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모르겠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갑자기 사망했다. 집에는 유서가 남겨져 있고 야산에서 사체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자살로 추정된다. 사망 하루 전 망자는 전 비서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2017년부터 행해졌다는 성추행 내용이 고소장에 빼곡히 담겨 있었다. 전날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던 망자는 이 고소장이 접수된 이후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

여기까지가 밝혀진 사실이며, 다음으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이슈 몇가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고소인은 피해자로 법적인 지위가 변경되었는가? 아니다. 피고소인의 사망으로 인해 수사는 종결되었고, 사실관계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고소인이 피해자로 지위가 변경될 가능성은 앞으로도 없어보인다. 현재 일부 정당 및 언론에서 고소인을 “피해자”로 명명하는 것은 법적으로 옳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조직의 입장, 혹은 판단이 담겨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피고소인의 사망으로 인해 받게 될 고소인의 2차 피해를 방지해야 하는가? 당연하다. 피고소인의 사망은 고소인의 법적 행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고소인이 피고소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주장은 지나친 피고소인 중심의 시각이다. 고소인은 사실관계를 다투어 법적인 처벌 여부를 가리고자 고소라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고, 그가 바라는 법적 처벌 중 자살은 없었다.

망자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로(만약 ‘1차 가해’가 사실이라면) 인식될 수 있는가? 개인의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타인의 행동을 강요할 수 없다는 주장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지위를 이용한 성추행이라는 민감한 사안에 있어 일방적인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고소인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치권을 비롯한 각종 유력 인물들이 망자에 대해 예를 갖추는 언행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 만으로 상당한 수준의 심리적 압박을 받을 것으로 짐작되나, 이를 이유로 망자의 장례절차 및 이후 망자에 대한 평가 등에 대해 고소인의 입장을 고려하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망자에 대한 장례는 고소인이 취한 법적인 부분과 완전히 별개로 존재하며, 망자는 자살이라는 방법을 통해 사건을 종결시켰으므로 사실관계를 다투고자 했던 고소인의 목적은 달성하기 어렵게 되었다. 즉 이 사건은 이렇게 끝나게 되는 것으로, 자살이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라는 정세랑의 문장이 특정 집단을 중심으로 회자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고소인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된 것과 피고소인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 간에 주요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그 어떠한 합리성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특정 집단의 자의적 판단이 법적 판단보다 우위에 있다는 가정이 성립해야 하는데, 이 사회는 그러한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망자의 죽음이 업무상 순직이 아니며 정부장을 치루기 위한 행정절차를 적법하게 거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서울특별시장을 치루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는 주장이 오히려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 서울시 측이 답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망자는 자신의 죽음을 철저히 개인적으로 것으로 마무리지음으로써 망자에 대한 성추행 건이 정치적인 사건으로 번지는 것을 조기에 차단시키고자 했으므로, 그의 죽음 역시 개인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 논리적으로나 정무적으로 더 나은 판단으로 보인다. (서울시측은 오늘 5일장에 대한 공식적인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장례가 왜 서울특별시장으로 치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답변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정치인이 망자의 빈소에 조문가지 않는다는 결정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행위가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를(만약 ‘1차 가해’가 사실이라면) 방지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고위공직자들이 저지르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고소장에는 “성추행”으로 명시되었는데 왜 수위가 높아졌는지에 대한 이해는 미루기로 한다)에 대한 철저한 진상파악이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성명서에 명시함으로써 문상과 장례절차에 반대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앞서 적시한 바와 같이 고소인은 피해자가 아니며, 피고소인은 가해자가 아닌 상태에서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개인의 추측에 의한 섣부른 판단과 이를 근거로 한 행위의 정당화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공무상 사망이 아니므로” 5일장에 동의할 수 없으며, 이를 근거로 문상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궁핍한 이유지만 그나마 설득력을 가진다. 나는 이들의 행동에서 고소인에 대한 진정한 배려를 느끼기 보다는, 자신이 속한 정당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언가에 ‘반대’하는 모습을 전시하는 것처럼 느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진실성이 느껴지는 건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글이다. 그는 페이스북 글에서 “‘당신’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조문하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이는 류의원이 ‘당신’으로 추상화시킨 불특정 다수의 여성 피해자들과 연대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논리성이 결여된 판단에 근거한다 할지라도 연대의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높이 살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 그 ‘연대’의 민낯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보자. 박원순이 성범죄자인가? 아무도 모른다. 법원은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박원순은 판단받지 않는 쪽을 택했으므로 많은 이들이 그가 그 짓을 정말 저질렀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머물 뿐, 사실관계에 대한 법적 판단을 받을 길은 영원이 막혀 버렸다. 아마도 고소인과 여성운동계는 이 지점에서 분개할 것이다. 유력 정치인의 위계에 의한 성추행 사건은 그 자극적인 표피만큼이나 이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클 것이고, 이후 한국사회의 지형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고소인의 용기는 그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이 사회에 만연한 ‘높은 지위의 남성이 낮은 지위의 여성에게 가하는’ 다양한 종류의 폭력에 대한 사회적 대응방식을 바꿔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망자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그 과정이 모두 법적인 절차에 의해 진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 모든 담화가 불완전한 차원에서 영원히 머물게 되어버렸다.

여기서부터 의문이 생긴다. 왜 이들은, 즉 트위터 등의 SNS를 통해 이슈몰이를 하며 ‘공격’을 가하는 집단과 이들을 추종하는 세력은, 선택적으로 그 공격의 대상을 가려 뽑는가? 위계에 의한 성폭력 문제에 대해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는 것이 갖는 당위성만큼이나, 그 담화의 범주에 포함되거나 포함되지 못하는 기준이 왜 이토록 자의적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되어야 한다. 최숙현 선수의 자살과 이와 관련된 체육계 폭행사건에 대해서 왜 지금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가? 위안부 쉼터 소장의 자살에 대해서 왜 지금처럼 소리 높여 원통해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들이 가진 ‘공감’이라는 행위의 범위가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데에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칭하는 ‘이들’이란 모두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숙명여대 트렌스젠더 입학에 반대한 이들, 미투운동 당시 박진성 시인을 비롯해 무고한 이들을 가해자로 몰고 가며 ‘모금활동’을 했던 이들, 안희정 모친상에 대통령 조화를 보낸 것에 분개한 이들. 최숙현과 위안부 쉼터 소장의 자살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선택적으로 침묵했던 이들.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일부라고 지칭할 수 있는 이들은 연대의 범위를 상식적인 남성으로 확장하기 보다는 일부 여성집단의 이익을 위해 배타적으로 행동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다. 망자의 사망이 발표된 날 밤 와인잔을 부딪히며 축배를 드는 모습을 굳이 트위터에 올린 이들이 정말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를 진심으로 걱정할까? 이들이 이야기하는 피해자와의 연대는, 어쩌면 잠재적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다수의 일반적인 여성들이 ‘보험’의 성격으로 납부하는 기부금을 위한 선전활동의 일부에 불과하지 않을까? 공공화장실에서 몰카가 발견되고 대부분의 성범죄 가해자는 피해자와 구면이고 소아성애 영상을 유포한 범죄자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이 사회에서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 여성은 24시간 성범죄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이와 동시에 이에 대한 처벌이 온당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불만에 가득차 있다. 이건 상식적인 남성들, 혹은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 여성들도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다. 사회 전체적인 공감대가 그 정도 선에서 형성되어 있다면, 선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폭넓은 연대를 형성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전략이 아닐까? 그래서 답답하다. 왜 공포심과 분노를 조장하며 왜곡된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시키는가?

이 사회에는 크게 두 방향이 존재한다. 과거로 회귀하거나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는 방향과 앞으로 나아가거나 보다 공평한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 큰 방향에서 함께 가는 것이 맞다면,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양보하는 것도 작은 과실을 꾸준하게 성취하는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예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예의에 관한 것이다. 성범죄로 고소를 당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에게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냐는 주장은, 그 자체로 예의가 없는 것이다. 망자가 한 평생을 쓰레기처럼 살아왔다면 그 층위가 달라질 수 있겠으나, 현재 많은 조문객이 줄을 지어 문상하는 풍경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계몽으로 이룰 수 없는 수준의 성취가 있는데, 그것은 시민들의 집단적인 행동의 결과가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지닐 때 또렷하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것에 승복하라고 배웠다. 특정 가치관을 강요하는 일부 세력의 계몽주의는 대다수 상식적인 대중의 판단 과정에서 약간의 두통을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큰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예의를 갖추었으면 좋겠다. 고소인과 그가 제기한 문제와 상관 없는, 그 전까지의 망자의 삶에 대한 예의다. 만약 고소인과 그가 주장한 바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다면, 망자의 삶에 충분한 예의를 갖춘 후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늦지 않다. 아마도 이 사회는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그냥 덮고 넘어가자, 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가는 이들일텐데, 아마도 그들 역시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활용하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이야기할 가능성은 낮다. 조금 늦게 이야기하는 것이 고소인을 크게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고소인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충분히 합리적이라면 말이다. 그래봤자 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