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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 as Seoulite, missing Boulder, and loving wife

나는 정말 모르겠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갑자기 사망했다. 집에는 유서가 남겨져 있고 야산에서 사체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자살로 추정된다. 사망 하루 전 망자는 전 비서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2017년부터 행해졌다는 성추행 내용이 고소장에 빼곡히 담겨 있었다. 전날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던 망자는 이 고소장이 접수된 이후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

여기까지가 밝혀진 사실이며, 다음으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슈 몇가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고소인은 피해자로 법적인 지위가 변경되었는가? 아니다. 피고소인의 사망으로 인해 수사는 종결되었고, 사실관계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고소인이 피해자로 지위가 변경될 가능성은 앞으로도 없어보인다. 현재 일부 정당 및 언론에서 고소인을 “피해자”로 명명하는 것은 법적으로 옳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조직의 입장, 혹은 판단이 담겨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피고소인의 사망으로 인해 받게 될 고소인의 2차 피해를 방지해야 하는가? 당연하다. 피고소인의 사망은 고소인의 법적 행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고소인이 피고소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주장은 지나친 피고소인 중심의 시각이다. 고소인은 사실관계를 다투어 법적인 처벌 여부를 가리고자 고소라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고, 그가 바라는 법적 처벌 중 자살은 없었다.

망자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로(만약 ‘1차 가해’가 사실이라면) 인식될 수 있는가? 개인의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타인의 행동을 강요할 수 없다는 주장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지위를 이용한 성추행이라는 민감한 사안에 있어 일방적인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고소인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치권을 비롯한 각종 유력 인물들이 망자에 대해 예를 갖추는 언행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 만으로 상당한 수준의 심리적 압박을 받을 것으로 짐작되나, 이를 이유로 망자의 장례절차 및 이후 망자에 대한 평가 등에 대해 고소인의 입장을 고려하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망자에 대한 장례는 고소인이 취한 법적인 부분과 완전히 별개로 존재하며, 망자는 자살이라는 방법을 통해 사건을 종결시켰으므로 사실관계를 다투고자 했던 고소인의 목적은 달성하기 어렵게 되었다. 즉 이 사건은 이렇게 끝나게 되는 것으로, 자살이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라는 정세랑의 문장이 특정 집단을 중심으로 회자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고소인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된 것과 피고소인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 간에 주요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그 어떠한 합리성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특정 집단의 자의적 판단이 법적 판단보다 우위에 있다는 가정이 성립해야 하는데, 이 사회는 그러한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망자의 죽음이 업무상 순직이 아니며 정부장을 치루기 위한 행정절차를 적법하게 거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서울특별시장을 치루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는 주장이 오히려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 서울시 측이 답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망자는 자신의 죽음을 철저히 개인적으로 것으로 마무리지음으로써 망자에 대한 성추행 건이 정치적인 사건으로 번지는 것을 조기에 차단시키고자 했으므로, 그의 죽음 역시 개인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 논리적으로나 정무적으로 더 나은 판단으로 보인다. (서울시측은 오늘 5일장에 대한 공식적인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장례가 왜 서울특별시장으로 치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답변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정치인이 망자의 빈소에 조문가지 않는다는 결정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행위가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를(만약 ‘1차 가해’가 사실이라면) 방지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고위공직자들이 저지르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고소장에는 “성추행”으로 명시되었는데 왜 수위가 높아졌는지에 대한 이해는 미루기로 한다)에 대한 철저한 진상파악이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성명서에 명시함으로써 문상과 장례절차에 반대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앞서 적시한 바와 같이 고소인은 피해자가 아니며, 피고소인은 가해자가 아닌 상태에서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개인의 추측에 의한 섣부른 판단과 이를 근거로 한 행위의 정당화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공무상 사망이 아니므로” 5일장에 동의할 수 없으며, 이를 근거로 문상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궁핍한 이유지만 그나마 설득력을 가진다. 나는 이들의 행동에서 고소인에 대한 진정한 배려를 느끼기 보다는, 자신이 속한 정당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언가에 ‘반대’하는 모습을 전시하는 것처럼 느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진실성이 느껴지는 건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글이다. 그는 페이스북 글에서 “‘당신’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조문하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이는 류의원이 ‘당신’으로 추상화시킨 불특정 다수의 여성 피해자들과 연대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논리성이 결여된 판단에 근거한다 할지라도 연대의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높이 살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 그 ‘연대’의 민낯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보자. 박원순이 성범죄자인가? 아무도 모른다. 법원은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박원순은 판단받지 않는 쪽을 택했으므로 많은 이들이 그가 그 짓을 정말 저질렀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머물 뿐, 사실관계에 대한 법적 판단을 받을 길은 영원이 막혀 버렸다. 아마도 고소인과 여성운동계는 이 지점에서 분개한다. 유력 정치인의 위계에 의한 성추행 사건은 그 자극적인 표피만큼이나 이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클 것이고, 이후 한국사회의 지형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고소인의 용기는 그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이 사회에 만연한 ‘높은 지위의 남성이 낮은 지위의 여성에게 가하는’ 다양한 종류의 폭력에 대한 사회적 대응방식을 바꿔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망자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 과정이 모두 법적인 절차에 의해 진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모든 담화가 불완전한 차원에서 영원히 머물게 되어버렸다.

여기서부터 의문이 생긴다. 왜 이들은, 즉 트위터 등의 SNS를 통해 이슈몰이를 하며 ‘공격’을 가하는 집단과 이들을 추종하는 세력은, 선택적으로 그 대상을 가려 뽑는가? 최숙현 선수의 자살과 이와 관련된 체육계 폭행사건에 대해서 왜 지금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가? 위안부 쉼터 소장의 자살에 대해서 왜 지금처럼 소리 높여 원통해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들이 가진 ‘공감’이라는 행위의 범위가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칭하는 ‘이들’이란 모두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숙명여대 트렌스젠더 입학에 반대한 이들, 미투운동 당시 박진성 시인을 비롯해 무고한 이들을 가해자로 몰고 가며 ‘모금활동’을 했던 이들, 안희정 모친상에 대통령 조화를 보낸 것에 분개한 이들. 최숙현과 위안부 쉼터 소장의 자살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선택적으로 침묵했던 이들.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일부라고 지칭할 수 있는 이들은 연대의 범위를 상식적인 남성으로 확장하기 보다는 일부 여성집단의 이익을 위해 배타적으로 행동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다. 망자의 사망이 발표된 날 밤 와인잔을 부딪히며 축배를 드는 모습을 굳이 트위터에 올린 이들이 정말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를 진심으로 걱정할까? 이들이 이야기하는 피해자와의 연대는, 어쩌면 잠재적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다수의 일반적인 여성들이 ‘보험’의 성격으로 납부하는 기부금을 위한 선전활동의 일부에 불과하지 않을까? 공공화장실에서 몰카가 발견되고 대부분의 성범죄 가해자는 피해자와 구면이고 소아성애 영상을 유포한 범죄자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이 사회에서,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 여성은 24시간 성범죄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이와 동시에 이에 대한 처벌이 온당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불만에 가득차 있다. 이건 상식적인 남성들, 혹은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 여성들도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다. 사회 전체적인 공감대가 그 정도 선에서 형성되어 있다면,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폭넓은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전략이 아닐까? 그래서 답답하다. 이 사회에는 크게 두 방향이 존재한다. 과거로 회귀하거나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는 방향과 앞으로 나아가거나 보다 공평한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 큰 방향에서 함께 가는 것이 맞다면,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양보하는 것도 작은 과실을 꾸준하게 성취하는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예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예의에 관한 것이다. 성범죄로 고소를 당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에게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냐는 주장은, 그 자체로 예의가 없는 것이다. 망자가 한 평생을 쓰레기처럼 살아왔다면 그 층위가 달라질 수 있겠으나, 현재 많은 조문객이 줄을 지어 문상하는 풍경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계몽으로 이룰 수 없는 수준의 성취가 있는데, 그것은 시민들의 집단적인 행동의 결과가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지닐 때 또렷하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것에 승복하라고 배웠다. 특정 가치관을 강요하는 일부 세력의 계몽주의는 대다수 상식적인 대중의 판단 과정에서 약간의 두통을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큰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예의를 갖추었으면 좋겠다. 고소인과 그가 제기한 문제와 상관 없는, 그 전까지의 망자의 삶에 대한 예의다. 만약 고소인과 그가 주장한 바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다면, 망자의 삶에 충분한 예의를 갖춘 후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늦지 않다. 아마도 이 사회는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그냥 덮고 넘어가자, 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가는 이들일텐데, 아마도 그들 역시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활용하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이야기할 가능성은 낮다. 조금 늦게 이야기하는 것이 고소인을 크게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고소인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충분히 합리적이라면 말이다. 그래봤자 5일이다.

재난기본소득의 명과 암

2월 초부터 병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2월 중순부터는 아내가 입원해있던 대학병원이 지역 내 바이러스 확진자들이 입원하여 치료받는 병원으로 지정되어 동거(?)를 시작했고, 아내를 보기 위해 병원에 출입할 때마다 몇겹의 검사를 통과해야 했다. 의료진은 항상 과로 상태에 힘들어했고, 마스크는 병원 내에서도 동이 나버려 가장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위험에 노출되기 일쑤였다.

아마 한국의 대부분의 공간에서 비슷한 수준의 혼란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사회적 혼란만큼 두려운 것이 소비위축에 따른 경기침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본격화되면서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여 발생시키는 경제활동의 규모도 큰 폭으로 위축될 것이 자명해보였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상거래로 플랫폼이 패러다임이 완전히 이동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도 많았다. 대유행으로 정의된 전염병은 일종의 전쟁과 비슷한 경제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대규모로 사망하고, 대부분의 시민들을 집 안에 숨어있게 만든다. 경제활동이 위축된 만큼 수입의 크기도 줄어들 것이다. 줄어든 수입만큼 돈을 아껴 사용할 것이고, 신용의 흐름이 감소할수록 새로운 생산활동을 위한 자극이 이루어지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전염병의 유행이 끝나면 그동안 억눌려 있던 잠재수요가 일거에 폭발하여 소비활동이 다시 활발해질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처럼 국가별, 대륙별로 유행병의 발병시기가 상이할 경우 경제구조의 글로벌화가 꽤 진행된 상황에서 국제 교역량이 일순간에 회복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그리 날카로운 분석은 아닐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경제학자와 정치인들이 재난기본소득 아이디어를 들고 나와 이에 대한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기본소득(basic income)의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개인별, 혹은 가구별로 일정한 현금을 동등하게 지원하자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공적 마스크를 저렴한 가격에 개인별로 동등하게 분배하는 정책이 구호물품을 현물화하여 공급하는 것이라면, 재난기본소득은 이보다 조금 더 경제학적으로 유연한 방식으로 구호물품을 공급하는 개념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매리트가 존재한다. 하나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시키는 보조금 정책이라는 점이다. 현물을 공급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을 크게 제약하기 때문에 효용을 극대화한다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현금을 있는 그대로 주면, 수혜자는 개인의 기호를 최대한 고려하여 가장 사고 싶어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 개인의 효용을 정확하게 기본소득만큼 향상시킬 수 있으므로 질병의 대유행으로 인해 위축된 경제활동을 일시적으로 소생시키는 유용한 구호수단이라고 이야기할만 하다. 두번째 매리트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통화정책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임시처방전이라는 점이다. 통화정책은 화폐의 가치를 국가기관이 인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경제 전체에 순환하는 신용의 총량을 조절하는 거시경제 정책도구다. 하지만 이자율의 조정으로부터 개인의 소득변화까지 넘어오는 과정이 상당히 길고 복잡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시중에 존재하는 화폐의 가치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 효과를 세부적으로 예측하기 힘들 뿐 아니라 특정 부문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을 방지하기도 힘들다. 기본소득의 지급은 경제 전체의 신용증가라는 목적은 동일하게 달성하면서 세부 분야에 그 효과를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정책의 전이과정이 매우 빠르고 단순하다는 장점을 지닌다. 기본소득을 지급받는 즉시 수혜자는 그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재난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이유는 재원 마련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시장경제의 기본바탕을 흔들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난기본소득은 재정정책의 일부로, 국민이 납부하는 세금에 기반하여 형성될 것인데, 이 정책을 시행한 후 발생하는 효과, 증 재정승수(fiscal multiplier)를 측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더 나아가 이 정책을 시행할 경우 정부는 그 즉시 재정적자 상태에 빠질 것이며 이에 대한 추가적인 재원마련 방안도 마땅치 않기 때문에 이 일시적인 정책은 항구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큰 한계를 지닌다. 재난이 언제 종식될지 알 수 없고 사상 초유의 기본소득을 지급함으로써 유발시키는 경제적 효과를 예측하는 것도 쉽지 않다면, 정책당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큰 불확실성을 안고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셈이다. 더 나아가, 경제활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서의 수입이 아니라 국가적 재난이라는 외부효과로 인해 공짜로 받게 되는 재난기본소득은 국가 차원에서 시장경제의 건전성을 해칠 수 있는 위험요소로 인식될 수 있다. 가뜩이나 부동산에 대한 투자 집중과 불로소득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전국민에게 불로소득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은 정책가 입장에서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이런 저런 고민거리가 많겠지만, 나는 재난기본소득에 찬성하는 편이다. 앞서 말했듯 신용의 증가와 그로 인한 가계소비 진작을 목표로 한다면, 재난기본소득은 통화정책보다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는 ‘응급처치’에 가깝다. 정책당국이 현재의 경제상황을 그 정도로 위급하다고 판단한다면 여러 부작용이 있더라도 응급처치를 하는 것이 맞다. 이번에 아내의 입원과 출산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깨달은 점은 그 어떤 좋은 약도, 수술도, 혹은 치료법도 반드시 하나 이상의 부작용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실하다면 그 약을 써야 한다. 상충관계(trade-off)는 모든 경제적 판단에 존재하고,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지 판단하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신중함이 능사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이 거시경제정책을 만지는 위정자가 가져야 하는 책임감이다.

아빠가 된다는 것

지난 2월 4일, 아내가 대학병원 산부인과에 입원했다. 임신 29주차에서 30주차로 막 넘어가던 시점이었다. 아이를 가진 것을 확인한 이후 시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여성병원으로 진료를 다녔는데, 쌍둥이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워낙 변수가 많고 다태아 임신 그 자체로 고위험군으로 분류되기에 혹시나 모를 위험에 신속히 대비하기 위해 ‘차트나 만들자’는 생각으로 대학병원을 방문했다 덜컥 “붙잡혀버린” 것이다. 담당교수는 은퇴를 몇 년 남겨두지 않은 베테랑 여성 의사였다. 많은 환자들로부터 “친정 어머니같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환자에게 가깝게 다가가지만 진단과 처방은 대단히 냉정하고 보수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주 낮은 가능성일지라도 발생확률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모든 위험에 예비적으로 대응했다. 의사는 “환자의 상태는 환자가 가장 잘 안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되내일 정도로 환자와의 소통을 중요시했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서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며 가장 안전한 길로 우리를 유도했다. 약물을 이용하여 최대한 주수를 오래 끌어보되, 경부가 약화되어 양수파열이 발생할 가능성이 발견될 시 신속하게 수술을 진행한다는 것이 우리가 택한 계획이었다. 이동 에너지 레벨이 높은 아내는 한 평 남짓한 공동병실에갇혀 한뼘 정도 되는 창문으로 하늘을 그리워하는 생활을 다행히도 잘 버텨 주었고, 나는 매일 아내가 있는 중환자실로 출퇴근하며 아내의 노력을 뒷바라지했다. 덕분에 병원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마일리지를 많이 쌓을 수 있어 조금 뿌듯했고 병원 근처 독립서점에서 가끔 시간을 죽일 수 있어 좋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병원 내 방역 절차가 까다로워짐과 함께 나의 예민함도 덩달아 조금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2월 27일.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는 날, 병원에 있는 아내와 원격으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크고 작은 이사준비를 치루어온 과정에 큰 마침표가 하나 찍히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른 아침,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막 작업을 시작하던 순간 아내로부터 수술을 바로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 아빠가 와주지 않고 혼자 이사를 마무리하려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무사히 잔금을 정산하고 새 집에 짐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순간 부모에게 남은 모든 책임을 떠 안기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경부가 많이 약해져 언제 양수파열이 발생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당장 이번 주말을 넘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의사소견과 본인은 아직 컨디션이 괜찮으니 조금이라도 더 버텨보고 싶다는 아내의 의견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면담실에서 아내를 배제한 채 담당교수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고, 우리는 다음날 바로 수술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34주를 채우지 못하였기에 아기들의 폐기능이 정상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하루종일 나의 역할을 대신해 준 부모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우리는 엄마가 급하게 끓인 떡국을 나누어 먹고 빠르게 헤어졌다. 아빠는 본인의 심장시술을 출산 예정이 이후인 4월 중순으로 미룬 터였다. 간절한 마음만 나눈채 헤어졌고, 나는 수술 준비물을 간단히 챙겨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담당교수는 우리를 두번째 타임에 배치했는데, 이는 친정 어머니가 받아온 “용하다는 시각”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천주교 신자였지만 사주 등을 믿는 부모의 심정을 배척하고 싶지 않았고, 그것을 효도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과학의 최전선에 서있는 담당교수도 최대한의 배려를 베풀어주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아내를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인큐베이터 하나가 간호사 세 명에 둘러싸여 급하게 신생아 중환자실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1초도 채 되지 않는 순간 나를 스쳐지나갔는데, 본능적으로 ‘저 친구인가보다’ 라는 느낌을 받았다. 몇 분 후 두번째 인큐베이터도 빠르게 나를 스쳐지나갔다. 탯줄을 자를 틈도, 사진을 찍을 틈도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임을 직감했다. 이후 소아과 주치의로부터 간단히 아기들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병실로 이동하니 회복실에서 막 나온 아내가 누워있었다. 아내도 아기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드라마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그 ‘인위적인’ 아기의 울음소리가 너무 비현실적이었다는 말도 했다. 그때부터 4박 5일 간 침상에서의 회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마취가 풀리면서 고통이 시작되었고 밑에서는 오로가 쏟아져 나왔다. 한달여 가까운 기간동안 입원생활을 지속한 아내의 팔에는 더이상 주사바늘이 들어갈 곳이 없었고 파란 멍이 가득했다. 소변줄을 차고 누워 무통주사 버튼을 눌러대는 아내 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침대 높이를 조절하거나 패드를 갈아주는 일, 물을 입에 떠넘겨 주는 일 정도 밖에는 없었다. 양가 부모와 가족에게 소식을 전달하고, 간병인 침대에서 새우잠을 자며 아내가 부탁하는 일을 처리했다. 커튼으로 닫혀진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우리가 사는 세계였고, 그곳에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침상에서 일어나면 아기들을 보러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1분 먼저 나온 남자 아기의 폐기능이 완전치 않아 몇가지 약물을 투여했고 커다란 호흡 보조장치가 2kg을 갓 넘긴 아이의 작은 얼굴에 달렸다. 이런저런 보조장치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아기의 사진을 간호사로부터 전달받아 본 후 가슴이 답답해졌다. 신생아중환자실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급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였고 그만큼 잔실수도 가끔 눈에 띄었는데, 여자 아기의 성별이 바뀌어 기록되는 해프닝은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를 차지했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아이들을 담당하고 있는 담당교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나이 어린 주치의만이 가끔 전화를 걸어 상태를 전달해줄 뿐이다. 남자 아기는 태어난 지 이틀 뒤 보조장치를 떼고 완전한 자가호흡을 시작했다. 사흘째부터 어미가 짜낸 초유가 미숙아분유와 섞여 삽관된 호스를 타고 아이들에게 먹여지기 시작하였고, 아내는 본격적인 젖몸살이 시작됨을 느꼈다. 퇴원 하루 전, 아직 아기들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산부인과 수간호사의 ‘전화 찬스’에 힘입어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보다 먼저 들어간 아내는 보는 순간부터 펑펑 울었다고 한다. 나는 울지 않았다. 그저 잘 살아 있음에, 숨을 쉬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임신 순간부터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왔다.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하며 출산을 준비해왔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다 울어도 나는 마지막까지 울면 안되는 존재였다. 다행히 그 최악의 상황은 아직까지 발생하지 않았고, 조금 더 큰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신생아중환자실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2월 내내 쉬지 않고 달려와 육체적으로는 매우 피로한 상태였는데, 아이들의 모습을 실제로 보는 순간 몸 속 깊숙한 곳에서 한없는 기쁨이 솟아져 나옴을 느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우리는 새로 이사한 집에 함께 있다. 퇴원 후 다음날이다. 아기들은 아직 병원 신생아중환자실에 머물며 의료진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퇴원 당일에는 아이들과 함께 퇴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주는 쓸쓸함과 아이들을 직접 본 후 느낀 황홀함이 교차하는 멜랑꼴리한 기분에 휩싸여 집으로 향했다. 기차역에서 친정 어머니를 태워 세 명이 함께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은 이사 직후 원시적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넘치는 에너지를 고스란히 물려준 친정 어머니는 그 에너지 레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이런 친정 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집은 빠르게 ‘사람이 사는 모양’으로 바뀌어갔다. 아내가 조리원을 포기하고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기로 결정한 것도 친정 어머니의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국을 휩쓴 바이러스로 인해 한달을 꽉 채워가며 입원과 수술을 경험한 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어미의 마음이 간절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삼시 세끼를 미역국만 먹어도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우리는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다. 그리고 병원에 남아 있는 아기들은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리는 병원 의료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들이 제시하는 방향대로 아이들의 치료를 맡길 것이다. 건강히 몸을 회복학 위해 노력하는 아내와 함께 아이들이 퇴원하는 그 날까지 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할 것이다.

나의 삶을 돌이켜보면, ‘나는 왜 이 엄마와 이 아빠에게서 태어났는가’, 혹은 ‘나의 엄마와 아빠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 시점부터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내게 그 답을 결코 직접적으로 제시해주지는 않았다. 나를 낳았을 때, 내가 지금 그러한 것처럼, 그들도 미숙한, 덜 자란 어른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와 함께 성장했다. 울고 보채는 나를 어르고 달래며, 사고를 치고 돌아온 나를 감싸안거나 혼내며, 그들도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되고도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지난 어떤 순간부터, 나는 부모를 더이상 미워하지 않게 되었고 더이상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해하지도 않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 시점이 내 부모가 완전한 어른이 된 순간이라고 어렴풋하게 짐작할 뿐이다. 이제 나의 부모는 병들고 늙어 약해진 육체를 가진 노인이 되었다. 약해진 육체는 정신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자식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아이가 자라나듯 노인이 늙어가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보여주는 것처럼 노인이 자신을 잃어가는 것도 인생의 한 순환고리인 것이다. 그렇게 인생의 황혼기에 다다른 부모는 나에게 아이를 낳을 힘을 주었고, 이제 나는 아이들과 함께 어른이 되기 위해 성장해야 한다.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 나는 어떤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 그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느낀다. 인생의 새로운 숙제가 주어졌고, 아이들에게서 성장의 뿌리를 발견한다. 그 때 쯤이면 나의 부모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트렌스젠더 여성과 여자대학교

지난 12월 조금 특별한 경험을 한 일이 최근 다시 떠올랐다. 겨울방학이 시작된 직후였던 크리스마스 즈음, 내가 속한 단과대학에서 태국의 학생들을 학교로 초청하여 몇몇 교수들이 특강 형식으로 짤막한 강의를 이어나갔는데 나도 용돈을 벌어보자는 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세시간 남짓 진행된 그 특강이 특별했던 이유는 다른 문화권에서 온 학생들의 수강태도가 재미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반응이 폭발적인데 전부 다 잔다..?) 무엇보다 난생처음 트랜스젠더 여성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슨 촌스러운 말이냐 하겠지만, 나는 그 때까지 단 한번도 트렌스젠더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개인의 의지로 성을 전환한 사람과 대화할 때 그 사람이 어떤 눈빛과 표정으로, 혹은 어떤 몸짓으로 대화에 임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딱히 그런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태국이 트렌스젠더 문화에 상당히 관대한 편이고 관련 의료기술도 많이 발달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설마 내 수업시간에 그 중 하나를 만나리라는 기대는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학생은 맨 앞줄에 앉아 내 강의를 경청했고,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을 대표해 나에게 기념품을 선물해주었다. 잠시나마 그녀와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든 느낌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 학생은 분명 남성은 아니었다. 본인이 자신을 남성과 여성 중 무엇으로 규정하고 있는지까지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행동은 영락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외형적으로 드러난 여성적인 모습만으로 거칠게 그녀를 사회통념상 제시되는 여성의 카테고리에 묶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과연 남성일까, 여성일까? 성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이 많이 발달한 일부 선진국에서는 고민도 하지 않고 ‘제 3의 성’이라는 모범답안을 제시하겠지만, 이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진행되지 못한 우리나라같은 경우에는 답안지가 아직 두 개밖에 없다.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남성, 혹은 스스로의 의지로 인해 선택한 여성. 개인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내릴 것이고, 사회는 또 이 사람을 어떻게 정의내릴 것인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문제다.

최근 한 트렌스젠더 여성이 숙명여대에 합격한 사실이 언론에 크게 보도된 후, 숙명여대 학생들 중 일부(언론은 그들을 “레디컬 페미니즘 동호회” 정도로 규정했다)가 이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내었고, 동시에 일부 동문들을 중심으로는 포용하자는 의견이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숙명여대 커뮤니티는 이 트렌스젠더를 놓고 둘로 갈라진 모양새다. 우선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성전환수술 후 법적으로 여성임을 인정받았고, 주민등록번호도 바뀌었다. 외형적으로나 법적으로 모두 여성이다. 때문에 여성만이 허락되는 여대에 입학할 수 있는 법적지위는 확보한 셈이다. 다만, 이 트렌스젠더 여성의 여대 입학을 반대하는 쪽은 이 여성이 ‘진짜 여성’ 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염색체상으로 남성이기 때문에 “겉모습”을 바꾸는 것 만으로는 여성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논리다. 때문에 이들은 트렌스젠더 여성의 여대 입학을 여성의 공간을 침해하는 행위로 바라본다. 여성의 공간은 염색체상으로 여성인 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이 상당히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색채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우선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성을 본인의 의지에 의해 선택한 성보다 우선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보수적이며, 개신교 사회가 동성애 및 성적소수자를 바라보는 시각과 상당히 많은 범위에서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치즘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논리도 이와 유사했다. 근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으며 개인의 자유의지는 그 앞에서 충분히 무기력해질 수 있다는 논리는 전체주의적 사고로 흐를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들의 논리에는 현재 이슈의 대상인 이 트렌스젠더 여성이 자신의 성별을 무엇으로 정의내리는지에 대한 고려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이 여성이 자신을 여전히 남성으로 보고 있는지, 단순히 여성의 신체를 갖고 싶어한 것인지, 혹은 완전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는지에 대한 숙고가 전혀 완료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결여 속에 이 여성을 생물학적 남성으로 규정하며 입학을 반대하고 있는데, 이는 개인에 대한 대단히 높은 수준의 폭력이다. 동성애자를 정신병으로 규정하고 치료의 대상으로 삼은 어떤 개신교회, “여자는 집에서 집안일이나 해야지” 라며 부엌에서 나오지 못하게 한 어떤 아버지의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이 주장이 더 참담한 것은, 한국사회에서 소수자이며 약자로 태어나 오랜 투쟁 끝에 이제 막 인정받기 시작한 여성들이 이와 같은 차별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오랜 기간동안 차별받고 억압받아 왔다. 이제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마당에, 여성보다 더 소수자이며 더 약자인 트렌스젠더에 대해 폭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이러한 행위는 과연 여성주의를 계속 지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로까지 생각을 번지게 만든다. 래디컬 페미니즘 세력이 권력을 잡고 주류가 된다면, 아마도 이들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타자를 억압할 것인가. 이번 이슈를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상당히 큰 패착이다.

포용과 이해, 양보와 희생은 현대사회를 그나마 유지시키는 마지막 희망이다. 소수자는 서로 연대해야 하고, 주류는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고 이들과 공유해야 한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위해 함께 싸워야 하고, 남성은 여성과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기 위해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사지 멀쩡하게 태어난 사람과 장애인이 동등한 수준의 사회적 활동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장애인이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공부하고 이해해야 한다. 소수인종이 노골적인 냉소와 차별에 시달릴 때 이들을 똑같은 ‘한국 시민’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 약자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 중산층 학자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뒤 전임교원으로 취직에 성공한,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기득권에 속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아왔다. 다들 나처럼 그렇게 평탄하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여성이 밤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알지 못했다. 장애인 친구를 사귀기 전까지 그들이 버스를 한번 타고 내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생각할 겨를도 없없다. 동성애자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그들이 앓고 있던 깊은 마음의 병을 헤아릴 수 없었다. 삼촌이 조현병에 시달리다 비극적으로 죽기 전까지, 조현병 환자는 피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봤다.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의 어머니가 필리핀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다문화 가정은 미디어에나 나오는 먼나라 이야기처럼 생각했다. 나는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전까지 제대로 된 시민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누리는 이 평안하고 안정적인 삶이, 그러한 것을 박탈당한 많은 이들의 고통을 짓밟고 올라섰기에 가능한 결과임을 깨닫는데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지금도 배움과 실천이 많이 부족하며, 앞으로 더많이 배우고 느끼고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나의 눈에, 소수자가 다른 소수자를 옳지 않다고 규정하고, 그래서 나의 이익을 나누지 못하겠다고 소리치며 밖으로 내모는 행위는 안쓰러움을 넘어서는 서글퍼보이기까지 하다. 어찌 그 작은 파이 하나조차 나누어 먹지 못해 싸우는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

에바 오너 | 비크람: 요가 구루의 두 얼굴

어렸을 때부터 몸이 그리 유연하지 못한 편이었다. “유연하지 못했다”라는 표현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자기보호적인 성격이 강한데, 일반적으로 나와 같은 몸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더럽게 뻣뻣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잘 구부러지지 않는 몸은 젊은 시기에는 약간의 불편함 만을 수반할 뿐이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건강, 혹은 목숨과 직결되는 위험을 가져온다. 탄력성과 유연성이 결여된 내 몸을 잘 아는 지인들은 요가를 권하는데, 마흔이 다 되어가는 아직까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게으름이 가장 큰 적이겠지만, 아마도 언젠가는 반드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몇 년 전 한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핫 요가’라는 것이 있단다. 40도 가까운 고온에서 땀을 잔뜩 흘리며 진행하는 요가인데 효과가 좋아서인지 꽤나 많은 이들이 핫 요가에 빠졌다. 이와 같은 요가 스타일을 흔히 ‘비크람 요가’라고 한다는데, 26개의 동작과 2개의 호흡법으로 구성된 이 비크람 요가를 창시했다고 알려진 비크람 차우다리(Bikram Choudhary)는 인도 출신으로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요기, 혹은 요가 구루로 알려져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비크람: 요가 구루의 두 얼굴](원제는 [Bikram: Yogi, Guru, Pradator])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요가 사업가가 교육과정에서 수많은 성추행과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피해자들이 직접 인터뷰이로 등장해 당시 상황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이와 관련된 소송과정에서 비크람이 행한 폭력적이고 도발적인 행동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심지어 재판 과정에서 비크람이 창시했다고 알려진 ‘비크람 요가’가 사실은 그의 스승이 창시한 것이고, 비크람은 그것을 그대로 베껴 사용한 뒤 마치 자기가 창시한 것인양 포장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게 되면서 비크람 차우다리는 미국 내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닉슨 대통령을 치료한 대가로 영주권을 선물받았다는 주장도 당연히 거짓이었으며, 정부에 파산신청을 한 후 그의 자녀들에게 선물한 고급 승용차는 캘리포니아 주정부 소유라는 황당한 거짓말을 재판정에서 뻔뻔하게 늘어놓아 배심원들로 하여금 허탈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결국 비크람의 성폭행건에 대해 조사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법률담당 부하직원이 제기한 소송에서 거액의 징벌적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은 비크람은 아내와 가장 이혼을 하여 재산을 은닉하고 배상금 지급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도피한다. 다큐멘터리는 지금도 비크람이 멕시코, 스페인 등에서 대규모의 요가 학원을 꾸리면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지난 몇십년 간 비크람은 상습적으로 여제자들을 성추행, 혹은 성폭행해왔고, 이 중 일부가 소를 제기하면서 궁지에 몰리자 미국 내 활동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도피했으며, 민사소송만이 진행되고 성폭행 건에 대한 형사소송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제송환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현재까지 미국 외 지역에서 활발하게 요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폐쇄적인 공간에서, 전문기술을 가진 권위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때 발생하는 슬픈 사건을 우리는 적지않게 목격해왔다. 최근에는 대학원생 제자에게 똥물을 먹인 교수도 있었다. 한국에서. 비크람 사건은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그나마 전세계에서 가장 시민의식이 발달했다는 미국인들조차 완전히 당해버렸다는 점에서 씁슬함의 정도가 조금 더 크게 다가온다. 계급과 권력이 폐쇄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은 개인의 현명함을 완전히 무용하게 만들어버린다. 시스템 디자인이 이와 같은 최악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향으로 공고하게 발달해야 하는 이유다.

임대형 | 윤희에게

한국의 대중문화예술산업에서 중년 여성의 서사를 찾기 힘든 것이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젊음에 대한 무분별한 추앙은 예전부터 오래 지속되어 왔다.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염색을 시도하는 중년의 남성만큼이나 머리를 길게 기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중년의 여성을 발견하는 것이 무척 쉬운 사회가 이 곳이지만, 여성이 젊음을 놓지 못하는 과정에는 강제된 측면이 많기 때문에 이 문제는 성별을 좀 분리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나 TV 등 대중매체에 중년의 남성이 노출되는 빈도, 혹은 작품의 서사에서 나이 지긋한 남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중년 여성의 그것과 감히 비할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잘생기지도 않고 젊음을 유지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태반인데, 여성의 경우는 이와 같은 중년으로의 자연스러운 이행이 쉽게 용인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이 적극적으로 소개된 이후 젊은 여성의 서사는 이제 어느정도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진 반면, ‘여성의 젊음’을 상실한 중년 이후 여성의 삶에 대한 묘사는 여전히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업소’때문이 아닐까 싶다. 획일화된 육체적 매력을 기준으로 여성을 ‘텐프로’, ‘쩜오’ 등의 등급으로 나누는 문화가 남성중심사회에 만연해 있고, 여성 역시 이 획일화된 미의 기준에 갇혀 버리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조금 푸석하더라도 흰 머리를 길게 기른 중년, 혹은 노년의 여성을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은 대중매체에 그러한 여성상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비정상적인 패턴이 세대를 거듭하며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윤희에게]는 이처럼 척박한 한국의 대중예술산업에서 보기 드문 중년 여성 서사를 그리고 있다. 심지어 퀴어 영화다. 독립영화이기 때문에 제한된 플랫폼에서만 소비된다는 점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이러한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그리고 그 결과물이 영화적으로 썩 괜찮다는 점에서 조금은 주의깊게 기억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윤희에게]의 주인공은 윤희라는 가난하고 못 배운 중년 여성이다. SK2의 모델로 오래 활동한 배우 김희애의 육체를 빌어 탄생한 인물이기에 ‘태초부터 아름다움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치명적인 비정상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어쨌든 영화 내 설정을 보자면 오빠를 뒷바라지하느라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어떠한 연유로 인해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오래 지속한 여자다. 한마디로 선택하지 않은 불행을 오랜 기간 견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이혼한 듯 보이는 그녀에게 유일한 삶의 의미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되려 하는 딸인데, 이 딸이 영화의 두 축을 이루는 윤희와 그녀의 옛사랑인 일본인 여성 준을 이어주는 오작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준은 윤희와 달리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의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에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는 고모, 귀여운 고양이와 함께 오타루 지역에서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다만 윤희처럼 준에게도 결여된 것이 있는데, 어머니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감추고 살았다는 부채의식과 그로 인해 어그러진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것이다. 어쨌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준은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상대인 윤희에게 편지를 쓰게 되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는 준의 고모와 윤희의 딸에 의해 잘 전달되어 윤희 모자의 갑작스러운 일본여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어쩌면 단순하다는 느낌마저 주는 직선적인 플롯이 영화적으로 풍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먼저 윤희, 준, 윤희의 딸, 준의 고모, 그리고 윤희 딸의 남자친구 등 몇 안되는 등장인물들이 다층적으로 잘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며, 둘째, 영화의 구성이 번잡스럽지 않고 차분하게 서사를 충실히 보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브라운관에서 정극을 오래 해온 김희애와 아이돌 출신으로 연기에 막 몸을 담근 김소혜가 한 프레임에 잡히는 씬이 많은데, 이 둘의 연기톤이 어긋나는 경우가 가끔 발견되어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배우들의 연기는 나무랄데가 없는 편이다. 들끓는 감정을 오랜 세월 억누르고 살아온 윤희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오히려 매우 절제된 분위기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 참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오타루라는 (윤희 입장에서) 이질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판타지적인 느낌이 노골적으로 스며나온다는 점도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가제가 [만월]이었다고 한다. 윤희와 준 모두 채워지지 않은 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곁에는 딸과 고모 등 연대가 가능한 가족이 있었지만, 결국 이 둘을 조금 더 완전하게 채워줄 수 있었던 상대는 서로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이 절절한 감정을 깔끔하게 표현하고 있다. 가끔은 너무 깨끗하고 모범적인 시선이라 아쉬운 순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던 영화였다.

셀린 시아마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어제 포털 사이트의 뉴스란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색깔의 기사들이 올라왔다. 군인을 직업으로 삼는 한 부사관이 상관의 허락을 구한 뒤 외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하고 복귀했는데 군에서는 이를 복무부적합으로 판단하여 강제전역시켰다는 기사와, 그러한 상부의 지시에 수긍할 수 없어 본인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한 뒤 기자회견을 통해 부당함을 토로한 당사자에 대한 기사였다. 댓글은 예상한대로 그 부사관이 지나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성전환수술은 “신체훼손”에 해당하니 계약파기가 정당하다는 논리부터 “당신의 인권만큼 당신 동료들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뜬금없는 인권동등론까지 다양한 이유를 들어 남군에서 여군으로의 복무전환신청 기각에 찬성하는 의견이 이어졌다. 대체 남성의 성기가 국경을 방위하는데 있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혹은 남성의 성기를 포기하였다고 하여 함께 일하는 동료가 어떤 혐오감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한국사회에 쌓아올려진 단단한 벽의 거친 질감을 오랜만에 손으로 쓰다듬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쓸쓸해졌다.

한국사회가 문화적 갈라파고스섬으로 자신을 정의내린지 꽤 오랜 기간이 흐른 것 같다. 서울 시내에는 문신한 오빠들이 운영하는 힙한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지만 문 앞에는 어린아이를 받지 않는다거나 반려동물은 함께 할 수 없다는 문구가 당당히 걸려있는 경우를 많이 목격한다. 지하철 안에서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고 홍카콜라 유튜브 방송을 시청하는 할아버지는 무사히 그 날 하루를 마감할 수 있지만, 길거리에서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여성 연인들은 단단히 각오하고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2018년 WHO에서 발표한 인구 10만명 당 자살인구 비율 추정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여성 자살율은 15.4명으로 세계 2위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보다 여성이 높은 확률로 자살하는 나라는 레소토(Lesotho) 왕국이 유일한데, 1인당 GDP가 2천달러를 조금 넘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둘러싸인 가난한 국가다. 참고로 이곳의 인구 10만명 당 강간발생률은 90명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나라를 제외하고는 한국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여성이 더 자주 발생하는 나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면서 나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떠올렸는데, 19세기 유럽사회의 보수성과 21세기(심지어 원더키디가 나온다는 2020년이다) 한국사회의 보수성을 병렬적으로 연결시킨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이 부끄러움은 한국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부채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거부할 수 없고 청산해야만 하는 그런 성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실로 완벽한 영화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장면이 컷 단위로 완전하게 설계되어 있고, 카메라와 세트, 음악과 배우는 최선을 다해 감독이 설계한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배우의 표정 하나하나부터 세트의 구석진 곳, 거친 파도와 같은 자연환경까지 화면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영화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상징들이 침착하게 하나로 모여 엔딩씬의 엘로이즈(아델 에넬 扮)의 얼굴에 집중되는 순간 이 영화의 세계는 비로소 완성된다. 이 영화를 여성에 대한 억압적인 시선이 팽배해 있던 시대적 배경 하에 사랑을 나눈 여성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받아들인다면 조금 섭섭한 감이 있다. 영화는 그보다 훨씬 깊고 다양한 층위를 관객과 함께 나누고 싶어한다. 우선 형식적인 측면에서 남성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지금까지 영화 등 각종 예술장르에 관습적으로 내려져온 남성 중심적 시각에 도전하고 있다. 카메라의 시선은 등장인물 중 누군가의 시선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데, 영화의 처음과 끝에 도구적으로만 등장하는 남성 인물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건 여성의 주체성 관점에서 봐도 꽤 중요한 시도다. 기존 사회적 문법에 대한 형식적 도전은 억압적 기제(어머니)가 부재한 가운데 행해진 귀족과 하녀 간 평등한 관계 형성, 오르페우스 신화의 전복,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아카펠라 합창 등 서사구조 내에서의 다양한 변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적 구조와 형식, 서사와 이미지가 모두 하나의 통일된 주제의식 안에서 조화롭게 움직이는데, 그 모든 과정이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매우 독창적이기까지 하다.

개인적으로 다르덴 형제의 근작 [언노운 걸]에서 매우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주어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던 아델 에넬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이 배우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하여 역시 걸출한 연기를 선보인 노에미 메를랑을 가끔 아마추어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기운을 뽐낸다. 영화 속에서 오랫동안 쌓아올린 감정을 폭발시키는 엔딩씬은 배우의 연기가 조금만 틀어져도 굉장히 유치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는데 그 복잡한 감정까지 성실하고 치밀하게 표현해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저 감탄만 나왔다. 클레르 마통의 카메라도 매우 인상적이다. 이 카메라 감독이 찍은 또다른 영화 [애틀랜틱스]를 넷플릭스를 통해 접할 수 있다 하니 얼른 봐야겠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느껴진다.

다시 이 감상문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국사회에서 이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해보는 것은 이 사회의 폐쇄성을 고려할 때 분명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해외 언론이 한국의 문화적 보수성에 놀라워하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나라 눈치볼 필요 없이, 현재 한국사회 안에서 용인되는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정도가 너무 얄팍하지는 않나 하는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면, 이 아름다운 영화가 하나의 계기 정도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타오르는” 감정이 박제된 초상화 안에 갇혀 있음에도 훨훨 불타고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감정, 한국인들이 참 좋아하는 그 감정, 술 마시고 감정적이 되면 얼굴을 뭉개놓아도 자궁을 부셔놓아도 정상참작이 되어 형량도 줄어든다는 신비한 그 감정, 사회적으로 같은 인간 취급 못받고 소외당하는 소수자들에게도 그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보고 좀 알아봐 주었으면 한다. 아무리 억압하고 가두어놓아도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접어놓은 ’28쪽’은 영원히 기억되리라는 것도 함께 깨달았으면 좋겠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하면 트렌스젠더 군인을 강제전역시켰다는 그 뉴스의 댓글란에 글을 쓰고 좋아요를 누른 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사회에 하는 말이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페르난두 메이렐리스 | 두 교황

가장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가장 나중에 먹는 타입으로 살아왔다. 요즘에는 취향이 바뀌었다. 대부분의 식사를 아내와 함께 하다보니 맛있는 것을 뒤로 미루어두면 큰 일이 날 수도 있어 요즘에는 맛있어 보이는 것을 최대한 빨리 먹는 편이다. 무척 보고 싶은 영화는 요즘에도 조금 뒤로 미루어 두는 편이다. 스스로를 조바심내게 만드는 타입은 아닌데, 그 영화를 볼만한 더 나은 타이밍이 왠지 있을 것만 같아서다.

[두 교황]도 몇 주는 묵혀둔 것 같다. 넷플릭스에 최초 공개되기 몇 주 전부터 새로 나온 영화를 알려주는 기능을 켜두고 기다렸지만, 막상 영화가 공개된 뒤에는 차일피일 미루며 영화를 보지 않았다. 이 영화를 본 지인들이 괜찮았다 이야기해줄 때마다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고, 어서 빨리 보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했지만, 아내와 함께 가장 편한 상태에서 보고 싶어 미루고 미루는 과정을 반복하다 오늘에야 보았다. 몸이 무거워 밖에 잘 나가지 못해 답답해하던 아내를 데리고 천안에 가서 맛있는 보리굴비와 간장게장을 먹고 와서였기 때문일까, 오늘은 괜히 이 영화가 보고 싶었다.

[두 교황]은 [시티 오브 갓]으로 유명한 페르난두 메이릴리스 감독의 신작이다. [시티 오브 갓]이 나온지 벌써 15년 쯤 되었으니, 그동안 대표작을 갱신하지 못한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약간 빈약해보여 걱정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독의 영향력이 그리 크게 두드러지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작업에 참여한 앤써니 맥카튼(Anthony McCarten)의 촘촘한 대사들과 그 대사들을 완벽하게 빚어낸 두 배우, 조너선 프라이스(Jonathan Pryce)와 앤서니 홉킨스(Anthony Hopkins)의 연기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다. 실로 이 영화는 프라이스와 홉킨스의 연기에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 두 대배우는 그 무거운 짐을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으며 훌륭한 앙상블을 선보인다. 오히려 영화는 초반부 교황 베네딕도 16세와 주교 시절의 프린치스코 교황이 별장에서 처음 만나자마자 벌이는 대단한 설전에서의 팽팽한 긴장감을 제외하면 상당히 평이하게 흘러가는 편이다. 4:3 프레임에 흑백으로 처리되는 과거 회상 장면은 조금 진부하며, 중간중간 실제 녹픽션 화면이 삽입되는 것은 메이렐리스가 [시티 오브 갓]에서 활용했던 올드한 방식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독재 정권과의 관계에 대한 묘사는 고해성사라는 형식을 차용하여 지나치게 미화되어 표현된 듯 보인다. 마스터피스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구성의 영화를 살리는 것은 앞서 설명했듯 오로지 이 두 배우의 연기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연기란 것이 너무나 뛰어난 나머지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가 보편적으로 교황에게 느끼는 어떤 감정 – ‘성스럽다’라고 표현해도 될런지 모르겠다 –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세심한 대사 처리와 표정, 심지어 뒷모습만으로도 이 두 배우는 12억의 신자를 책임지는 리더로서 짖눌린 두 어깨의 무게감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교황의 고뇌와 보수적인 종교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 사이의 충돌 등을, 굳이 신자가 아니어도 한번쯤 생각하고 공감하게 만든다. 실로 대단한 연기를 본 것 같다.

2019년 정리 및 2020년 목표

2019년이 시작되면서 가졌던 목표는 세 개 정도였다.

  • 50권의 책을 읽고 50편의 영화를 보고 50장의 음반을 듣는다.
  • 아이를 갖는다.
  • 세 편의 논문을 게재한다.

대전-세종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부산스러운 아침과 피곤한 저녁 등 서울이 보통의 우리에게 안겨주는 무게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그렇게 주어진 여유를 문화생활에 조금 더 쏟고 싶었다. 1년이 52주이니 일주일에 책 한권, 영화 한편, 음반 한장 정도를 즐기는 것은 가능하지 않나 하는 ‘현실적인’ 목표도 설정해 보았고. 이 블로그에 남겨진 기록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목표를 썩 성공적으로 달성하진 못했다. 총 32장의 음반, 36편의 영화, 24권의 책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물론 기록으로 남기진 않았지만 학교를 오고가며 들었던 음반은 이보다 훨씬 많고, 드라마와 TV쇼까지 포함하면 36편보다 훨씬 더 많은 작품을 보았으며, 논문까지 포함하면 24권보다 훨씬 더 많은 글을 읽었다, 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ㅠ 궁색한 변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세 편의 논문도 게재하지 못했다. 한 편만 올해 발표되었고, 올해 게재 확정되었으나 내가 알지 못하는 학회지 내부적인 이유로 인해 내년으로 발표가 미루어진 논문이 한 편 있을 뿐이다. 학자로서 부끄러운 성적표다. 유일하게 달성한 목표는 임신인데, 한 명도 아니고 쌍둥이를 임신했으니 이 목표 만큼은 초과달성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게 출산해야 확실히 성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2020년에도 목표를 설정해본다. 사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우리의 품에 안겨 건강히 자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요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개인적인 목표를 상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늘 기분 좋은 긴장감을 선사하니, 새해 첫날 이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 2편의 ‘무거운’ 논문과 2편의 ‘가벼운’ 논문을 쓴다. 논문 투고 프로세스는 신의 뜻에 맡기기로.
  • 건강한 2명의 아이를 맞이하여 건강하게 키운다. 수면의 질은 신의 뜻에 맡기기로.
  • 2019년보다 조금 더 많은 책을 읽는다.

2020년은 확실히 잠을 적게 잘 것 같다. 그래도 좋으니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노아 바움백 | 결혼 이야기

노아 바움백 감독을 ‘작가’ 반열에 올리는 영화팬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프랜시스 하]로 화려하게 복귀하기 전까지는 웨스 앤더슨과의 협업으로 더 많이 알려졌고, [프랜시스 하] 이후 내놓은 작품들도 기대에 많이 못미쳤기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았을까, 하는 점이 사실상 내가 그에 대해 가진 거의 유일한 궁금증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올해 나온 [결혼 이야기]는 그의 영화 커리어에 하나의 전기로 기록될만하다. 정식 개봉 전부터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손꼽혔고, 두 주연 배우의 호연 만큼이나 감독의 치밀한 조립능력과 치열한 시선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영화는 매우 뛰어나다. 과거 보아왔던 노아 바움백의 영화들과 그 무게감에서 차원을 달리 할 뿐 아니라 영화의 ‘결’도 전작들과 살짝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각본이 갖는 무게감이 전작들과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상당히 일찍 캐스팅된 두 주연배우, 그리고 또 다른 여성작가와 함께 각본을 함께 구성했다고 하는데, 이 덕분에 과거 바움백 영화들이 고질적으로 드러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문제에서 탈피한 것처럼 보인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류승완 감독의 영화 중 거의 유일하게 서사라는 형식을 가진 [부당거래]가 류감독의 손을 거치지 않은 각본 덕분에 탄생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또다른 이유라면 바움백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인 바움백은 이혼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출신의 그레타 거윅과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본인의 이야기이기에 조금 더 깊은 수준에서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노아 바움백은 이 영화를 통해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게 되겠지만,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이 작품 이후 바움백의 필모그래피가 엄청 화려하고 멋질 것이라는 기대는 크게 갖지 않게 된다. 이 영화는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라는 두 걸출한 배우가 바움백의 디렉팅과 만나 환상의 합을 보여주는 와중에 탄생한, 행운과도 같은 작품이다.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그녀는 [어벤저스] 시리즈 등으로 소모된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매우 뛰어난 연기파 배우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스스로 증명해낸다. 그동안 헐리우드 팝콘 무비에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쉽게 발견하기 힘들었던 복잡한 내면연기를 영화 내내 보여주는데, 한 배우의 절정을 목격한 느낌이 들어 감사한 마음마저 생겼다. 아마도 바움백이 후세에 칭송을 받는다면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좋은 배우의 대표 영화를 연출했다, 라는 이유가 반드시 따라올 것이다. 아담 드라이버는 요즘 상당히 자주 접하게 되는 배우인데, 그만큼 작품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고 배우로서의 역량도 최고조에 다다른 듯한 인상도 받지만, 이 영화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연기를 했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패터슨]에서의 아담 드라이버가 훨씬 좋았다. 다만 극중 찰리의 LA 임시 거처에서 요한스닝 분한 니콜과 격정적으로 싸우는 시퀀스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훌륭했다. 영화에서 좋은 액션을 받쳐주는 것은 좋은 리액션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애덤 드라이버는 참 좋은 배우임이 확실하다. 아마도 많은 여성 관객이 좋아할 니콜의 변호사 노라 캐릭터는 주변에서 들어온 호평만큼 깊게 와닿진 않았다. 주도면밀한 비즈니스맨 그 이상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이상으로 캐릭터에 깊이 빠진 팬들이 많아 그 이유가 오히려 궁금해졌다. ‘위닝 워먼’에 대한 판타지 때문인지, 혹은 그런 캐릭터가 전시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에 존재하는 이런 여성은 ‘위닝 비즈니스워먼’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닌 경우가 많다.

아내와 함께 이 영화를 봤다. 이제 우리가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이 영화의 주제라던가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삶의 궤적 위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게 느껴졌다. 니콜이 이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도 절절하게 이해가 되었으며, 찰리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이혼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니라는 점, 찰리가 뉴욕과 그의 극단에 집착하며 LA를 적대시하는 점 모두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었다. 찰리가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니콜이 조금만 더 일찍 자신을 아끼고 희생을 거부했다면, 이 부부는 슬기롭게 위기를 겪지 않고 계속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멍청한 한 부부가 우스꽝스럽게 이혼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히 사려 깊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가족을 지극히 아끼는 한 부부가, 결국 넘을 수 없는 어떤 벽에 가로막혀 고통스러운 이혼과정을 감내해가는 이야기다. 영화의 포스터처럼 한 때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삶과 가족이 이제는 극복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장벽으로 다가올 때,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는 한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다’는 말은 그 자체로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런건 없다. 그 누구도 어른이 될 수 없다. 다만 조금씩 더 배워나갈 뿐이다. 그래서 과거의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영화는 바움백의 전작들이 했던 그런 이야기를, 아주 현명한 방식으로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