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바움백 | 결혼 이야기

노아 바움백 감독을 ‘작가’ 반열에 올리는 영화팬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프랜시스 하]로 화려하게 복귀하기 전까지는 웨스 앤더슨과의 협업으로 더 많이 알려졌고, [프랜시스 하] 이후 내놓은 작품들도 기대에 많이 못미쳤기에, 그에게 무엇이 더 남았을까, 하는 점이 사실상 내가 그에 대해 가진 거의 유일한 궁금증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올해 나온 [결혼 이야기]는 그의 영화 커리어에 하나의 전기로 기록될만하다. 정식 개봉 전부터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손꼽혔고, 두 주연 배우의 호연 만큼이나 감독의 치밀한 조립능력과 치열한 시선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영화는 매우 뛰어나다. 과거 보아왔던 노아 바움백의 영화들과 그 무게감에서 차원을 달리 할 뿐 아니라 영화의 ‘결’도 전작들과 살짝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각본이 갖는 무게감이 전작들과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상당히 일찍 캐스팅된 두 주연배우, 그리고 또 다른 여성작가와 함께 각본을 함께 구성했다고 하는데, 이 덕분에 과거 바움백 영화들이 고질적으로 드러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문제에서 탈피한 것처럼 보인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류승완 감독의 영화 중 거의 유일하게 서사라는 형식을 가진 [부당거래]가 류감독의 손을 거치지 않은 각본 덕분에 탄생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또다른 이유라면 바움백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인 바움백은 이혼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출신의 그레타 거윅과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본인의 이야기이기에 조금 더 깊은 수준에서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노아 바움백은 이 영화를 통해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게 되겠지만,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이 작품 이후 바움백의 필모그래피가 엄청 화려하고 멋질 것이라는 기대는 크게 갖지 않게 된다. 이 영화는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라는 두 걸출한 배우가 바움백의 디렉팅과 만나 환상의 합을 보여주는 와중에 탄생한, 행운과도 같은 작품이다.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그녀는 [어벤저스] 시리즈 등으로 소모된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매우 뛰어난 연기파 배우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스스로 증명해낸다. 그동안 헐리우드 팝콘 무비에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쉽게 발견하기 힘들었던 복잡한 내면연기를 영화 내내 보여주는데, 한 배우의 절정을 목격한 느낌이 들어 감사한 마음마저 생겼다. 아마도 바움백이 후세에 칭송을 받는다면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좋은 배우의 대표 영화를 연출했다, 라는 이유가 반드시 따라올 것이다. 아담 드라이버는 요즘 상당히 자주 접하게 되는 배우인데, 그만큼 작품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고 배우로서의 역량도 최고조에 다다른 듯한 인상도 받지만, 이 영화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연기를 했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패터슨]에서의 아담 드라이버가 훨씬 좋았다. 다만 극중 찰리의 LA 임시 거처에서 요한스닝 분한 니콜과 격정적으로 싸우는 시퀀스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훌륭했다. 영화에서 좋은 액션을 받쳐주는 것은 좋은 리액션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애덤 드라이버는 참 좋은 배우임이 확실하다. 아마도 많은 여성 관객이 좋아할 니콜의 변호사 노라 캐릭터는 주변에서 들어온 호평만큼 깊게 와닿진 않았다. 주도면밀한 비즈니스맨 그 이상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이상으로 캐릭터에 깊이 빠진 팬들이 많아 그 이유가 오히려 궁금해졌다. ‘위닝 워먼’에 대한 판타지 때문인지, 혹은 그런 캐릭터가 전시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쾌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에 존재하는 이런 여성은 ‘위닝 비즈니스워먼’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닌 경우가 많다.

아내와 함께 이 영화를 봤다. 이제 우리가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이 영화의 주제라던가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삶의 궤적 위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게 느껴졌다. 니콜이 이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도 절절하게 이해가 되었으며, 찰리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이혼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니라는 점, 찰리가 뉴욕과 그의 극단에 집착하며 LA를 적대시하는 점 모두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었다. 찰리가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니콜이 조금만 더 일찍 자신을 아끼고 희생을 거부했다면, 이 부부는 슬기롭게 위기를 겪지 않고 계속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멍청한 한 부부가 우스꽝스럽게 이혼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히 사려 깊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가족을 지극히 아끼는 한 부부가, 결국 넘을 수 없는 어떤 벽에 가로막혀 고통스러운 이혼과정을 감내해가는 이야기다. 영화의 포스터처럼 한 때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삶과 가족이 이제는 극복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장벽으로 다가올 때,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는 한 개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다’는 말은 그 자체로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런건 없다. 그 누구도 어른이 될 수 없다. 다만 조금씩 더 배워나갈 뿐이다. 그래서 과거의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영화는 바움백의 전작들이 했던 그런 이야기를, 아주 현명한 방식으로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있다.

마틴 스콜세지 | 아이리시맨

마틴 스콜세지(공식 한국어명은 ‘스코세이지’인 것 같은데 영 어색하다) 감독의 2019년 영화 [아이리시맨]은 세시간 30분 가까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긴 영화다. 상영시간이 ‘길다’라는 묘사가 이 영화의 핵심에 맞닿아 있기에 흥미로운 영화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넷플릭스 영화 – 휴대폰으로 딴 짓을 하면서 곁눈질로 보기도 하고 냉장고에서 먹을 것을 꺼내오는 동안 잠시 멈추어 두기도 하는 등 – 와는 다르게 그 긴 상영시간동안 오롯이 영화의 세계를 체험하며 바깥세상을 잊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신비로운 영화이기도 하다.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으며 형식적으로 단 한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영화이기도 한데, 바로 그러한 특성때문에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한계까지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를 위한 영화라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작품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야기하고 있듯, 이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가 2019년에 만들었다는 점때문에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데, [어벤저스] 시리즈를 두고 “영화(cinema)가 아니다”라고 비판한 스콜세지가 지금까지 80년 가까이 쌓아올린 ‘영화’에 대한 지식이 총망라되어 전시되어 있다. 물론 나는 그가 믿는 영화(cinema)와 [어벤저스] 시리즈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movie)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극장의 스크린에 걸리거나 넷플릭스 등의 사업자를 통해 안방 TV로 배달되는 영상매체라는 속성은 동일하지만,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에서 이익창출을 위해 탄생한 상품으로서의 영화와 비상업적인 목적 하에 음악-미술-음향-의상 등 모든 종류의 현대예술의 교배를 통해 탄생한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는 분명 그 뿌리를 달리한다. [아이리시맨]은 스콜세지와 그의 오랜 친구들이 믿어온 예술로서의 영화가 어떻게 지금까지도 굳건히 버텨낼 수 있는가를 증명함과 동시에 그가 살아온 한 시대를 아름답게 종결하는, 위대한 결과물이다. 

[아이리시맨]에 대해 할 말이 참 많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앉아 하루종일 이 영화에 대해 떠들고 싶을 정도로 영화의 모든 순간, 모든 컷, 모든 씬, 배우의 표정 하나까지 보물같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스콜세지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그의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성에 대한 관대함, 여성 캐릭터의 의도적인 배제, 혹은 도구로서 존재하는 여성 캐릭터,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장면구성과 클로즈업의 빈번한 사용 등이 나의 구매욕구를 떨어뜨려왔다) 마피아영화나 갱스터영화는 한국의 조폭영화와 함께 가장 진부한 장르로 생각하는 편식적인 영화취향 탓에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한시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하다. 두 시간 반 가까운 시간동안 인물을 차근차근 소개하고 인물 간 관계를 충실히 설명하며 ‘빌드업’해온 영화가 갑자기 영화적 리듬, 혹은 호흡을 확 떨어뜨리며 프랭크(로버트 드 니로 분)의 눈동자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으며, 그 심상치 않은 일이란 역사적으로 이미 발생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로 사건이다. 흥겨운 스윙재즈풍의 노래들과 마피아들의 떠들썩한 수다로 가득 채워졌던 영화가 디트로이트 교외의 한적한 모텔을 배경으로 등장인물에게 무거운 침묵을 툭 던져주었을 때부터 우리는 이 영화적 세계가 완성단계에 다다랐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영화가 마무리되는 과정은 ‘이것이 대가의 솜씨구나’라는 탄성이 나오기에 충분할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이 한 시간은 비단 이 영화 안에서 창조된 세계가 마무리되는 한 시간이 아니라, 프랭크가 회고하는 프랭크와 러셀, 지미 등 주요인물이 경험해온 몇십년의 세월이 마무리되는 시간이기도 하며, 그들이 겪어온 세월이란 감독 스콜세지가 경험한 지난 몇십년 간의 영화의 역사를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철학적 주제를 시간으로 추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먼저 70세를 훌쩍 넘긴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등이 컴퓨터의 힘을 빌어 40대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흥미롭다고 하기엔 애처로운 감정부터 불러 일으킨다. 얼굴은 디에이징(de-aging)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배우들의 육체는 여전히 노년 그대로이기에 액션씬에서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데,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는 자신의 [필름클럽] 팟캐스트에서 이조차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영화의 대주제로 설정한다면 충분히 이해가능한 부분일 뿐 아니라 이 대배우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관객으로 하여금 독특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좋은 수단이라며 옹호하였다. 나는 그의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스콜세지가 드 니로, 파치노, 페시 등과 함께 실화를 배경으로 한 마피아영화를 만든다’는 문구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이 문구에 세시간 30분의 상영시간과 넷플릭스라는 배급사 정보까지 더해지면 영화를 보기 전부터 지루함과 진부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스콜세지가 만든 이 영화가 위대한 이유는 이와 같은 영화 외적인 피상성을 오로지 영화 내부의 완성도만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동일한 배우가 몇십년에 걸쳐 한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냄으로써 이 영화가 단지 지미 호파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실존인물에 관한 흥미로운 서사시에 그치지 않고 영화 그 자체의 역사, 혹은 필름메이킹이라는 작업과정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아우르는 거대한 담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대주제를 ‘시간’으로 본다면 프랭크의 딸 페기(안나 파퀸 분)의 존재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페기는 폭력을 도구 삼아 생계를 이어나가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와의 관계를 서서히 끊어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속한 폭력의 세계를 그저 바라만 볼 뿐 그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중에는 대화마저 단절하며 프랭크의 세계에서 완전히 떠나버린다. 페기 캐릭터가 갖는 이와 같은 속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게 한다. 예컨대 신이나 천사같은 존재 말이다. 이들은 인간이 갖는 유한성, 즉 시간으로 상징되는 한계에서 자유로운 존재다. 프랭크와 러셀(조 페시 분), 지미(알 파치노 분)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분투하는 동안(영화의 메인 시제, 즉 프랭크와 러셀 부부의 자동차 여행기간 동안 러셀과 프랭크는 많은 곳에 들려 수금을 한다. 지미 역시 출소 후 노조 위원장 자리를 되찾기 위해 생명에 대한 위협까지 무시하며 이곳 저곳을 들쑤신다. 노인이 된 ‘현재’까지도 이들은 몇 푼의 돈과 알량한 자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페기는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이들이 흘려보내는 시간을 가만히 주워담는다. 어쩌면 스콜세지 감독이 도달한 영화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지는 바로 신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흥미로운 상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고 해서 이 영화에 단점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폭력에 대한 지나친 관대함은 이 영화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주인공 프랭크는 시대의 관찰자 역할을 부여받지만, 그가 살아온 시대가 아무리 폭력과 비양심의 시대라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승승장구해온 그에게 영화 막바지 – 아주, 너무나 인간적인 – 회한의 감정을 극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미묘한 불편함을 발생시킨다. 현실을 뒤튼 블랙코메디라고 하기에는 그의 감정적 동요가 영화 안에서 상징하는 바가 너무 크다.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여성 캐릭터는 부분적이고 주변적이며 한계적으로 그려진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부분이다. 페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여성도 다층적인 차원에서 그려지지 않는데, 이건 스콜세지가 세 주인공에게 거의 모든 영화적 에너지를 쏟아붓기 위해 선택한 의도적 무시라고 백번 이해한다 해도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영화 내에서 완벽하게 여성적인 색깔이 지워져 있다. 물론 이런 단점은 영화 전체적인 맥락에서 충분히 용서될 수 있을 정도로 단편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이 영화에 별 다섯개를 줄 수 없다거나 ‘올해의 영화’로 선택하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면 아마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리시맨]은 여전히 매우 좋은 영화다. 이건 확실한 사실이다. 

브라이언 그린 | 우주의 구조

나는 ‘문돌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꽤 다양한 상황에 “문송합니다”를 속으로 외쳐야 한다. 공학자들이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나사(NASA)가 지구 밖으로 위성을 쏘아올리며 인류의 진화에 기여하고 있을 때 하릴 없이 물가상승률의 근원 따위를 고민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음에 죄책감을 느낄 때가 많다. 나처럼 뼛속까지 문과생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에게 과학, 그 중에서도 ‘N차원’의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수학과 물리학이 선사하는 장벽의 높이는 어마어마하다. 당장 내일 뭐 먹을지 고민해야 하는 미생인 우리에게 우주의 탄생이니, 힉스장이니 하는 소리는 얼마나 멀게 느껴지는가.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하루 하루의 일상이 블랙홀의 엄청난 중력장이나 1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초끈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물리학의 어려운 이론들은 더이상 나를 좌절시키는 장벽이 아니라 반드시 이해하고 싶어지는 무궁무진한 진리의 바다가 된다.

[엘리건트 유니버스]를 쓴 초끈이론의 대가 브라이언 그린의 2005년 저작 [우주의 구조]는 나와 같은 ‘물포자’ 혹은 ‘수포자’들도 쉽게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게 쓰인 우주물리학 입문서라 할 수 있다. 책은 우주의 구조를 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을 시간순으로 따라간다. 뉴튼, 아인슈타인, 양자역학, 초끈이론까지, 우주물리학의 혁명적인 진화를 발생시킨 이론들에 대해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하는데, 특히 3차원 이상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같은 일반인들을 위해 현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예를 그림과 함께 제시함으로써 대략적인 감 정도는 잡을 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저자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뉴튼의 고전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특수/일반 상대성 원리는 나도 어디서 조금이라도 들어본 것이 있으니 그나마 따라갈 수 있겠다 생각했지만 왠걸, 내가 알던 그 이론들이 아니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과학자들이 그 바닥(?)에서 발전을 이루어내기 위한 중요한 주춧돌이었다는 사실을 접할 때에는 나의 영웅인 거시/금융경제학계의 거장 마이클 우드포드나 조르디 갈리도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겠구나 싶어 가뜩이나 커져만 가는 겸손함이 한번 더 극적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뉴턴-아인슈타인-양자역학을 지나 초끈이론에 다다를 때 쯤이면 각 이론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극적으로 달라져 과연 어느 이론에 내 우매한 머리를 기대어야 하는지 혼라스러울 지경이 되었다.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워낙 달리는터라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수많은 페이지에 종이 플래그(flag)를 붙여 가며 한문장 한문장 따라가다 가로막혀 앞의 페이지를 다시 복습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아주 희미하게나마 우주물리학의 큰 흐름이 보이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좋은 교양서이고,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Sleater-Kinney | The Center Won’t Hold

슬리터-키니(Sleater-Kinney)의 2019년 음반 [The Center Won’t Hold]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세인트 빈센트(St.Vincent)가 프로듀스했다. 1995년부터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물론 중간에 10년 정도의 공백기가 있었지만) 전설적인 밴드 슬리터-키니와 2010년대 인디씬에서 가장 핫한 뮤지션 세인트 빈센트의 협업이라 하면 일단 가슴이 뛰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 결과물은 너무나 일방적인 세인트 빈센트의 음악이라 실망스러운 마음부터 드는 것이 사실이다. 노이지한 기타 사운드를 중심으로 그런지 음악의 한복판에 섰던 슬리터-키니의 음악을 만질 수 있다는 생각에 현시대에서 가장 독창적인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는 세인트 빈센트의 가슴도 많이 뛰었겠지만, 의욕이 앞선 나머지 대선배가 쌓아올린 과거의 유산을 말끔히 지워버리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물론 개별적인 노래들은 무척 매력적이다. 최근 세인트 빈센트의 음악세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레이저칼같은 기타사운드와 댄서블한 리듬, 귀를 찢는 듯한 보컬 등이 그대로 [The Center Won’t Hold]에 담겨 있다. “Bad Dance”같은 트랙은 2019년 최고의 싱글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섹시하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슬리터-키니의 2019년 음반으로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라고 누군가 질문한다면 “거의 아무것도”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프로듀서의 영향으로 인해 단기적으로 섹시한 음반을 뽑아낸다 하더라도 그 효과는 오래 갈 수 없다는 교훈은 마이 케미컬 로맨스(My Chemical Romance)의 사례에서 이미 명백히 증면된 바다. 물론 [Black Parade] 이후 거의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사라져간 젊은 밴드와 25년 이상 음악을 해온 관록의 밴드를 액면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슬리터-키니가 세인트 빈센트에 잠식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이 음반은 참 좋다. 잘 만든 음반이다. 다만 세인트 빈센트의 B-Side 작업물처럼 느껴질 뿐이지만.

Angel Olsen | All Mirrors

엔젤 올슨(Angel Olsen)의 커리어는 막힘이 없다. [Burn Your Fire for No Witness]와 [My Women]으로 인디록 장르에서 이룰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성취한 그녀가 2019년에 발매한 [All Mirrors]에서 가고자 하는 길은 그 방향성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존재한다. 조금 더 웅장하게, 조금 더 화려하게, 조금 더 다층적인 차원으로. 전작에서 약간의 신서사이저 음향을 도입하기 시작한 올슨은 이번 음반에서 신스 음악과 오케스트레이션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는데, 덕분에 [My Women]까지 간직하고 있던 초창기 로-파이한 정체성은 이번 음반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My Women]이 거친 입자의 필름 카메라로 찍은 헨드 헬드 인디영화에 가까웠다면, [All Mirrors]는 디지털 카메라로 깔끔하게 촬영한 촬영한 시대극 – 많은 엑스트라와 화려한 의상이 함께 하는 – 느낌이 든다.

음반 전체적으로 엔젤 올슨이 가진 아티스트로서의 야심이 강하게 느껴진다. 몇몇 노래는 그 욕망을 충실히 실현시켜주는 좋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상당히 느린 속도의 점층적 구조로 쌓아올린 “Lark”와 오케스트레이션을 주된 도구로 활용한 “Tonight”은 올슨 음악의 외형이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개인적으로는 전작의 “Shut Up Kiss Me”같은 노래에서 보여준 올슨만의 재기발랄하고 담대한 트랙이 발견되지 않아 아쉬움이 느껴진다. 후기를 보면 원래 하나의 노래를 상이한 버전으로 두 번 녹음하여 더블 앨범으로 발매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녹음을 진행하면서 현재의 버전만을 싣기로 결정했다고 하는데, 다른 방식으로 편곡을 거친 노래들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살짝 궁금해진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올해의 음반으로 거론하고 싶어하겠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경로 안에서 안전한 방식을 택하여 화학적인 진화만을 이루어냈다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듯 하다.

FKA twigs | Magdalene

남들과 다른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예술가가 어린 시절의 변곡점을 무사히 통과하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비로소 완성시켰을 때, 우리는 그가 “브레이크 아웃”하는 순간을 목도하게 된다. 한 때 트윅스로 불리운 여자(FKA twigs), 혹은 탈리아 바넷(Tahliah Barnett)은 지금 그러한 순간을 우리에게 드러내보이고 있다. [Magdalene]은 그녀의 음악세계가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게 될 첫번째 음반이자 아마도 2019년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중요한 음반으로 기억될 확률이 높다. 개인적으로 [LP1]이 더 훌륭한 음반이라고 생각하지만, [Magdalene]은 트윅스가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비로소 대중의 기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분명 유의미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트윅스가 음반 단위로 평가되거나 소비되는 방식이 그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는데, 그 이유는 뛰어난 음악가임과 동시에 뛰어난 안무가, 뛰어난 스토리텔러, 혹은 독보적인 페미니스트이기도 한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반을 그냥 플레이시키는 차원을 넘어서 보다 다층적인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트윅스가 구현하는 섹슈얼리티는 음향으로, 멜로디로, 그녀의 춤으로, 의상으로, 가사로, 혹은 특유의 분위기 그 자체로 청자에게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마조히즘과 페미니즘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트윅스라는 몸뚱아리 안에서 하나로 융합되는 과정이 신비롭게도 자연스럽게 이해되는데, 이건 단순히 헤드폰을 끼고 음반을 반복해서 듣는다고 해서 가능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존하는 대중적인 설득력을 가진 음악가 중 가장 진보적이며, 또한 가장 도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