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기본소득의 명과 암

2월 초부터 병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2월 중순부터는 아내가 입원해있던 대학병원이 지역 내 바이러스 확진자들이 입원하여 치료받는 병원으로 지정되어 동거(?)를 시작했고, 아내를 보기 위해 병원에 출입할 때마다 몇겹의 검사를 통과해야 했다. 의료진은 항상 과로 상태에 힘들어했고, 마스크는 병원 내에서도 동이 나버려 가장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위험에 노출되기 일쑤였다.

아마 한국의 대부분의 공간에서 비슷한 수준의 혼란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사회적 혼란만큼 두려운 것이 소비위축에 따른 경기침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본격화되면서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여 발생시키는 경제활동의 규모도 큰 폭으로 위축될 것이 자명해보였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상거래로 플랫폼이 패러다임이 완전히 이동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도 많았다. 대유행으로 정의된 전염병은 일종의 전쟁과 비슷한 경제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대규모로 사망하고, 대부분의 시민들을 집 안에 숨어있게 만든다. 경제활동이 위축된 만큼 수입의 크기도 줄어들 것이다. 줄어든 수입만큼 돈을 아껴 사용할 것이고, 신용의 흐름이 감소할수록 새로운 생산활동을 위한 자극이 이루어지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전염병의 유행이 끝나면 그동안 억눌려 있던 잠재수요가 일거에 폭발하여 소비활동이 다시 활발해질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처럼 국가별, 대륙별로 유행병의 발병시기가 상이할 경우 경제구조의 글로벌화가 꽤 진행된 상황에서 국제 교역량이 일순간에 회복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그리 날카로운 분석은 아닐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경제학자와 정치인들이 재난기본소득 아이디어를 들고 나와 이에 대한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기본소득(basic income)의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개인별, 혹은 가구별로 일정한 현금을 동등하게 지원하자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공적 마스크를 저렴한 가격에 개인별로 동등하게 분배하는 정책이 구호물품을 현물화하여 공급하는 것이라면, 재난기본소득은 이보다 조금 더 경제학적으로 유연한 방식으로 구호물품을 공급하는 개념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매리트가 존재한다. 하나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시키는 보조금 정책이라는 점이다. 현물을 공급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을 크게 제약하기 때문에 효용을 극대화한다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현금을 있는 그대로 주면, 수혜자는 개인의 기호를 최대한 고려하여 가장 사고 싶어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 개인의 효용을 정확하게 기본소득만큼 향상시킬 수 있으므로 질병의 대유행으로 인해 위축된 경제활동을 일시적으로 소생시키는 유용한 구호수단이라고 이야기할만 하다. 두번째 매리트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통화정책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임시처방전이라는 점이다. 통화정책은 화폐의 가치를 국가기관이 인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경제 전체에 순환하는 신용의 총량을 조절하는 거시경제 정책도구다. 하지만 이자율의 조정으로부터 개인의 소득변화까지 넘어오는 과정이 상당히 길고 복잡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시중에 존재하는 화폐의 가치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그 효과를 세부적으로 예측하기 힘들 뿐 아니라 특정 부문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을 방지하기도 힘들다. 기본소득의 지급은 경제 전체의 신용증가라는 목적은 동일하게 달성하면서 세부 분야에 그 효과를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정책의 전이과정이 매우 빠르고 단순하다는 장점을 지닌다. 기본소득을 지급받는 즉시 수혜자는 그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재난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이유는 재원 마련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시장경제의 기본바탕을 흔들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난기본소득은 재정정책의 일부로, 국민이 납부하는 세금에 기반하여 형성될 것인데, 이 정책을 시행한 후 발생하는 효과, 증 재정승수(fiscal multiplier)를 측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더 나아가 이 정책을 시행할 경우 정부는 그 즉시 재정적자 상태에 빠질 것이며 이에 대한 추가적인 재원마련 방안도 마땅치 않기 때문에 이 일시적인 정책은 항구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큰 한계를 지닌다. 재난이 언제 종식될지 알 수 없고 사상 초유의 기본소득을 지급함으로써 유발시키는 경제적 효과를 예측하는 것도 쉽지 않다면, 정책당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큰 불확실성을 안고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셈이다. 더 나아가, 경제활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서의 수입이 아니라 국가적 재난이라는 외부효과로 인해 공짜로 받게 되는 재난기본소득은 국가 차원에서 시장경제의 건전성을 해칠 수 있는 위험요소로 인식될 수 있다. 가뜩이나 부동산에 대한 투자 집중과 불로소득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전국민에게 불로소득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은 정책가 입장에서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이런 저런 고민거리가 많겠지만, 나는 재난기본소득에 찬성하는 편이다. 앞서 말했듯 신용의 증가와 그로 인한 가계소비 진작을 목표로 한다면, 재난기본소득은 통화정책보다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는 ‘응급처치’에 가깝다. 정책당국이 현재의 경제상황을 그 정도로 위급하다고 판단한다면 여러 부작용이 있더라도 응급처치를 하는 것이 맞다. 이번에 아내의 입원과 출산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깨달은 점은 그 어떤 좋은 약도, 수술도, 혹은 치료법도 반드시 하나 이상의 부작용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실하다면 그 약을 써야 한다. 상충관계(trade-off)는 모든 경제적 판단에 존재하고,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을지 판단하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신중함이 능사가 아닐 수 있다. 그것이 거시경제정책을 만지는 위정자가 가져야 하는 책임감이다.

아빠가 된다는 것

지난 2월 4일, 아내가 대학병원 산부인과에 입원했다. 임신 29주차에서 30주차로 막 넘어가던 시점이었다. 아이를 가진 것을 확인한 이후 시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여성병원으로 진료를 다녔는데, 쌍둥이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워낙 변수가 많고 다태아 임신 그 자체로 고위험군으로 분류되기에 혹시나 모를 위험에 신속히 대비하기 위해 ‘차트나 만들자’는 생각으로 대학병원을 방문했다 덜컥 “붙잡혀버린” 것이다. 담당교수는 은퇴를 몇 년 남겨두지 않은 베테랑 여성 의사였다. 많은 환자들로부터 “친정 어머니같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환자에게 가깝게 다가가지만 진단과 처방은 대단히 냉정하고 보수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주 낮은 가능성일지라도 발생확률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는 모든 위험에 예비적으로 대응했다. 의사는 “환자의 상태는 환자가 가장 잘 안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되내일 정도로 환자와의 소통을 중요시했지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서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며 가장 안전한 길로 우리를 유도했다. 약물을 이용하여 최대한 주수를 오래 끌어보되, 경부가 약화되어 양수파열이 발생할 가능성이 발견될 시 신속하게 수술을 진행한다는 것이 우리가 택한 계획이었다. 이동 에너지 레벨이 높은 아내는 한 평 남짓한 공동병실에갇혀 한뼘 정도 되는 창문으로 하늘을 그리워하는 생활을 다행히도 잘 버텨 주었고, 나는 매일 아내가 있는 중환자실로 출퇴근하며 아내의 노력을 뒷바라지했다. 덕분에 병원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마일리지를 많이 쌓을 수 있어 조금 뿌듯했고 병원 근처 독립서점에서 가끔 시간을 죽일 수 있어 좋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병원 내 방역 절차가 까다로워짐과 함께 나의 예민함도 덩달아 조금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2월 27일.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는 날, 병원에 있는 아내와 원격으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크고 작은 이사준비를 치루어온 과정에 큰 마침표가 하나 찍히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른 아침,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막 작업을 시작하던 순간 아내로부터 수술을 바로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 아빠가 와주지 않고 혼자 이사를 마무리하려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무사히 잔금을 정산하고 새 집에 짐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순간 부모에게 남은 모든 책임을 떠 안기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경부가 많이 약해져 언제 양수파열이 발생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당장 이번 주말을 넘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의사소견과 본인은 아직 컨디션이 괜찮으니 조금이라도 더 버텨보고 싶다는 아내의 의견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면담실에서 아내를 배제한 채 담당교수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고, 우리는 다음날 바로 수술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34주를 채우지 못하였기에 아기들의 폐기능이 정상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하루종일 나의 역할을 대신해 준 부모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우리는 엄마가 급하게 끓인 떡국을 나누어 먹고 빠르게 헤어졌다. 아빠는 본인의 심장시술을 출산 예정이 이후인 4월 중순으로 미룬 터였다. 간절한 마음만 나눈채 헤어졌고, 나는 수술 준비물을 간단히 챙겨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다음날 아침, 담당교수는 우리를 두번째 타임에 배치했는데, 이는 친정 어머니가 받아온 “용하다는 시각”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천주교 신자였지만 사주 등을 믿는 부모의 심정을 배척하고 싶지 않았고, 그것을 효도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과학의 최전선에 서있는 담당교수도 최대한의 배려를 베풀어주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아내를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인큐베이터 하나가 간호사 세 명에 둘러싸여 급하게 신생아 중환자실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1초도 채 되지 않는 순간 나를 스쳐지나갔는데, 본능적으로 ‘저 친구인가보다’ 라는 느낌을 받았다. 몇 분 후 두번째 인큐베이터도 빠르게 나를 스쳐지나갔다. 탯줄을 자를 틈도, 사진을 찍을 틈도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임을 직감했다. 이후 소아과 주치의로부터 간단히 아기들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병실로 이동하니 회복실에서 막 나온 아내가 누워있었다. 아내도 아기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드라마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그 ‘인위적인’ 아기의 울음소리가 너무 비현실적이었다는 말도 했다. 그때부터 4박 5일 간 침상에서의 회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마취가 풀리면서 고통이 시작되었고 밑에서는 오로가 쏟아져 나왔다. 한달여 가까운 기간동안 입원생활을 지속한 아내의 팔에는 더이상 주사바늘이 들어갈 곳이 없었고 파란 멍이 가득했다. 소변줄을 차고 누워 무통주사 버튼을 눌러대는 아내 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침대 높이를 조절하거나 패드를 갈아주는 일, 물을 입에 떠넘겨 주는 일 정도 밖에는 없었다. 양가 부모와 가족에게 소식을 전달하고, 간병인 침대에서 새우잠을 자며 아내가 부탁하는 일을 처리했다. 커튼으로 닫혀진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우리가 사는 세계였고, 그곳에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침상에서 일어나면 아기들을 보러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1분 먼저 나온 남자 아기의 폐기능이 완전치 않아 몇가지 약물을 투여했고 커다란 호흡 보조장치가 2kg을 갓 넘긴 아이의 작은 얼굴에 달렸다. 이런저런 보조장치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아기의 사진을 간호사로부터 전달받아 본 후 가슴이 답답해졌다. 신생아중환자실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급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였고 그만큼 잔실수도 가끔 눈에 띄었는데, 여자 아기의 성별이 바뀌어 기록되는 해프닝은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를 차지했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아이들을 담당하고 있는 담당교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나이 어린 주치의만이 가끔 전화를 걸어 상태를 전달해줄 뿐이다. 남자 아기는 태어난 지 이틀 뒤 보조장치를 떼고 완전한 자가호흡을 시작했다. 사흘째부터 어미가 짜낸 초유가 미숙아분유와 섞여 삽관된 호스를 타고 아이들에게 먹여지기 시작하였고, 아내는 본격적인 젖몸살이 시작됨을 느꼈다. 퇴원 하루 전, 아직 아기들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산부인과 수간호사의 ‘전화 찬스’에 힘입어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보다 먼저 들어간 아내는 보는 순간부터 펑펑 울었다고 한다. 나는 울지 않았다. 그저 잘 살아 있음에, 숨을 쉬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임신 순간부터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왔다.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하며 출산을 준비해왔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다 울어도 나는 마지막까지 울면 안되는 존재였다. 다행히 그 최악의 상황은 아직까지 발생하지 않았고, 조금 더 큰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신생아중환자실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2월 내내 쉬지 않고 달려와 육체적으로는 매우 피로한 상태였는데, 아이들의 모습을 실제로 보는 순간 몸 속 깊숙한 곳에서 한없는 기쁨이 솟아져 나옴을 느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우리는 새로 이사한 집에 함께 있다. 퇴원 후 다음날이다. 아기들은 아직 병원 신생아중환자실에 머물며 의료진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퇴원 당일에는 아이들과 함께 퇴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주는 쓸쓸함과 아이들을 직접 본 후 느낀 황홀함이 교차하는 멜랑꼴리한 기분에 휩싸여 집으로 향했다. 기차역에서 친정 어머니를 태워 세 명이 함께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은 이사 직후 원시적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넘치는 에너지를 고스란히 물려준 친정 어머니는 그 에너지 레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이런 친정 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집은 빠르게 ‘사람이 사는 모양’으로 바뀌어갔다. 아내가 조리원을 포기하고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기로 결정한 것도 친정 어머니의 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국을 휩쓴 바이러스로 인해 한달을 꽉 채워가며 입원과 수술을 경험한 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어미의 마음이 간절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삼시 세끼를 미역국만 먹어도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우리는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다. 그리고 병원에 남아 있는 아기들은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리는 병원 의료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들이 제시하는 방향대로 아이들의 치료를 맡길 것이다. 건강히 몸을 회복학 위해 노력하는 아내와 함께 아이들이 퇴원하는 그 날까지 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할 것이다.

나의 삶을 돌이켜보면, ‘나는 왜 이 엄마와 이 아빠에게서 태어났는가’, 혹은 ‘나의 엄마와 아빠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 시점부터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내게 그 답을 결코 직접적으로 제시해주지는 않았다. 나를 낳았을 때, 내가 지금 그러한 것처럼, 그들도 미숙한, 덜 자란 어른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와 함께 성장했다. 울고 보채는 나를 어르고 달래며, 사고를 치고 돌아온 나를 감싸안거나 혼내며, 그들도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되고도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지난 어떤 순간부터, 나는 부모를 더이상 미워하지 않게 되었고 더이상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해하지도 않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 시점이 내 부모가 완전한 어른이 된 순간이라고 어렴풋하게 짐작할 뿐이다. 이제 나의 부모는 병들고 늙어 약해진 육체를 가진 노인이 되었다. 약해진 육체는 정신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자식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었다. 아이가 자라나듯 노인이 늙어가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보여주는 것처럼 노인이 자신을 잃어가는 것도 인생의 한 순환고리인 것이다. 그렇게 인생의 황혼기에 다다른 부모는 나에게 아이를 낳을 힘을 주었고, 이제 나는 아이들과 함께 어른이 되기 위해 성장해야 한다.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 나는 어떤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 그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느낀다. 인생의 새로운 숙제가 주어졌고, 아이들에게서 성장의 뿌리를 발견한다. 그 때 쯤이면 나의 부모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