께 당일치기로 대전에 다녀왔다. 임용절차를 마무리짓기 위한 서류 묶음을 제출하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직 대전을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아내에게 학교와 그 주변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마침 내가 속하게 될 학과의 학과장님도 내게 대전 내려올 일 있으면 한번 보자는 연락을 주시기도 해서 겸사겸사 내려간김에 인사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서울과 대전 사이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체험(?)해보기 위해 차를 끌고 갔다. 강북지역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한남대교부터 만남의 광장까지의 구간은 단 한번도 시원하게 뚫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서울은 절대적인 크기도 매우 큰 도시지만, 면적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이 살다보니 더 거대하게 느껴지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버겁게 느껴진다. 서울을 빠져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세금이라고 한다면 그 값이 결코 작지 않은 셈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진입하는 것도, 그 도시를 빠져 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 비단 고속도로 위에서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곧게 뻗어있는 경부고속도로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지 않는 도로 중 하나인데, 차를 타고 달리는 재미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도로 주변에 어지럽게 들어선 건물들에서 서울로 향하는 욕망의 탑을 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남대교에서 양재IC를 지나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반포자이아파트는 그러한 욕망을 가장 명확하게 상징하는 건물이다. 한국에서 아마도 공기가 가장 나쁜 곳에 들어선 이 아파트 단지의 평당 매매가격은 나라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서울을 벗어날수록 한적해지는 풍경은(그리고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낮아지는 평당 매매가격은) 그래서 다행스러우면서도 처연하게 느껴진다.

고속도로를 따라 하염없이 내려다가 보니 대전이 생각보다 멀게 느껴졌다. 옆에 앉은 아내의 근심이 본격적으로 느껴진 것도 이 즈음부터였다. 우리 부부의 느릿한 생활 리듬에 견주어볼때 서울과 대전 간 거리는 결코 당일 생활권이 될 수 없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길바닥에서 하루 네시간여의 시간을 고스란히 낭비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주거지를 이동하는 것이 유일한 답처럼 느껴졌다. 어디로 어떻게 옮기느냐의 문제로 넘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난 월요일 날씨가 매우 추웠기 때문에 우리가 대전에서 받은 첫인상도 당연히 ‘춥다’는 것이다. 창원이나 부산처럼 서울보다 완연하게 따뜻하다고 느끼는 지역이 있는데, 대전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서울만큼 추웠다. 아마 여름에도 서울만큼 덥고 습할 것이다. 문제는 춥고 더운 날씨를 얼마나 피할 수 있느냐일 것인데, 싱가폴은  서울보다 훨씬 덥고 훨씬 습하지만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로만 살살 피해다니면 더위도 크게 느낄 수 없다는 아내의 설명에 ‘싱가폴에서도 살 수 있겠다’라는 희망을 품었던 적이 있다. 불행히도 대전은 더위와 추위를 잘 피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대중교통이 발달한 도시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지하철 노선은 단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많은 구설수를 낳은 엉뚱한 정차역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유성온천역(충남대, 목원대)에서 충남대와 목원대는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에 있고, 월평역(KAIST)에서 카이스트는 보이지도 않는다. 갤러리아 백화점이 있는 둔산동 신시가지에는 아예 지하철역이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버스 노선이 서울처럼 활발하게 발달해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주위에서 듣기로는 많은 이들이 자가용 자동차를 이용해 이동한다고 한다. 나중에 도시를 조금 더 살펴본 뒤에야 자가용이 더 잘 어울리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일하게 될 대학교는 넓고 광활했다.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교들이 좁은 부지 위에 높은 층수의 건물들을 옹기종기 배치한 것에 비해 이 대학교는 넓은 부지 위에 낮고 넓은 건물들을 띄엄띄엄 배치한 점이 인상깊었다. 규모가 큰 국립대여서 그런지 기숙사 건물도 여러채가 있었고 학교 안으로 다니는 버스도 보았는데, 이러한 점에서 콜로라도 대학교의 풍경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어서 약간 반갑기도 했다. 앞으로 속할 단과대에서 학과장님과 학과의 다른 교수님 한분을 만나 뵈었다. 그 분들은 나보다 내 아내에게 더 큰 인상을 받으신 것처럼 보였다. 아내가 대화를 주도했기 때문에 내가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대전의 부동산 시장 현황과 그곳에서의 교수로서의 생활 등 여러가지 귀한 조언을 받고 나왔다.

앞으로 우리가 살 곳을 둘러보기 위해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본 주거지역을 차를 끌고 휘휘 둘러보았다. 우리 모두 둔산동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미 잘 갖추어진 주거환경과 널찍하고 곧게 뻗은 도로사정이 아직 운전이 서툰 아내가 자동차를 이용해 돌아다니기에 나쁘지 않은 곳처럼 느껴졌다. 1990년대 지어진 아파트의 노후화와 그에 따른 투자가치 하락 정도가 마음에 걸렸다. 도안신도시와 노은동은 새로 조성된 주거지역이어서 둔산동에 비하면 조금 횡한 느낌이 들었지만 삶의 질, 생활 편의성만 따진다면 깔끔하고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려는 경향이 있는 아내에게는 대충 둘러본 이번 방문이 불충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세종시로 향했다. 세종시는 태어나서 처음 가보았는데, 그야말로 국가의 욕망, 투기꾼의 욕망,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해보려는 서민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얽혀있는 공간이었다. 아이를 키우기에는 더할나위없이 좋아보이는 환경이었지만, ‘한국에서 아기를 키우는 부모’가 원래 정상적인 곳이었다면 당연히 누렸어야 할 다양한 조건들을 모두 포기한다는 전제조건에서만 가능한 환경같아보이기도 했다.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약간 더 많이 포기하고 부모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기를 강요하는 도시처럼 보였다. 그래서 출산율이 그렇게 높은건지도 모르겠지만. 예쁘게 만들어진 도서관에서 오후 시간을 보내다 오면 좋겠다는 대책없는 낭만적인 생각도 해보았다.

어찌보면 대전과 그 주변은 미국 대도시의 다운타운과 그 주변 교외거주지역을 아우르는 구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대전은 대전역 주변에 걸쳐 형성된 역사 깊은 구도심과 정부청사를 주변으로 형성된 신도심으로 중심부를 나눌 수 있는데, 구도심과 신도심, 그리고 유성구로 대표되는 신주거지역과 대덕연구단지가 갑천과 유등천이라는 작은 천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지역을 아우르는 대전시는 세개의 고속도로로 둘러싸여 있다. 신도심 가까이에는 90년대 지어진 아파트들이 밀집한 둔산동이 있는데, 이 곳의 이미지는 분당이나 과천과 흡사하다. 대덕연구단지와 정부청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형성한 군락답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이들을 포함한 대전의 ‘상류층’ 상당수가 새롭게 조성된 노은지구와 도안지구로 이주했는데, 이곳의 모습은 수도권의 위례지구, 혹은 판교와 닮아있다. 세종은 대전에서 차로 20여분 떨어져 있는 독립적인 도시인데, 아직 자급자족 능력을 완전히 갖춘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계획의 절반도 채 개발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앞으로 국가 및 기업의 막강한 자금이 계속 투입될 것이라는 점에서 투자가치는 상당해보였다. 대전 신시가지와 비슷한 모양새를 한 도시는 아내의 고향이기도 한 창원이다. 널찍하고 곧게 뻗은 도로와 그 사이에 위치한 성냥갑같은 아파트들, 감히 주민의 미래 소비수준을 정확히 맞추어보겠다는 공무원의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충분히 예상된 실패의 모습으로 스며들어가 있는 부족한 주차장과 복잡하게 난립한 상가건물들이 차곡차곡 쌓여져 있는 모습이 많이 닮아있다.

결국 우리 부부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에 살 것이냐와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인데, 우선 어디에 살지에 대해서는 이번 대전 방문으로 후보지를 두세곳 정도로 추릴 수 있었다. 아직 세종시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세종시가 대전 주변에서 거의 유일한 투자가치를 지닌 곳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노무현이 꿈꾸었던 그 도시에서 잠시라도 살아보고 싶은 욕심도 있고, 부동산을 투자수단으로 삼아 어떻게든 돈을 모아보겠다는 욕망도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다. 어쨌든 후보지 중 어디를 가더라도 서울과 비교해 절반 정도의 가격에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부동산가격에는 사람들의 집단적인 욕망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특히 수도권 주요지역을 중심으로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논리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가격결정구조가 존재한다. 요즘 부동산시장의 화두는 양극화라고 한다. 서울로만 강남으로만 은마아파트로만 돈이 몰린다. 강남의 중심부로부터 시작되는 돈의 욕망이 주변부로 조금씩 퍼져나가 전염시키는 와중에 그 욕망의 크기가 희미해지기도 하는데, 그러한 돈의 중독성 강한 냄새는 동탄 즈음에 이르러 거의 소멸된다. 그래서 대전에는 그런 불로소득의 욕망이 서울처럼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살고 있는 성동구 금호동 집은 1년 전에 비해 1억원이 훨씬 넘게 올랐다. 대전에서 요즘 가장 핫한 곳이라는 도안동의 비슷한 연식의 아파트는 그 절반도 오르지 않았다. 둔산동은 거의 제자리 걸음이다. 돈의 욕망에서 해방되면 차라리 살기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집으로 부자될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면, 서울의 중심부에서 아둥바둥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불어나는 자산과 얌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나의 것을 비교하지 않을 용기만 있다면, 우리 가족이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대전에 있을 것만 같다.

또하나 걱정인 점은 우리가 ‘문화’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서울의 무형의 인프라스트럭처다. 홍대와 성수, 이태원과 서촌, 신사동과 압구정 부근에 ‘고유명사’처럼 조성된 상권이 과연 대전에도 있을 것인가. (나는 궁동 대학가에서 ‘홍대떡볶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를 보았다. 홍대에서 떡볶이를 사 먹은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서울과 애매하게 가까운 나머지 인구에 비해 상권이 역설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대전 지역에서 과연 프릳츠나 테일러처럼 나름의 브랜드파워를 지키며 살아남아 있는 커피숍체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서울과 지방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선택의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에서는 요즘 유행하는 산미 강한 커피가 싫다면 리이슈에서 전통적인 스타일의 캐러맬화가 많이 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롯데백화점이 싫으면 현대백화점이나 신세계백화점을 가면 되고, 이 바버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와 비슷한 수준의 다른 바버샵을 찾아가면 된다. 우래옥과 을밀대 중 좋아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자유는 그것을 일상 속에서 누려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큰 부러움의 대상일 것이다. 그 다양한 선택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 다음에 고민할 문제다. 대전에 과연 이러한 선택지가 존재할지는 그곳에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곳에는 그곳의 문화가 있을 것이고, 그 지역에서만 소비되는 문화가 있을 것이다. 지역 커뮤니티 안으로 들어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호흡할 때에만 진실되게 느낄 수 있는 공기가 있다. 서울은 덩치가 너무나 큰 나머지 그러한 공동체 문화가 거의 완벽하게 소멸되어버린 케이스다. 대전은 어떨까. 궁금하다. 그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차곡차곡 해나가고 있다.

블로그 정보 수정

블로그 유저이름과 도메인이름을 수정했다. 이제 더이상 내 영어이름으로 구성된 블로그 주소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내 영어이름을 통해 이 블로그에 들어오던 분들은 당황하셨을 수 있다. 하지만 유입이 가능한 연관검색어 또한 익히 알고 계실거라 생각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기작성된 댓글에 표시된 이름은 수정이 되지 않는다 ㅠ)

약 25년 전 한 여행사 직원의 실수로 인해 탄생하게 된 나의 영어이름은 그 자체로 너무 특이해서 쉽게 검색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블로그를 만들고 글을 쓸 경우, 회사의 직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사내기밀을 블로그를 통해 유출하지 않는 한 크게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관리가 불가능한 수준의 불특정 다수에게 이름이 노출된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조금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아내의 의견이었다. 교수라는 직업의 특성 상 어쩔 수 없이 많은 검색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어쩌다 블로그나 SNS를 접하게 된다면 의도치 않은 사생활 공개를 감수해야 할 확률이 높다. 나뿐만 아니라 내 인스타 계정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아내의 계정까지 털릴 수 있었기에, 인스타그램도 비공개 계정으로 전환했다.

가끔 아버지의 이름을 검색해보곤 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아버지는 당신에 대한 근거없는 비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대중을 상대로 책을 거의 쓰지 않았고 대부분 비슷한 수준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글을 써왔기에 인터넷에 퍼진 아버지에 대한 평가와 학계에서 받는 평가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는 그런 글을 보면 화가 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저서를 한권 한권 이해할 수 있게 되자 근거없는 비판에 대해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교수는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돈을 받으며 한다는 큰 이점을 챙기는 대신 그렇게 획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더 나은 교육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사회적 책무도 가지고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글에 대한 근거 없는 오해와 비판이 발생한다면 그 과정에서 잘못된 것은 무엇인지 설득시켜야 할 의무도 일정부분 있는 셈이다. 어쨌든, 학문적 내용이 아닌 사생활과 관련하여 논란을 만드는 것은 교수가 가장 먼저 피해야 할 부분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한 곳

볼더에서의 마지막 1년은 무척 단조로웠다. 입학 시절부터 함께 했던 친구들은 먼저 볼더를 떠났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기에는 마음이 너무 어지러웠다. 수업을 맡지 않고 학과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타인과 대화할 기회 역시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도서관이나 집에서 논문을 마무리하는 일에만 집중했지만, 조여오는 시간의 압박 속에서 글이 제대로 나올리 없었고 볼더를 떠난 지도교수님은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번씩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안식처는 학과 건물 근처에 있는 작은 커피숍이었다.

이니스프리 북스토어(Innisfree Bookstore). 가게 이름만큼이나 아늑하고 조용했던 그곳은 어지러운 내 마음을 조용하게 다독여주는 공간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호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잠시 쉬어갈 여유를 제공해주는 작은 섬. 그곳의 주인은 내가 막연하게 그려왔던 전형적인 시인(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예이츠)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성공한 비지니스맨의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였다. 내가 가게에 들릴 때 그는 거의 항상 가게에 있었는데, 단 한번도 커피를 직접 내리거나 계산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저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시집들 사이에서 손님을 응대하며 여러가지를 묻고 답할 뿐이었다. 나에게도 몇번 말을 걸어주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가게에 들려 같은 메뉴(핫초콜렛)를 시키는 동양인 남자를 기억하지 않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날은 내가 입구에 들어가서 인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핫초콜렛을 내어준 적도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하던 직원 한명은 나를 “핫초콜렛 보이”로 불렀다.

그곳을 떠날 때 가게 이름이 적힌 텀블러를 꼭 하나 사오고 싶었다. 그 가게를 기억하며 매일 커피를 담아 출근하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1년, 2년 길어질수록 다시 볼더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일주일에 다섯번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소주와 맥주를 섞은 맛없는 술을 마시면서도 웃으며 이야기해야 하는 삶이 반복될수록 볼더에서의 마지막 1년이 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그랬던가, 싶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금감원을 박차고 나올때 많은 이들의 걱정을 전해들었다. 많은 이들이 높은 연봉과 안정된 생활을 왜 굳이 포기해야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고, 아마도 나를 어리석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국회를 나올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럽다”라는 말 속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는 부드러운 힐난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우는 두 곳에서 사표를 내고 제발로 걸어나왔다. 한국에 사는 많은 이들이 금감원에 들어가고 싶어하고 행정사무관이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곳을 평생 직장으로 생각한다. 그만한 보상이 있어서일 것이다. 금전적이든 사회적 지위든 권력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당시 나는 그 보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답게 사는 것.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것. 이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태어날때부터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학교에서, 사회에서, 친구들에게, 책에서, 텔레비전에서 조금씩 인자를 받아 개인이 가지고 태어난 특유한 성정과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필연과 우연이 묘하게 결합되어 만들어진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결정체이다. 나는 단 한번도 내가 공부를 잘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공부를 일생의 업으로 삼기에 충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스무살 이후 내 삶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질책의 연속이었다. 내가 정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논문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이 일로 돈을 벌어 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왔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단 한번도 남들보다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남들보다 월등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도 못한다. 그저 누군가의 뒷꽁무니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남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렇게 괴로워하며 가까스로 학문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렇게 살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매일 똑같은 커피숍에 들러 똑같은 메뉴를 주문하듯,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토록 되고 싶었던 ‘나다움’이 무엇이었을까. 어려운 공식 하나를 완전히 이해할 때 느껴지는 쾌감때문이었을까, 인류의 역사를 일군 지성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에서 황홀함을 느꼈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그저 공부를 하는 순간만큼은 내가 살아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고, 그 펄떡이는 맥박과도 같은 확신이 서울의 더러운 공기 안에서도 나를 숨쉬게 만들었다. 그게 내가 발견한 ‘나다움’이었다. 그걸 막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숨이 막히는 듯한 절박함을 느꼈다. 공부를 더이상 하지 못하는 환경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제일 좋다는 직장 두개를 때려치우고 나왔다. 어쩌면 두번의 좋은 기회가 내 삶에 찾아왔고, 그것을 그냥 포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렵게 학위를 받은 나에게 안정적인 삶이라는 보상이 두 번이나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어제 한 학교로부터 최종합격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서울이 아닌 곳에 위치한 건실한 국립대인데 당장 올 3월부터 내려가 강의를 해야한다. 소식을 받은 어제는 매우 당황스러웠고 얼떨떨했다. 가족들이 오히려 흥분했는데, 정작 나는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어 별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하는 말만 반복했다. 뛰어난 논문을 쓴 것도, 화려한 커리어를 가진 것도, 견실한 강의경력을 보여준 것도 없었다. 길고 힘든 길을 시작하는 마당에 경험이나 쌓아보자는 생각에서 지원한 학교였다. 교수로서의 삶이 이렇게 빨리 올지, 이런 방식으로 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교수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거의 매일 해왔다. 하지만 정작 교수가 된다고 생각하니 그 어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교수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 학문을 한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학문을 하는 와중에 교수라는 직업이 주어지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 큰 영광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 학교 근처에도 이니스프리 북스토어같은 커피숍이 있을까? 매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어려운 논문을 읽고 하루에 하나의 문장이라도 제대로 쓰기 위해 애쓰는 와중에 잠시 들려 따뜻한 커피를(이젠 커피다!) 마실 수 있는 그런 곳이, 그 학교에도 있을까? 내가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다독여줄 수 있는 그런 곳이 있을까? 지금 이미 그런 곳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아내라는 든든한 커피숍이 내 옆에 있다. 그래서 이 길고 긴 여정이 더이상 외롭거나 힘들지 않다. 낯선 곳으로 또다시 이주해야 하는 현실도 두렵지 않다. 더이상 혼자가 아님에 감사한다. 그리고 아직 나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음에 감사한다. 여전히 공부를 못하고 머리도 좋지 못한 나이지만, 다시 한번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기회를 ,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음에 감사한다. 이렇게 또 열심히 살아보겠다.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 문제

최근 법무부와 금융위에서 가상화폐 거래소를 폐쇄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중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온 뒤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강한 반발여론이 형성되었고, 정치권에서도 4차산업 흐름에 역행하는 정부정책이라는 비판여론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해프닝으로 끝날지 더 깊은 수준의 논쟁으로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이번 갈등이 최근 한국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가상화폐 투기 문제가 불러 일으킨 또 하나의 사회적 비용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하다.

우선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 다양한 형태의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폐, 혹은 가상화폐는 ‘화폐’가 아니다. 이 상품에 대한 시장가격의 변화가 극심하여 가치의 저장수단으로 활용이 거의 불가능하고, 공급량이 제한적이므로 물물교환 수단으로서의  활용가치도 극히 제한적이다. 화폐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은 노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잉여생산물, 혹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주관적 가치들을 명목적이고 객관적인 가치, 즉 시장가격으로 환산해주는 것이다. 암호화폐는 그 자체의 시장가치의 변화가 너무 극심하므로 다른 가치를 환산해주는 객관성을 내재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이 암호화폐의 가치(일반 화폐로 치면 기준금리)를 적절히 조절해줄 권위적인 화폐 공급자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암호화폐가 화폐가 아니라면 이것이 투자인지 투기인지 구분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투기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암호화폐를 구입함으로써 발생시킬 수 있는 경제적 파생효과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암호화폐를 구입하고 판매하는 행위를 반복할 때 발생하는 경제적 이득은 차익실현 정도만이 있을 뿐, 그 과정에서 투입된 금액으로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경제활동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차익실현을 통해 돈을 벌 것이고, 그 돈으로 아마 소비 등 다른 경제활동을 하게 되어 행복감을 추가적으로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암호화폐 거래행위가 투자의 영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암호화폐에 투입된 금액이 GDP에 잡히는 어떤 생산적 경제활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즉 암호화폐 생산자가 암호화폐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무언가를 하던가, 암호화폐 자체가 무언가 일을 하던가 해야 한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그 자체로 어떠한 경제행위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암호화폐로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이란 것이..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더 나아가, 암호화폐의 가격형성 과정을 지켜보면 시장의 과도한 ‘기대감’이 가격상승을 부추기는, 전형적인 폰지스킴(Ponzi scheme)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심리적 요인에 의해 내재적 가치보다 더 높은 가격이 형성되고 이로 인해 반복적인 차익실현만이 존재할 뿐 어떠한 실질적인 경제효과로 이어지지 못할 때, 이 현상을 투기로 판단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폐의 역할도 할 수 없고 투기양상을 보이고 있는 시장이라면 정책당국 입장에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판단할 여지가 생긴다. 관건은 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고, 정책적 해결책은 정확한 원인분석에 기인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경제불황기에 발생하는 ‘유동성 선호이론(liquidity preference hypothesis)’가 발현된 현상이라고 본다. 유동성 선호이론에 따르면 경기가 불황기에 접어들면 통화당국에서 시중에 돈을 풀기 위해 이자율을 낮추고, 낮아진 이자율로 인해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떨어진 화폐가치로 인해 안전자산에 대한 투자수요가 감소하게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안전자산이란 은행예금부터 선진국의 우량채권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다 경기 불황이 심해지면 소위 ‘안전자산 함정(safety asset trap)’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시장에서 우량채권이라고 믿었던 선진국의 채권이 극심한 경기불황으로 인해 비우량채권으로 평가절하되면서 시장에 안전자산의 공급이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을 의미한다. 실제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포르투갈과 같은 서유럽 국가의 채권 등급이 급락하면서 위험자산으로 평가받은 전례가 있다.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시중에 풀린 값싼 투자자금을 저장해둘 좋은 안전자산이 씨가 마르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비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유동성 선호이론의 핵심이다. 즉, 통화당국의 정책적 판단에 의해 시중에 공급된 유동성이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로 이어져 경제적 불안정성을 증대시키고 변동성을 높인다는 이론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몇년간 이어진 저성장과 저금리기조로 인해 시중에 유동성이 과잉공급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과잉공급된 유동성은 지금까지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가 최근 몇년간 수도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유발시키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정책당국에서는 LTV와 DTI를 조절하고 신규분양과 재개발 등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등 부동산 시장으로의 유동성 쏠림현상을 막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 시장의 특징 중 하나는 주식시장과 달리 목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소 몇억원의 종잣돈이 있어야 시장 진입이 가능하다.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층이나 목돈이 없는 서민층은 애초에 게임 플레이어로 참가할 수 없는 구조다. 하지만 이러한 소규모 자본을 가진 이들 역시 유동성 선호이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노동에 대한 대가인 임금은 갈수록 박해지는 환경에서 수중에 가진 돈도 몇푼 없는 이들이 발견한 시장이 바로 암호화폐 시장이다. 암호화폐는 몇십만원, 혹은 몇백만원으로도 시장진입이 가능하며, 현재까지 세금도 붙지 않고, 계좌 개설 등에 있어서도 그 과정이 매우 간편하다. 별다른 금융지식이 없어도 쉽게 돈을 넣고 불릴 수 있는 낮은 진입장벽의 시장인 셈이다. 암호화폐 시장에 돈을 넣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한 이들을 “개미”라고 칭한다면, 한국의 암호화폐 시장을 굵직하게 움직이는 “기관”은 유산상속 등 거액의 거래를 세금 부과 없이 하려 하는 중산층 이상의 자본가들일 것이다. 암호화폐의 형태로 증여할 경우 손쉽게 탈세가 가능하다. 이들이 움직이는 큰 덩치의 돈이 암호화폐 시장의 평균가격을 움직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즉, 현재 한국의 암호화폐 시장이 과열된 투기 현상으로 변질된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통화당국의 정책실패때문이지, 소규모 투기자들의 비이성적 판단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정책당국이 암호화폐시장을 “도박판”으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현재 암호화폐 시장의 비정상적 과열현상은 장기간에 걸친 저금리기조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사회적 문제로까지 인식된 암호화폐 시장 과열 문제를 거래소 폐쇄 등의 방법으로 풀고자 한다면 이는 근시안적 미봉책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암호화폐 시장에 쏠린 유동성을 실물가치 생산에 대한 투자가 가능한 주식시장 등으로 돌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초단기매매 등 차익거래에 지나치게 집중한 거래형태에 대한 강력한 세금부과라던지, 거래횟수 제한이라던지, 거래 규모 제한이라던지, 방법은 많다. 이 시장이 탈세 등의 목적을 위해 음성적으로 사용되지 않게 막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를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문적인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투기에서 투자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시장에서도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장상미: 지금은 없는 동네|옥수동 트러스트

[지금은 없는 동네|옥수동 트러스트]는 필자 장상미가 운영하던 위치 기반의 사진 기록 저장소웹사이트를 책자 형태로 정리한 결과물로 보인다. 옥수동 13구역은 성동구 옥수동의 윗쪽 끝자락에 붙어있는 지역이다. 이 구역은 2011년 9월 재개발이 시작되어 2016년 11월 ‘e편한세상 옥수파크힐스’라는 이름의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탈바꿈되었다. 재개발이 되기 전 이 구역으로 필자인 장상미가 입주했을 당시 그녀는 전세 보증금 1,500만원으로 반지하방을 구할 수 있었지만, 지금 옥수파크힐스의 가장 작은 평수대 아파트를 한채 구입하려면 8억원이 넘는 돈이 필요하다. 금액으로 환산된 가치의 간극만큼이나 필자가 남긴 사진 속에 존재하는 동네의 이미지와 현재 같은 공간에 세워올려진 마천루의 이미지는 몹시 달라보인다. 낡은 칼국수집과 이발소 사이에 자리잡고 누워 인간과 체온을 나누었던 길고양이들의 행방을 묻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질 정도로 지금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계급과 그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의 계급 사이에는 차가운 금속과 콘크리트, 시멘트 따위만이 빼곡히 존재할 뿐, ‘동네’가 던져주는 따스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는 강제이주계획은 오래된 도시 서울이 그나마 가지고 있는 마지막 미덕인 커뮤니티의 역사조차 영(0)으로 돌려버리는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면모 중 하나다. 서울에서 그나마 아름다운 동네는 대부분 달동네들이다. 그곳을 개발하는 유일한 방식이 ‘완전히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올리는’ 것 뿐이었는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법은 없었는지, 도시계획쪽 전공이 아닌 나는 뻔한 답이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우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옥수동 바로 옆에 위치한 금호동이다. 인구의 90%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옥수동과 달리 금호동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달동네와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가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다. 가판대가 널려있는 금남시장과 장진우가 새로 문을 연 식당이 같은 골목에 위치해 있고, 고급 외제차가 쉴새없이 쏟아져나오는 신축 아파트 바로 옆에 바다이야기 따위를 취급하는 성인오락실이 성업중이다. 이곳도 곧 옥수동처럼 변할 것이다. 수십년 자리를 지키던 나이많은 이들이 얼마의 돈을 받고 다른 곳으로 떠나갈 것이다. 금호동이 간직했던 역사는 콘크리트 밑에 파묻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사라질 것이다. 이 책의 필자와 같은 사람이 금호동에 한명이라도 있다면, 몇 장의 사진 정도로 금호동의 역사를 기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너무 많은 역사들이 가볍게 취급되고 있다. 도시의 역사는 이보다는 조금 더 중하게 기억되어야 한다.

케네스 로너건: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 by sea
아마존을 통해 배급되고 성추문에 휩싸인 배우 케이시 애플렉이 주연한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영화를 둘러싼 그 모든 주변적인 이야기들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함을 일깨우는, 다른 말로 하면 영화를 읽어내려가는 데 있어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는 영화가 가진 본질적인 힘 그 자체뿐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구조는 다층적이며 촘촘하고 빈틈이 없다.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장면 하나, 대사 하나에도 영화가 제시하는 주제의식의 무게가 묵직하게 실려있다. 배우들은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선보이며 서사구조는 완벽에 가깝다. 미국 동북부의 작은 해안도시가 갖는 황량하고 쓸쓸한 이미지는 영화의 조연으로 묵묵히 힘을 보탠다.

세상의 바닥 끝까지 떨어진 한 남자가 감정을 거두어 들인채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것처럼 생활한다. 그러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은 충동적인 반사회적 행동을 통해 현실의 거울에 비추어진다. 그가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의지했을 가족이었던 형의 죽음으로 인해 찾아온 철부지 조카의 후견인 역할은 세상에서 끊임없이 도망치려 하는 그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른채 절망하는 그에게 세상은 잔인하게도 당연히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요구해온다. 갑자기 인서트되는 과거회상 장면은 지나칠 정도로 장엄한 배경음악과 함께 현재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절제하려 하는 그의 내면이 얼마나 폭발적으로 미칠 것 같은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찰서에서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이미 충분히 무너져내린 그에게 세상 물정을 모른채 아버지의 배를 고집하는 조카의 어린 영혼은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세상이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사랑이 솟아나고, 절망의 끝에서 한줄기 희망을 본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주인공의 상황이 담담히 묘사되는 가운데 영화는 묘하게 희망적인 방향으로 조용히 나아간다. 독한 말을 쏟아내었던 것을 사과하고,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애원한다. 그렇게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들끼리 서로 등과 어깨와 손을 내어주며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이다. 낡은 배의 모터를 다시 달고 어딘가 처박아 두었던 낚시대를 다시 꺼내 조용히 세상과 마주하는 엔딩씬에 다다르면 이 영화가 마법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영화적 마법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