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스젠더 여성과 여자대학교

지난 12월 조금 특별한 경험을 한 일이 최근 다시 떠올랐다. 겨울방학이 시작된 직후였던 크리스마스 즈음, 내가 속한 단과대학에서 태국의 학생들을 학교로 초청하여 몇몇 교수들이 특강 형식으로 짤막한 강의를 이어나갔는데 나도 용돈을 벌어보자는 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세시간 남짓 진행된 그 특강이 특별했던 이유는 다른 문화권에서 온 학생들의 수강태도가 재미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반응이 폭발적인데 전부 다 잔다..?) 무엇보다 난생처음 트랜스젠더 여성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슨 촌스러운 말이냐 하겠지만, 나는 그 때까지 단 한번도 트렌스젠더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개인의 의지로 성을 전환한 사람과 대화할 때 그 사람이 어떤 눈빛과 표정으로, 혹은 어떤 몸짓으로 대화에 임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딱히 그런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태국이 트렌스젠더 문화에 상당히 관대한 편이고 관련 의료기술도 많이 발달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설마 내 수업시간에 그 중 하나를 만나리라는 기대는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학생은 맨 앞줄에 앉아 내 강의를 경청했고,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을 대표해 나에게 기념품을 선물해주었다. 잠시나마 그녀와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든 느낌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 학생은 분명 남성은 아니었다. 본인이 자신을 남성과 여성 중 무엇으로 규정하고 있는지까지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행동은 영락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외형적으로 드러난 여성적인 모습만으로 거칠게 그녀를 사회통념상 제시되는 여성의 카테고리에 묶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과연 남성일까, 여성일까? 성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이 많이 발달한 일부 선진국에서는 고민도 하지 않고 ‘제 3의 성’이라는 모범답안을 제시하겠지만, 이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진행되지 못한 우리나라같은 경우에는 답안지가 아직 두 개밖에 없다.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남성, 혹은 스스로의 의지로 인해 선택한 여성. 개인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내릴 것이고, 사회는 또 이 사람을 어떻게 정의내릴 것인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문제다.

최근 한 트렌스젠더 여성이 숙명여대에 합격한 사실이 언론에 크게 보도된 후, 숙명여대 학생들 중 일부(언론은 그들을 “레디컬 페미니즘 동호회” 정도로 규정했다)가 이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내었고, 동시에 일부 동문들을 중심으로는 포용하자는 의견이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숙명여대 커뮤니티는 이 트렌스젠더를 놓고 둘로 갈라진 모양새다. 우선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성전환수술 후 법적으로 여성임을 인정받았고, 주민등록번호도 바뀌었다. 외형적으로나 법적으로 모두 여성이다. 때문에 여성만이 허락되는 여대에 입학할 수 있는 법적지위는 확보한 셈이다. 다만, 이 트렌스젠더 여성의 여대 입학을 반대하는 쪽은 이 여성이 ‘진짜 여성’ 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염색체상으로 남성이기 때문에 “겉모습”을 바꾸는 것 만으로는 여성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논리다. 때문에 이들은 트렌스젠더 여성의 여대 입학을 여성의 공간을 침해하는 행위로 바라본다. 여성의 공간은 염색체상으로 여성인 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이 상당히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색채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우선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성을 본인의 의지에 의해 선택한 성보다 우선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보수적이며, 개신교 사회가 동성애 및 성적소수자를 바라보는 시각과 상당히 많은 범위에서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치즘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논리도 이와 유사했다. 근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으며 개인의 자유의지는 그 앞에서 충분히 무기력해질 수 있다는 논리는 전체주의적 사고로 흐를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들의 논리에는 현재 이슈의 대상인 이 트렌스젠더 여성이 자신의 성별을 무엇으로 정의내리는지에 대한 고려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이 여성이 자신을 여전히 남성으로 보고 있는지, 단순히 여성의 신체를 갖고 싶어한 것인지, 혹은 완전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는지에 대한 숙고가 전혀 완료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결여 속에 이 여성을 생물학적 남성으로 규정하며 입학을 반대하고 있는데, 이는 개인에 대한 대단히 높은 수준의 폭력이다. 동성애자를 정신병으로 규정하고 치료의 대상으로 삼은 어떤 개신교회, “여자는 집에서 집안일이나 해야지” 라며 부엌에서 나오지 못하게 한 어떤 아버지의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이 주장이 더 참담한 것은, 한국사회에서 소수자이며 약자로 태어나 오랜 투쟁 끝에 이제 막 인정받기 시작한 여성들이 이와 같은 차별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오랜 기간동안 차별받고 억압받아 왔다. 이제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마당에, 여성보다 더 소수자이며 더 약자인 트렌스젠더에 대해 폭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이러한 행위는 과연 여성주의를 계속 지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로까지 생각을 번지게 만든다. 래디컬 페미니즘 세력이 권력을 잡고 주류가 된다면, 아마도 이들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타자를 억압할 것인가. 이번 이슈를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상당히 큰 패착이다.

포용과 이해, 양보와 희생은 현대사회를 그나마 유지시키는 마지막 희망이다. 소수자는 서로 연대해야 하고, 주류는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고 이들과 공유해야 한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위해 함께 싸워야 하고, 남성은 여성과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기 위해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사지 멀쩡하게 태어난 사람과 장애인이 동등한 수준의 사회적 활동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장애인이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공부하고 이해해야 한다. 소수인종이 노골적인 냉소와 차별에 시달릴 때 이들을 똑같은 ‘한국 시민’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 약자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 중산층 학자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뒤 전임교원으로 취직에 성공한,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기득권에 속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아왔다. 다들 나처럼 그렇게 평탄하게 사는 줄로만 알았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여성이 밤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알지 못했다. 장애인 친구를 사귀기 전까지 그들이 버스를 한번 타고 내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생각할 겨를도 없없다. 동성애자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그들이 앓고 있던 깊은 마음의 병을 헤아릴 수 없었다. 삼촌이 조현병에 시달리다 비극적으로 죽기 전까지, 조현병 환자는 피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봤다.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의 어머니가 필리핀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다문화 가정은 미디어에나 나오는 먼나라 이야기처럼 생각했다. 나는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전까지 제대로 된 시민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누리는 이 평안하고 안정적인 삶이, 그러한 것을 박탈당한 많은 이들의 고통을 짓밟고 올라섰기에 가능한 결과임을 깨닫는데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지금도 배움과 실천이 많이 부족하며, 앞으로 더많이 배우고 느끼고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나의 눈에, 소수자가 다른 소수자를 옳지 않다고 규정하고, 그래서 나의 이익을 나누지 못하겠다고 소리치며 밖으로 내모는 행위는 안쓰러움을 넘어서는 서글퍼보이기까지 하다. 어찌 그 작은 파이 하나조차 나누어 먹지 못해 싸우는 것인지, 도통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