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오너 | 비크람: 요가 구루의 두 얼굴

어렸을 때부터 몸이 그리 유연하지 못한 편이었다. “유연하지 못했다”라는 표현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자기보호적인 성격이 강한데, 일반적으로 나와 같은 몸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더럽게 뻣뻣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잘 구부러지지 않는 몸은 젊은 시기에는 약간의 불편함 만을 수반할 뿐이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건강, 혹은 목숨과 직결되는 위험을 가져온다. 탄력성과 유연성이 결여된 내 몸을 잘 아는 지인들은 요가를 권하는데, 마흔이 다 되어가는 아직까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게으름이 가장 큰 적이겠지만, 아마도 언젠가는 반드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몇 년 전 한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핫 요가’라는 것이 있단다. 40도 가까운 고온에서 땀을 잔뜩 흘리며 진행하는 요가인데 효과가 좋아서인지 꽤나 많은 이들이 핫 요가에 빠졌다. 이와 같은 요가 스타일을 흔히 ‘비크람 요가’라고 한다는데, 26개의 동작과 2개의 호흡법으로 구성된 이 비크람 요가를 창시했다고 알려진 비크람 차우다리(Bikram Choudhary)는 인도 출신으로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요기, 혹은 요가 구루로 알려져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비크람: 요가 구루의 두 얼굴](원제는 [Bikram: Yogi, Guru, Pradator])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요가 사업가가 교육과정에서 수많은 성추행과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피해자들이 직접 인터뷰이로 등장해 당시 상황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이와 관련된 소송과정에서 비크람이 행한 폭력적이고 도발적인 행동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심지어 재판 과정에서 비크람이 창시했다고 알려진 ‘비크람 요가’가 사실은 그의 스승이 창시한 것이고, 비크람은 그것을 그대로 베껴 사용한 뒤 마치 자기가 창시한 것인양 포장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게 되면서 비크람 차우다리는 미국 내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닉슨 대통령을 치료한 대가로 영주권을 선물받았다는 주장도 당연히 거짓이었으며, 정부에 파산신청을 한 후 그의 자녀들에게 선물한 고급 승용차는 캘리포니아 주정부 소유라는 황당한 거짓말을 재판정에서 뻔뻔하게 늘어놓아 배심원들로 하여금 허탈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결국 비크람의 성폭행건에 대해 조사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법률담당 부하직원이 제기한 소송에서 거액의 징벌적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은 비크람은 아내와 가장 이혼을 하여 재산을 은닉하고 배상금 지급을 피하기 위해 외국으로 도피한다. 다큐멘터리는 지금도 비크람이 멕시코, 스페인 등에서 대규모의 요가 학원을 꾸리면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지난 몇십년 간 비크람은 상습적으로 여제자들을 성추행, 혹은 성폭행해왔고, 이 중 일부가 소를 제기하면서 궁지에 몰리자 미국 내 활동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도피했으며, 민사소송만이 진행되고 성폭행 건에 대한 형사소송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제송환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현재까지 미국 외 지역에서 활발하게 요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폐쇄적인 공간에서, 전문기술을 가진 권위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때 발생하는 슬픈 사건을 우리는 적지않게 목격해왔다. 최근에는 대학원생 제자에게 똥물을 먹인 교수도 있었다. 한국에서. 비크람 사건은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그나마 전세계에서 가장 시민의식이 발달했다는 미국인들조차 완전히 당해버렸다는 점에서 씁슬함의 정도가 조금 더 크게 다가온다. 계급과 권력이 폐쇄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은 개인의 현명함을 완전히 무용하게 만들어버린다. 시스템 디자인이 이와 같은 최악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향으로 공고하게 발달해야 하는 이유다.

임대형 | 윤희에게

한국의 대중문화예술산업에서 중년 여성의 서사를 찾기 힘든 것이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젊음에 대한 무분별한 추앙은 예전부터 오래 지속되어 왔다.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염색을 시도하는 중년의 남성만큼이나 머리를 길게 기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중년의 여성을 발견하는 것이 무척 쉬운 사회가 이 곳이지만, 여성이 젊음을 놓지 못하는 과정에는 강제된 측면이 많기 때문에 이 문제는 성별을 좀 분리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나 TV 등 대중매체에 중년의 남성이 노출되는 빈도, 혹은 작품의 서사에서 나이 지긋한 남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중년 여성의 그것과 감히 비할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잘생기지도 않고 젊음을 유지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태반인데, 여성의 경우는 이와 같은 중년으로의 자연스러운 이행이 쉽게 용인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이 적극적으로 소개된 이후 젊은 여성의 서사는 이제 어느정도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진 반면, ‘여성의 젊음’을 상실한 중년 이후 여성의 삶에 대한 묘사는 여전히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업소’때문이 아닐까 싶다. 획일화된 육체적 매력을 기준으로 여성을 ‘텐프로’, ‘쩜오’ 등의 등급으로 나누는 문화가 남성중심사회에 만연해 있고, 여성 역시 이 획일화된 미의 기준에 갇혀 버리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조금 푸석하더라도 흰 머리를 길게 기른 중년, 혹은 노년의 여성을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은 대중매체에 그러한 여성상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비정상적인 패턴이 세대를 거듭하며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윤희에게]는 이처럼 척박한 한국의 대중예술산업에서 보기 드문 중년 여성 서사를 그리고 있다. 심지어 퀴어 영화다. 독립영화이기 때문에 제한된 플랫폼에서만 소비된다는 점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이러한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그리고 그 결과물이 영화적으로 썩 괜찮다는 점에서 조금은 주의깊게 기억해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윤희에게]의 주인공은 윤희라는 가난하고 못 배운 중년 여성이다. SK2의 모델로 오래 활동한 배우 김희애의 육체를 빌어 탄생한 인물이기에 ‘태초부터 아름다움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치명적인 비정상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어쨌든 영화 내 설정을 보자면 오빠를 뒷바라지하느라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고, 어떠한 연유로 인해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오래 지속한 여자다. 한마디로 선택하지 않은 불행을 오랜 기간 견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이혼한 듯 보이는 그녀에게 유일한 삶의 의미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되려 하는 딸인데, 이 딸이 영화의 두 축을 이루는 윤희와 그녀의 옛사랑인 일본인 여성 준을 이어주는 오작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준은 윤희와 달리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의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에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는 고모, 귀여운 고양이와 함께 오타루 지역에서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다만 윤희처럼 준에게도 결여된 것이 있는데, 어머니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감추고 살았다는 부채의식과 그로 인해 어그러진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것이다. 어쨌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준은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상대인 윤희에게 편지를 쓰게 되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는 준의 고모와 윤희의 딸에 의해 잘 전달되어 윤희 모자의 갑작스러운 일본여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어쩌면 단순하다는 느낌마저 주는 직선적인 플롯이 영화적으로 풍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먼저 윤희, 준, 윤희의 딸, 준의 고모, 그리고 윤희 딸의 남자친구 등 몇 안되는 등장인물들이 다층적으로 잘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며, 둘째, 영화의 구성이 번잡스럽지 않고 차분하게 서사를 충실히 보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브라운관에서 정극을 오래 해온 김희애와 아이돌 출신으로 연기에 막 몸을 담근 김소혜가 한 프레임에 잡히는 씬이 많은데, 이 둘의 연기톤이 어긋나는 경우가 가끔 발견되어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배우들의 연기는 나무랄데가 없는 편이다. 들끓는 감정을 오랜 세월 억누르고 살아온 윤희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오히려 매우 절제된 분위기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 참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오타루라는 (윤희 입장에서) 이질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판타지적인 느낌이 노골적으로 스며나온다는 점도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가제가 [만월]이었다고 한다. 윤희와 준 모두 채워지지 않은 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곁에는 딸과 고모 등 연대가 가능한 가족이 있었지만, 결국 이 둘을 조금 더 완전하게 채워줄 수 있었던 상대는 서로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이 절절한 감정을 깔끔하게 표현하고 있다. 가끔은 너무 깨끗하고 모범적인 시선이라 아쉬운 순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던 영화였다.

셀린 시아마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어제 포털 사이트의 뉴스란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색깔의 기사들이 올라왔다. 군인을 직업으로 삼는 한 부사관이 상관의 허락을 구한 뒤 외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하고 복귀했는데 군에서는 이를 복무부적합으로 판단하여 강제전역시켰다는 기사와, 그러한 상부의 지시에 수긍할 수 없어 본인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한 뒤 기자회견을 통해 부당함을 토로한 당사자에 대한 기사였다. 댓글은 예상한대로 그 부사관이 지나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성전환수술은 “신체훼손”에 해당하니 계약파기가 정당하다는 논리부터 “당신의 인권만큼 당신 동료들의 인권도 중요하다”는 뜬금없는 인권동등론까지 다양한 이유를 들어 남군에서 여군으로의 복무전환신청 기각에 찬성하는 의견이 이어졌다. 대체 남성의 성기가 국경을 방위하는데 있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혹은 남성의 성기를 포기하였다고 하여 함께 일하는 동료가 어떤 혐오감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한국사회에 쌓아올려진 단단한 벽의 거친 질감을 오랜만에 손으로 쓰다듬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쓸쓸해졌다.

한국사회가 문화적 갈라파고스섬으로 자신을 정의내린지 꽤 오랜 기간이 흐른 것 같다. 서울 시내에는 문신한 오빠들이 운영하는 힙한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지만 문 앞에는 어린아이를 받지 않는다거나 반려동물은 함께 할 수 없다는 문구가 당당히 걸려있는 경우를 많이 목격한다. 지하철 안에서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고 홍카콜라 유튜브 방송을 시청하는 할아버지는 무사히 그 날 하루를 마감할 수 있지만, 길거리에서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여성 연인들은 단단히 각오하고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2018년 WHO에서 발표한 인구 10만명 당 자살인구 비율 추정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여성 자살율은 15.4명으로 세계 2위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보다 여성이 높은 확률로 자살하는 나라는 레소토(Lesotho) 왕국이 유일한데, 1인당 GDP가 2천달러를 조금 넘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둘러싸인 가난한 국가다. 참고로 이곳의 인구 10만명 당 강간발생률은 90명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나라를 제외하고는 한국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여성이 더 자주 발생하는 나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면서 나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떠올렸는데, 19세기 유럽사회의 보수성과 21세기(심지어 원더키디가 나온다는 2020년이다) 한국사회의 보수성을 병렬적으로 연결시킨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이 부끄러움은 한국사회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자 부채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거부할 수 없고 청산해야만 하는 그런 성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실로 완벽한 영화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장면이 컷 단위로 완전하게 설계되어 있고, 카메라와 세트, 음악과 배우는 최선을 다해 감독이 설계한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배우의 표정 하나하나부터 세트의 구석진 곳, 거친 파도와 같은 자연환경까지 화면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영화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상징들이 침착하게 하나로 모여 엔딩씬의 엘로이즈(아델 에넬 扮)의 얼굴에 집중되는 순간 이 영화의 세계는 비로소 완성된다. 이 영화를 여성에 대한 억압적인 시선이 팽배해 있던 시대적 배경 하에 사랑을 나눈 여성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받아들인다면 조금 섭섭한 감이 있다. 영화는 그보다 훨씬 깊고 다양한 층위를 관객과 함께 나누고 싶어한다. 우선 형식적인 측면에서 남성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지금까지 영화 등 각종 예술장르에 관습적으로 내려져온 남성 중심적 시각에 도전하고 있다. 카메라의 시선은 등장인물 중 누군가의 시선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데, 영화의 처음과 끝에 도구적으로만 등장하는 남성 인물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건 여성의 주체성 관점에서 봐도 꽤 중요한 시도다. 기존 사회적 문법에 대한 형식적 도전은 억압적 기제(어머니)가 부재한 가운데 행해진 귀족과 하녀 간 평등한 관계 형성, 오르페우스 신화의 전복,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아카펠라 합창 등 서사구조 내에서의 다양한 변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적 구조와 형식, 서사와 이미지가 모두 하나의 통일된 주제의식 안에서 조화롭게 움직이는데, 그 모든 과정이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매우 독창적이기까지 하다.

개인적으로 다르덴 형제의 근작 [언노운 걸]에서 매우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주어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던 아델 에넬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이 배우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상대역으로 출연하여 역시 걸출한 연기를 선보인 노에미 메를랑을 가끔 아마추어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기운을 뽐낸다. 영화 속에서 오랫동안 쌓아올린 감정을 폭발시키는 엔딩씬은 배우의 연기가 조금만 틀어져도 굉장히 유치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는데 그 복잡한 감정까지 성실하고 치밀하게 표현해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저 감탄만 나왔다. 클레르 마통의 카메라도 매우 인상적이다. 이 카메라 감독이 찍은 또다른 영화 [애틀랜틱스]를 넷플릭스를 통해 접할 수 있다 하니 얼른 봐야겠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느껴진다.

다시 이 감상문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국사회에서 이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해보는 것은 이 사회의 폐쇄성을 고려할 때 분명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해외 언론이 한국의 문화적 보수성에 놀라워하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나라 눈치볼 필요 없이, 현재 한국사회 안에서 용인되는 소수자에 대한 관용의 정도가 너무 얄팍하지는 않나 하는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면, 이 아름다운 영화가 하나의 계기 정도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타오르는” 감정이 박제된 초상화 안에 갇혀 있음에도 훨훨 불타고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감정, 한국인들이 참 좋아하는 그 감정, 술 마시고 감정적이 되면 얼굴을 뭉개놓아도 자궁을 부셔놓아도 정상참작이 되어 형량도 줄어든다는 신비한 그 감정, 사회적으로 같은 인간 취급 못받고 소외당하는 소수자들에게도 그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보고 좀 알아봐 주었으면 한다. 아무리 억압하고 가두어놓아도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접어놓은 ’28쪽’은 영원히 기억되리라는 것도 함께 깨달았으면 좋겠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하면 트렌스젠더 군인을 강제전역시켰다는 그 뉴스의 댓글란에 글을 쓰고 좋아요를 누른 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사회에 하는 말이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페르난두 메이렐리스 | 두 교황

가장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가장 나중에 먹는 타입으로 살아왔다. 요즘에는 취향이 바뀌었다. 대부분의 식사를 아내와 함께 하다보니 맛있는 것을 뒤로 미루어두면 큰 일이 날 수도 있어 요즘에는 맛있어 보이는 것을 최대한 빨리 먹는 편이다. 무척 보고 싶은 영화는 요즘에도 조금 뒤로 미루어 두는 편이다. 스스로를 조바심내게 만드는 타입은 아닌데, 그 영화를 볼만한 더 나은 타이밍이 왠지 있을 것만 같아서다.

[두 교황]도 몇 주는 묵혀둔 것 같다. 넷플릭스에 최초 공개되기 몇 주 전부터 새로 나온 영화를 알려주는 기능을 켜두고 기다렸지만, 막상 영화가 공개된 뒤에는 차일피일 미루며 영화를 보지 않았다. 이 영화를 본 지인들이 괜찮았다 이야기해줄 때마다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고, 어서 빨리 보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했지만, 아내와 함께 가장 편한 상태에서 보고 싶어 미루고 미루는 과정을 반복하다 오늘에야 보았다. 몸이 무거워 밖에 잘 나가지 못해 답답해하던 아내를 데리고 천안에 가서 맛있는 보리굴비와 간장게장을 먹고 와서였기 때문일까, 오늘은 괜히 이 영화가 보고 싶었다.

[두 교황]은 [시티 오브 갓]으로 유명한 페르난두 메이릴리스 감독의 신작이다. [시티 오브 갓]이 나온지 벌써 15년 쯤 되었으니, 그동안 대표작을 갱신하지 못한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약간 빈약해보여 걱정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독의 영향력이 그리 크게 두드러지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작업에 참여한 앤써니 맥카튼(Anthony McCarten)의 촘촘한 대사들과 그 대사들을 완벽하게 빚어낸 두 배우, 조너선 프라이스(Jonathan Pryce)와 앤서니 홉킨스(Anthony Hopkins)의 연기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다. 실로 이 영화는 프라이스와 홉킨스의 연기에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 이 두 대배우는 그 무거운 짐을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으며 훌륭한 앙상블을 선보인다. 오히려 영화는 초반부 교황 베네딕도 16세와 주교 시절의 프린치스코 교황이 별장에서 처음 만나자마자 벌이는 대단한 설전에서의 팽팽한 긴장감을 제외하면 상당히 평이하게 흘러가는 편이다. 4:3 프레임에 흑백으로 처리되는 과거 회상 장면은 조금 진부하며, 중간중간 실제 녹픽션 화면이 삽입되는 것은 메이렐리스가 [시티 오브 갓]에서 활용했던 올드한 방식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독재 정권과의 관계에 대한 묘사는 고해성사라는 형식을 차용하여 지나치게 미화되어 표현된 듯 보인다. 마스터피스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구성의 영화를 살리는 것은 앞서 설명했듯 오로지 이 두 배우의 연기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연기란 것이 너무나 뛰어난 나머지 나와 같은 천주교 신자가 보편적으로 교황에게 느끼는 어떤 감정 – ‘성스럽다’라고 표현해도 될런지 모르겠다 –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세심한 대사 처리와 표정, 심지어 뒷모습만으로도 이 두 배우는 12억의 신자를 책임지는 리더로서 짖눌린 두 어깨의 무게감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교황의 고뇌와 보수적인 종교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 사이의 충돌 등을, 굳이 신자가 아니어도 한번쯤 생각하고 공감하게 만든다. 실로 대단한 연기를 본 것 같다.

2019년 정리 및 2020년 목표

2019년이 시작되면서 가졌던 목표는 세 개 정도였다.

  • 50권의 책을 읽고 50편의 영화를 보고 50장의 음반을 듣는다.
  • 아이를 갖는다.
  • 세 편의 논문을 게재한다.

대전-세종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부산스러운 아침과 피곤한 저녁 등 서울이 보통의 우리에게 안겨주는 무게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그렇게 주어진 여유를 문화생활에 조금 더 쏟고 싶었다. 1년이 52주이니 일주일에 책 한권, 영화 한편, 음반 한장 정도를 즐기는 것은 가능하지 않나 하는 ‘현실적인’ 목표도 설정해 보았고. 이 블로그에 남겨진 기록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목표를 썩 성공적으로 달성하진 못했다. 총 32장의 음반, 36편의 영화, 24권의 책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물론 기록으로 남기진 않았지만 학교를 오고가며 들었던 음반은 이보다 훨씬 많고, 드라마와 TV쇼까지 포함하면 36편보다 훨씬 더 많은 작품을 보았으며, 논문까지 포함하면 24권보다 훨씬 더 많은 글을 읽었다, 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ㅠ 궁색한 변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세 편의 논문도 게재하지 못했다. 한 편만 올해 발표되었고, 올해 게재 확정되었으나 내가 알지 못하는 학회지 내부적인 이유로 인해 내년으로 발표가 미루어진 논문이 한 편 있을 뿐이다. 학자로서 부끄러운 성적표다. 유일하게 달성한 목표는 임신인데, 한 명도 아니고 쌍둥이를 임신했으니 이 목표 만큼은 초과달성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게 출산해야 확실히 성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2020년에도 목표를 설정해본다. 사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우리의 품에 안겨 건강히 자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요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개인적인 목표를 상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늘 기분 좋은 긴장감을 선사하니, 새해 첫날 이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 2편의 ‘무거운’ 논문과 2편의 ‘가벼운’ 논문을 쓴다. 논문 투고 프로세스는 신의 뜻에 맡기기로.
  • 건강한 2명의 아이를 맞이하여 건강하게 키운다. 수면의 질은 신의 뜻에 맡기기로.
  • 2019년보다 조금 더 많은 책을 읽는다.

2020년은 확실히 잠을 적게 잘 것 같다. 그래도 좋으니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