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y Som | Anak Ko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90년대 중후반 경, 많지 않은 용돈을 매달 쪼개 사 읽었던 음악잡지 [Sub]에 한번은 미국에서 활동 중인 아시아계 인디 뮤지션들에 대한 특집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한국계 박수영이 이끌던 밴드 심(Seam) 정도가 당시 잡지에서 주목하던 대상이었는데, “너무 배고파 먹고 살기 힘들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 우울한 인터뷰 기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후 모두가 알다시피 미국의 인디씬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미츠키(Mitski)와 제패니즈 브렉퍼스트(Japanese Breakfast)의 미셸 자우너(Michelle Zauner)로 대표되는 아시안-어메리칸 인디록이 당당하게 씬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이들이 자신의 음악을 ‘아시아’라는 카테고리에 묶는 것에 동의할지는 모르는 일이나, 백인 일변도에 스패니쉬와 아프리칸-어메리칸이 구색을 맞추는 정도였던 씬의 인종적 구성이 이들에 의해 조금 더 활기찬 다양성을 가지게 된 것만큼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아시아’라는 수식어보다 위 두 뮤지션의 음악적, 사회적 의미를 더 잘 부각시킬 수 있는 단어는 ‘여성’일텐데, 요즘 가장 창의적이고 진보적이며 뛰어난 완성도를 가진 ‘올해의 음반’을 만든 뮤지션들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아시아-여성이라는 미국 내 마이너리티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 자체가 이들로 인해 조금은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이들과 궤를 같이 하는 뮤지션이 필리핀 이민자 가정 출신 멜리나 두테르테(Melina Duterte)의 무대명 제이 솜(Jay Som)일 것이다. 제이 솜은 캘리포니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멀티-인스트루먼탈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로, 앞서 언급한 미츠키나 미셸 자우너와 음악적 파트너쉽을 넘어서는 단단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올해 여름 즈음 세번째 정규음반 [Anak Ko]를 발매했는데, 전작들에서 드러난 약간의 아쉬움이 말끔히 지워질 정도로 상당한 음악적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음반 발매 직전에 발표한 싱글 “Pirouette”는 깜짝 놀랄 정도로 풍성한 사운드를 자랑하는 아름답고 댄서블한 드림팝 노래였는데, 이번 음반에서는 이러한 느낌이 보다 정갈하게 정돈되어 음반을 반복해서 듣게 만드는 본연의 매력으로 기능하고 있다. 덕분에 여름부터 가을까지 참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잘 ‘정돈’되어 있다고 표현한 것은 노래와 노래 사이의 간격이 그리 멀지 않고 음반의 전체적인 흐름이 유기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개별적인 노래가 독립적으로 갖는 응집력 또한 전과 다르게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음반명인 ‘anak ko’는 필리핀어로 ‘my children’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첫 곡 “Superbike”부터 유년시절을 회고하는 가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콕토 트윈스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을 떠올리게 하는 복고적 감수성의 기타 사운드와 썩 잘 어울리며 회고적 감수성을 기분 좋게 자극한다. 두번째 노래 “Peace Out”는 다소 어두운 분위기에서 제이 솜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멜랑콜리한 멜로디라인이 빛을 발하는, 어쩌면 스매싱 펌킨스가 떠오를 수도 있는 인디록 넘버이고, 아마도 음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일 “Nighttime Drive”에서는 연인(혹은 친구)과 함께 캘리포니아의 밤거리로 차를 몰고 나갈 때의 청량한 느낌을 음악적으로 100% 느낄 수 있다. 홀푸즈에서 절도행위(?)를 하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하다가도 마냥 어린아이처럼 깔깔거릴 수만은 없는 현실을 자각하기도 하는, 이 음반이 전체적으로 담고 있는 ‘달콤쌉사름’한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 음반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을 고르라면 아마도 멜로디 라인과 함께 제이 솜 음악의 창의성을 담당하고 있는 핵심적인 두 요소 중 하나인 기타 사운드일 것이다. 음반의 타이틀곡 “Anak Ko”는 짧은 시간에도 기타를 중심으로 감정을 고조시키고 음악의 구조를 완성시켜나가는 제이 솜의 뛰어난 작곡/편곡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곡이다. 그리고 제이 솜의 전작들과 가장 강한 연결고리를 가진 노래는 아마도 “Crown”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음반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고, (비록 “인디가 이래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지만) 미국 인디씬의 현재를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기타 솔로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이 음반에는 많은 동료 여성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가본(Vagabon)의 래티시아 탐코(Leatitia Tamko)다. 배가본의 이번 신작 역시 이 글에 언급한 미츠키, 제패니즈 브렉퍼스트, 제이 솜과 더불어 넓게 보면 여성-이민자 예술의 한 흐름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작품이다. 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