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시아마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어제 포털 사이트의 뉴스란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색깔의 기사들이 올라왔다. 군인을 직업으로 삼는 한 부사관이 상관의 허락을 구한 뒤 외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하고 복귀했는데 군에서는 이를 복무부적합으로 판단하여 강제전역시켰다는 기사와, 그러한 상부의 지시에 수긍할 수 없어 본인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한 뒤 기자회견을 통해 부당함을 토로한 당사자에 대한 기사였다. 댓글은 예상한대로 그 부사관이 지나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성전환수술은 “신체훼손”에 해당하니 계약파기가 정당하다는 논리부터 “당신의 인권만큼 당신 동료들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뜬금없는 인권동등론까지 다양한 이유를 들어 남군에서 여군으로의 복무전환신청 기각에 찬성하는 의견이 이어졌다. 대체 남성의 성기가 국경을 방위하는데 있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혹은 남성의 성기를 포기하였다고 하여 함께 일하는 동료가 어떤 혐오감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한국사회에 쌓아올려진 단단한 벽의 거친 질감을 오랜만에 손으로 쓰다듬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쓸쓸해졌다.

한국사회가 문화적 갈라파고스섬으로 자신을 정의내린지 꽤 오랜 기간이 흐른 것 같다. 서울 시내에는 문신한 오빠들이 운영하는 힙한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지만 문 앞에는 어린아이를 받지 않는다거나 반려동물은 함께 할 수 없다는 문구가 당당히 걸려있는 경우를 많이 목격한다. 지하철 안에서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고 홍카콜라 유튜브 방송을 시청하는 할아버지는 무사히 그 날 하루를 마감할 수 있지만, 길거리에서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여성 연인들은 단단히 각오하고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2018년 WHO에서 발표한 인구 10만명 당 자살인구 비율 추정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여성 자살율은 15.4명으로 세계 2위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보다 여성이 높은 확률로 자살하는 나라는 레소토(Lesotho) 왕국이 유일한데, 1인당 GDP가 2천달러를 조금 넘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둘러싸인 가난한 국가다. 참고로 이곳의 인구 10만명 당 강간발생률은 90명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나라를 제외하고는 한국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여성이 더 자주 발생하는 나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면서 나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떠올렸는데, 19세기 유럽사회의 보수성과 21세기(심지어 원더키디가 나온다는 2020년이다) 한국사회의 보수성을 병렬적으로 연결시킨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이 부끄러움은 한국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부채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거부할 수 없고 청산해야만 하는 그런 성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실로 완벽한 영화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장면이 컷 단위로 완전하게 설계되어 있고, 카메라와 세트, 음악과 배우는 최선을 다해 감독이 설계한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배우의 표정 하나하나부터 세트의 구석진 곳, 거친 파도와 같은 자연환경까지 화면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영화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상징들이 침착하게 하나로 모여 엔딩씬의 엘로이즈(아델 에넬 扮)의 얼굴에 집중되는 순간 이 영화의 세계는 비로소 완성된다. 이 영화를 여성에 대한 억압적인 시선이 팽배해 있던 시대적 배경 하에 사랑을 나눈 여성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받아들인다면 조금 섭섭한 감이 있다. 영화는 그보다 훨씬 깊고 다양한 층위를 관객과 함께 나누고 싶어한다. 우선 형식적인 측면에서 남성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지금까지 영화 등 각종 예술장르에 관습적으로 내려져온 남성 중심적 시각에 도전하고 있다. 카메라의 시선은 등장인물 중 누군가의 시선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데, 영화의 처음과 끝에 도구적으로만 등장하는 남성 인물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건 여성의 주체성 관점에서 봐도 꽤 중요한 시도다. 기존 사회적 문법에 대한 형식적 도전은 억압적 기제(어머니)가 부재한 가운데 행해진 귀족과 하녀 간 평등한 관계 형성, 오르페우스 신화의 전복,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아카펠라 합창 등 서사구조 내에서의 다양한 변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적 구조와 형식, 서사와 이미지가 모두 하나의 통일된 주제의식 안에서 조화롭게 움직이는데, 그 모든 과정이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매우 독창적이기까지 하다.

개인적으로 다르덴 형제의 근작 [언노운 걸]에서 매우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주어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던 아델 에넬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이 배우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하여 역시 걸출한 연기를 선보인 노에미 메를랑을 가끔 아마추어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기운을 뽐낸다. 영화 속에서 오랫동안 쌓아올린 감정을 폭발시키는 엔딩씬은 배우의 연기가 조금만 틀어져도 굉장히 유치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는데 그 복잡한 감정까지 성실하고 치밀하게 표현해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저 감탄만 나왔다. 클레르 마통의 카메라도 매우 인상적이다. 이 카메라 감독이 찍은 또다른 영화 [애틀랜틱스]를 넷플릭스를 통해 접할 수 있다 하니 얼른 봐야겠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느껴진다.

다시 이 감상문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국사회에서 이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해보는 것은 이 사회의 폐쇄성을 고려할 때 분명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해외 언론이 한국의 문화적 보수성에 놀라워하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나라 눈치볼 필요 없이, 현재 한국사회 안에서 용인되는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정도가 너무 얄팍하지는 않나 하는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면, 이 아름다운 영화가 하나의 계기 정도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타오르는” 감정이 박제된 초상화 안에 갇혀 있음에도 훨훨 불타고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감정, 한국인들이 참 좋아하는 그 감정, 술 마시고 감정적이 되면 얼굴을 뭉개놓아도 자궁을 부셔놓아도 정상참작이 되어 형량도 줄어든다는 신비한 그 감정, 사회적으로 같은 인간 취급 못받고 소외당하는 소수자들에게도 그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보고 좀 알아봐 주었으면 한다. 아무리 억압하고 가두어놓아도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접어놓은 ’28쪽’은 영원히 기억되리라는 것도 함께 깨달았으면 좋겠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하면 트렌스젠더 군인을 강제전역시켰다는 그 뉴스의 댓글란에 글을 쓰고 좋아요를 누른 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사회에 하는 말이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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