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gabon | Vagabon

올뮤직(allmusic.com)에서 배가본(Vagabon)의 디스코그래피를 검색하면 2019년 발매된 음반을 두 건 발견할 수 있다. 똑같은 음반 커버와 똑같은 수록곡을 가진 이 두 음반은 사실 한 음반이다. 배가본의 두번째 음반은 원래 [All the Women in Me]라는 이름을 달고 발매될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곧 [Vagabon]으로 이름을 바꾸어 10월 18일 정식발매되었다. 위의 공식 음반 사진에도 ‘All the Women in Me’ 글귀가 찍혀 있는걸 보면 정말 급하게 음반명을 바꾼 것처럼 보인다. 카메룬 이민자 가정 출신 뮤지션 레티시아 탐코(Laetitia Tamko)는 이번 음반에서 ‘세상의 모든 여성’과 베가본(방랑자, 떠돌이 등의 의미를 갖는 ‘vagabond’의 의도된 오타로 보여지는)이라는 무대이름을 갖는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작은 해프닝으로부터도 많은 추측을 하고 싶게끔 만드는 이 음반은, 우선, 음악이 무척 좋기 때문에 계속 듣게 되는 매력이 있다.

전작 [Infinite Worlds]는 단 8곡이 22분의 짧은 시간 안에 수록된, 배가본이라는 뮤지션을 세상에 소개하는 간략한 안내서였다. 아마도 배가본 본인에게는 음악을 통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다는 의미 역시 컸을, 그래서 인디록과 포크를 기반으로 한 로파이하고 성긴 감성의 노래들이 다수를 차지할 수 밖에 없었던 음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던지는 간결하고 묵직한 메시지와 옹골찬 에너지는 인상적이었다. 후속작 [Vagabon]은 일단 더 길고(38분), 형식적으로 훨씬 세련되어졌다. 전작을 발매하고 떠난 투어 여행 중 호텔에서 랩탑을 이용하여 만든 곡들이 주로 실려있다는 정보를 알고 나면 그래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대부분의 노래들은 조용한 방에서 헤드폰으로 들으면 좋을 정도의 적당한 포근함과 조용하고 내성적인 보컬, 전자음악의 힘을 상대적으로 많이 빌린 부드러운 편곡 등을 주된 인자로 하고 있다. 가사도 조금 더 자기성찰적이고 사색적이며 은유적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되는 가운데 그 한가운데에 여성으로서의 깊은 자각이 자리잡고 있다. 배가본이 음악적으로나 내면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루어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음악 스타일이 많이 바뀌어서 놀란 팬들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이 변화를 ‘성장’의 관점에서 읽어내고 싶다. 다음 음반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킬링 트랙도 꽤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다. 캐치한 싱글컷으로도 손색이 없을 “Water Me Down”은 물론이고 음반을 여는 첫 곡 “Full Moon in Gemini” 등에서 전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어떤 낭만, 혹은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Full Moon in Gemini”는 음반의 마지막에서 뮤지션 모나코(Monako)에 의해 수미쌍응처럼 되풀이되는데, 조금 다른 분위기로 음반을 마무리짓는 과정이 흥미롭다. 개인적인 베스트 트랙은 “Flood”인데, 우선 이정도로 담대한 사운드스케이프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놀랐고(또 대견했고), 이 짧은 곡 안에서도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며 지루한 틈을 1초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미있었다.

제니퍼 리, 크리스 벅 | 겨울왕국 2

다양성. 최근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일종의 생존전략이다. [모아나]와 [코코]에서는 지금까지 만화속 주인공 역할에서 꾸준하게 소외되어 왔던 유색인종과 비백인 문화권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토피아]와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이 영화철학의 근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주제의식이 된다. [겨울왕국]은 남자’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꽤 인상적이었는데, 안나와 엘사라는 젊은 자매가 전면에 나서는 가운데 남자 캐릭터들은 찌질한 악당이나 충실한 사이드킥으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디즈니 에니메이션이 대단히 진보적인 사상을 충실하게 실현하는 그런 존재는 아니라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여전히 전 세계의 모든 여자 아이들은 엘사의 여성스러운 흰색 드레스에 열광한다. (물론 [겨울왕국 2]에서는 엘사가 바지를 입는다는 점에서 약간의 발전을 내비치지만, 디즈니의 ‘진보’는 딱 이정도 수준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기도 한다) [코코]와 [인사이드 아웃]이 그토록 찬란하게 펼쳐 놓았던 서사구조의 마지막 지점에는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로의 공손하게 회귀본능이 존재한다. 최근 가장 성공적인 프랜차이즈였던 [토이스토리]는 4편에 이르러 결국 새로운 세상으로의 확장을 이루어내지만, 이 역시 ‘정상’적인 남성 장난감과 여성 장난감 간의 이성적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아주 혁신적인 엔딩은 아니었다.

디즈니는 항상 이 정도의 애매한 성장을 이루어내면서 생존해왔다. 그 성장의 정도가 사회철학, 혹은 사회적 가치의 성장속도보다 느릴 때에는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 문제는 그 반대의 경우에도 그리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겨울왕국]처럼 이미 공고하게 형성된 새로운 페러다임 – 여성 중심의 서사 – 에 엘사의 목소리와 같은 킬러 컨텐츠를 살짝 끼얹는 방식의 ‘수요 맞춤 전략’이 통할 때에만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셈이다. [겨울왕국 2]는 약간 뒤따라 가는 느낌이다. 여전히 엘사는 압도적이고 안나는 진취적이며, 남자 캐릭터는 수동적이다. 개그를 담당하는 캐릭터들은 마치 그렇게 태어나기라도 한 것 마냥 웃기는 데에만 집중한다. 결말은 누구나 알고 있듯 해피엔딩이지만,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는 더이상 아닐 것이라는, 누군가는 희생을 할 것이라는 사실도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이런 구도는 이제 식상하다. 새로운 것이 없다. 이 사회는 이미 현실에서 그러한 가치들을 충분히 실현하고 있다. 에니메이션은 상상력이 극대화된, 현재의 사회가 가고 싶어하는 아주 가까운 미래의 세상일 것이고, 그 상상력이 이미 현실이 되어 영화 속에서 구현될 때 우리는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겨울왕국 2]의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발견되는 ‘하품 포인트’는 이 영화에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엘사가 다시 한번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드레스를 꺼내 입기 위해서는, 디즈니가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판이 필요한데, 현재의 디즈니에게는 그걸 세상에 역으로 먼저 제시할 정도의 역량은 없어보인다. [겨울왕국 3]는 이 사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꽤 많이 움직였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Nick Cave and the Bad Seeds | Ghosteen

닉 케이브는 항상 좋은 음악을 낸다. 지난 40여년 간 항상 그래왔다. 닉 케이브를 전혀 듣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닉 케이브의 음악을 듣기 시작하다 중도에 관두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내가 그런 경우다. 닉 케이브의 이름을 기억한지는 꽤 오래 되었지만, 최초로 구입한 음반은 2001년작 [No More Shall We Part]였다. [Murder Ballads], [Let Love In], [The Good Sun]같은 초-중기 걸작을 그냥 지나친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거의 모든 음반을 구입해 듣고 있다. 그리고 단 한번도 실망하지 않았다. 2019년에 발매된 17번째 음반 [Ghosteen] 역시 마찬가지다. 우선 이 음반이 올해의 음반 목록에 들어갈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부터 미리 기록해두고 시작해야겠다. 이 음반은 그냥 ‘죽이게’ 좋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아야 할 부분들이 참 많다.

3년 전 발매된 [Skeleton Tree]는 닉 케이브의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과 맞물려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물론 이 음반에 수록된 거의 모든 곡들이 아들의 죽음 이전에 쓰여졌고, 오직 몇몇 부분만이 음반의 마지막 녹음 일정 당시 닉 케이브에 의해 즉흥적으로 수정되었을 뿐이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 음반과 ‘죽음’을 직접적으로 연결짓고 싶어한다. 2017년 투어가 끝난 후 닉 케이브는 곡을 전혀 쓰지 않았는데, – 우리가 보통 닉 케이브의 천재성만을 기억하느라 잊고 있던 – ‘The Bad Seeds’의 한 축을 담당한 키보디스트 콘웨이 새비지(Conway Savage)가 뇌종양 선고를 받게 된다. 그는 1990년부터 닉 케이브와 함께 한 오래된 동료였는데(아마 동료 이상의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암 선고를 받고 1년 뒤 숨을 거두었다. 이후 다시 시작된 닉 케이브의 작업의 결과물로 탄생된 [Ghosteen]은 (당연히) 콘웨이 새비지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니까 죽음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 닉 케이브의 최근 작업물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Skeleton Tree]보다는 [Ghosteen]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 음반은 밴드 역사에서 약 15년만에 처음으로 더블 음반으로 기획되었다. 첫번째 음반에는 총 여덟곡이 실려 있는데 닉 케이브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자식들(the Children)”의 노래이고, 음반의 두번째 장에 실린 세 곡은 “부모들(the Parents)”의 노래에 해당한다고 한다. 음반에 실린 노래들은 전작들과 달리 무척 정적이다. 앰비언트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운데 신디사이저와 키보드가 음악을 주도하고 드럼과 베이스는 보조를 맞추는 정도에 그친다. 바리톤에 가까웠던 닉 케이브는 팔세토 창법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낭독(spoken words)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극적인 부분을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물론 미치도록 아름다운 순간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닉 케이브의 음악의 핵심으로 남아있다. “Bright Horses”를 듣고 가슴이 울리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40년 가깝게 활동을 지속해온 뮤지션이 “Galleon Ship”같은 젊디 젊은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Night Raid”가 선사하는 따뜻함은 전과 달라진 닉 케이브 음악만이 주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가사 역시 음악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방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각 노래마다 명확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것이 특징이었던 닉 케이브의 작사법은 2015년(그러니까 아들이 죽던 해)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고 하는데, “하나의 직선 위에 마치 이야기의 흐름처럼 흘러가는 것이 삶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오스에 가깝다”는 닉 케이브의 말처럼 가사는 분절적이고 조금 더 은유적이며 표현은 대담해졌다.

아마도, 아직까지도, ‘닉 케이브는 너무 올드하고, 나랑은 잘 맞지 않아. 선뜻 내키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한번 빠지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음악이 닉 케이브이고, 나는 지금 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엉뚱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봤다. 닉 케이브가 일본에 태어났다면? 아마 류이치 사카모토가 되어 있을 것이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호주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닉 케이브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둘이 공통분모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다른 장르의 음악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둘이 공유하는 음악적, 미적 요소가 꽤 많다고 생각한다. 하나만 예로 들면 신디사이저에 대한 깊은 이해? 쓸데 없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만큼 이 음반에 대해 계속 떠들고 싶다. [Ghosteen]은 너무 좋은 음반이다.

린 램지 | 너는 여기에 없었다

린 램지 감독의 전작 [케빈에 대하여]는 보지 않았다.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이 영화를 볼 기회가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략적인 시놉시스를 읽은 후 그 영화를 봐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보지 않았다. 영화를 감상한 후 어떤 감정이 들어설지,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느끼게 될 그 감정이, 해야 할 그 이야기가 싫었다. [킬링 디어]를 보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때문이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색깔의 영화들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도 원래 나의 영화취향에 따르면 챙겨 볼 확률이 극히 낮은 쪽에 속하지만, 출근길에 들었던 [김혜리의 필름클럽] 팟캐스트에서 김혜리 기자가 그녀가 평소에 구사하지 않는 상당히 예외적인 표현을 동원해가며 찬사를 보냈기에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특히 그가 [드라이브]를 두어번 반복해서 언급했을 때(비록 그것이 조니 그린우드의 영화음악에 대한 묘사였다 하더라도) 마침내 이 영화를 집에 가자마자 꼭 챙겨봐야겠다 마음먹게 되었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감독/각본을 담당한 린 램지와 화면을 꽉 채운 주연배우 와킨 피닉스와 영화의 청각적 요소를 담당한 조니 그린우드, 이 삼총사가 빚어내는 호흡이 특유의 흥미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는 영화다. 영화의 서사구조는 단순하며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직관적이다. 전직 군인으로 추측되는 ‘조’는 해결사로 일하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다. 거의 매일 자살을 시도하는데, 어머니가 살아있는 한 정말 자살할 생각은 없어보인다. 그가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도 어린 시절 겪었던 학대와 군인 시절 경험한 살인, 혹은 죽음에 대한 경험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조’의 회상으로 그려지는 이와 같은 과거 장면들은 찰나의 시간동안 단편적으로 스쳐지나갈 뿐이다. 과거 회상씬 뿐 아니라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이 ‘조’, 혹은 그를 바라보는 인물의 시선으로 처리되는데, 그러니까 영화는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진행이 되거나, 그런 주인공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서사구조가 헐겁다고 느끼는 관객이 있을 수 있으며 영화의 단순한 서사구조만을 따라가다 금세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친절하게 선후관계를 설명해주기보다 한 상황을 넌지시 제시하고 관객에게 많은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데, 그 설계가 꽤나 촘촘하게 이루어져 있어 영화 속 상징을 오독하거나 숨어있는 서사를 놓치는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빈틈이 많기 보다는 비어있는 공간을 관객이 적극적으로 채워나가게 하는 매력이 있는 영화인 셈이다. 음악으로 치면 The XX의 1집 음반같달까. 이 묘한 ‘비어있는 꽉참’은 독의 연출과 피닉스의 연기, 그리고 그린우드의 음악/음향이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영화의 제목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그 자리에 없는 것으로 추정되어야 하는 해결사 직업을 가진 ‘조’의 삶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조금 더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 ‘조’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 가졌던 관계성을 전이시키게 되는 ‘나나’와 함께 떠나게 되는 새로운 여정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가 맞이하는 터닝포인트는 ‘조’가 현역 주지사의 심복인 상원의원으로부터 그의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뒤 어린 소녀들을 감금하고 유린하는 사창굴로 찾아 들어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안에 ‘나나’가 있다. ‘나나’의 발견은 ‘조’의 유일한 삶의 이유였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귀결되고, ‘조’는 자신과 같은 괴물로 변해버린 ‘나나’와 함께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상원의원과 주지사가 사망한 이 꽤 큰 사건의 한복판에 서 있는 ‘조’와 ‘나나’가, 현역 경찰관까지 매수되어 아무한테나 함부로 총질을 해대는 이 세상에서 전과 같이 온전히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디로 갈지 알 수도 없으며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조차 없다. 이런 막막한 상황에서 ‘나나’는 “날씨가 참 좋다”고 웃으며 말하고, 아마도 ‘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좋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 정도일 것이다. 즉, 그들은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죽음으로 가고 싶어했던 한 사내가 자신이 모든 것을 걸고 지키려 했던 어떤 존재를 상실한 후, 사실상의 죽음을 얻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그리 틀린 설명은 아닐 것이다.

연출은 감각적이다. 피닉스의 연기는 여전히 훌륭하다. [마스터]와 [그녀], [조커]를 지나 [너는 여기에 없었다]까지 다다르니 살짝 피로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 얼굴보다 황정민 얼굴을 더 많이 볼 때의 피로감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그가 다작을 한다고 사실때문에 그의 연기력을 평가절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조니 그린우드의 영화음악은 [데어 윌 비 블러드]에 비하면 훨씬 정교하고 노련해졌다. 그래서 그 당시의 참신한 맛은 많이 사라졌지만, 이제는 정말 당당히 당대 최고의 영화음악가라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린 램지의 영화는 처음 접했는데, 호불호가 갈릴 법한 방법론을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저력이 느껴져 오히려 더 좋았다.

김애란 |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소설가의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에는 좋은 문장들이 넘실거린다. 당대 최고의 작가와 자신의 문장사전을 비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겠지만, 책을 읽다 보면 똑같은 순간을 포착하고 느꼈음에도 난 왜 저리 아름답게 표현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우매한 내 머리를 자주 흘겨보게 된다. 김애란의 글은 참 좋다. 300쪽 가까운 책을 읽으며 단 한번도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순간을 마주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그와 내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이 조금 다른 사람도 고깝게 생각하지 않고 그의 글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김애란의 글이 가진 또다른 힘 덕분일 것이다. 진심. 그의 글에서는 항상 진심이 느껴져서 좋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글에서 [두근두근 내인생]의 모체를 목격하는 신비로움을 느끼게 되고, 동료 작가를 묘사하는 글에서는 타인에 대한 진득한 애정이 묻어나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느낌이라 그 묘사의 대상을 전혀 모르는 나까지도 덩달아 애정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만 같다.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는 글, 용산참사 유가족을 바라보는 글에서는 역설적으로 그와 같은 인간이 이 시대를 함께 살아주고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차가운 반지하방같은 현실을 드러내는 문장 속에서도 꿋꿋하게 스며든 유머나 긍정의 힘 뿐 아니라, 모든 문장에 대해 오롯이 책임을 지려 하는 그의 꼿꼿한 시선 때문이기도 하다. 그가 이 한국사회를 함께 살아주어서 참 고맙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의 뒤에 서서 독자와 약간의 거리를 둘 수 있었다면 수필은 독자와 직접 마주 대하는 느낌이라고 밝혔는데, 독자인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에드워드 사이드 | 경계의 음악

[경계의 음악]은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미국에서 주로 활동한 음악가이자 문명비평가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클래식 음악 비평을 모은 음악비평집으로, 1983년부터 2003년까지 약 20년에 가까운 사이드의 평론을 모아 집대성한, 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지난 여름부터 책상 위에 두고 약 3개월여에 걸쳐 읽었는데, 그 이유는 책이 두꺼워서라기 보다는 빠르게 읽어내려가는 것이 아까워서였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이 책에 수록된 그의 글은 주로 [더 네이션]과 같이 정기적으로 발간되는 비평잡지에 수록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분량 자체는 그리 길지 않지만, 그 짧은 평론글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느린 호흡으로 음미하며 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풍부한 배경지식과 깊은 성찰을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하루에 두편, 혹은 세편 이상의 평론을 읽는 것이 벅차게 느껴졌으며, 한 편의 평론에 포함된 음악가의 음악을 듣고 관련 정보를 더 찾아 본 후에야 사이드의 평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에선가 언뜻 김애란 작가도 이 책을 집 안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디저트를 먹듯 하루에 한 편씩 천천히 읽어내려갔다는 내용을 접한 기억이 있다. 실로 이 책은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는 클래식 음악과도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른다. 지식을 과시하는 용도로 음악을 활용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쪽이지만, 무언가에 대해 ‘안다’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자신감과 함께 실제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인류가 쌓아올린 가장 견고한 예술적 성취 중 하나인 클래식 음악을 그저 피상적으로 접해온 것에 대해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도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다. 사이드의 평론은 이러한 나에게 클래식 음악을 접하는 교과서적인 지침을 전달해줌과 동시에, 음악이라는 무형의 예술을 평가하는 방법론적인 차원에서도 많은 가르침을 전달해주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사이드는 특히나 클래식 공연 비평에 공을 들였는데, 기록으로 영구히 남게 되는 음반과 달리 공연은 그 이벤트가 행해진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바로 휘발되어 버린다는 특수성이 있으며, 사이드는 그 특수성을 면밀히 포착하여 당시 ‘현재’에 존재했던 미세한 공기의 움직임까지도 생생하게 기록하고 분해한 뒤 그 안에 숨은 음악적 의미를 철저히 파헤친다. 사이드 평론의 또다른 특징은 당대의 걸출한 음악가 모두 그의 날카로운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모두가 칭송하는 연주자, 지휘자, 음악학자 모두 사이드 앞에서는 그저 수많은 단점을 가진 존재일 뿐인데, 단순히 깎아내리기 위한 비판이 아니라 사이드만이 가진 철저한 기준 위에서 단단한 논리를 가지고 행하는 비판이기 때문에 건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니까 욕을 먹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그런 수준의 비판이다. 마지막으로 사이드의 비평은 지역적인 특성을 지닌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며 유태인의 시오니즘에 반대해온 그가 반유태주의로 유명한 바그너의 음악을 면밀히 관찰한다는 그 형식 자체로 이미 책의 전반부부터 충분한 흥미를 자극하는데,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연주자 겸 지휘자 바렌보임이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여 불러일으킨 논란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에 다다르면 그의 시선이 매우 객관적으로 정제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대의 지식인들이 가끔씩 놓치게 되는 대목들, 예컨대 다수의 대중에 휩쓸려 소수의 천재가 곤궁에 처할 때 그를 구출해주지 못하는 비겁함 등에 대해서까지 지적하는 모습을 통해 촘스키의 표현대로 “지행합일의 모범”으로 추켜세워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도 나와 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우선 이 책에서 사이드가 비판하지 않고 오직 칭찬만 늘어놓은 유일한 음악가인 글렌 굴드의 음악을 반복해서 틀었고, 미처 구입하지 못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반을 위시리스트에 올려놓았다. 음반목록 어딘가에 잠자고 있던 바그너의 오페라 선집을 꺼내들었으며, 브루크너, 쇤베르크, 바르톡 등 아직 시도해보지 못한 현대음악가들의 음반 역시 위시리스트에 올려 놓았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극적으로 넓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에 적은 것처럼 비록 조심스러울지언정 새로운 세계로 한걸음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이미 큰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무척 뛰어난 번역가에 의해 번역되어 있다는 점을 꼭 기록해두고 싶다.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는 내내 번역으로 인해 미간을 찌푸리는 일이 단 한번도 없었을 정도로 유려한 문장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 읽는 기쁨이 더욱 풍성해졌다.

타마라 젠킨스 | 프라이빗 라이프

최근, 그러니까 몇 개월 전 우리 부부는 임신을 했다. 2016년 말 결혼 이후 약 2년 반 만에 처음으로 가진 아이인데, ‘첫 아이’라고 표현은 했지만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한꺼번에 생긴, 약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새로운 생명으로 인해 우리 가정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부부를 둘러싼 다른 가족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뻐했다. 이번 임신을 꽤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고작’ 결혼 후 2년 반 만에 가진 아이였다. 본격적으로 임신을 준비한지는 1년이 채 되지 않았고, ‘불과’ 몇 개월 간의 실패(그러니까 부모 양 쪽의 몸으로부터 출발한 난자와 정자가 정해진 시간에 적절한 방식으로 만나지 못한 결과로 조용히 각자의 생을 마감하는 것을 이쪽 업계에서는 보통 실패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끝에 임신을 하게 되었으니, 세상에 존재하는 수 많은 난임, 불임 부부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우리 부부는 상당히 무난하게 임신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몇 개월의 ‘실패’의 기간동안 많이 힘들어했다. 함께 많이 울었고, 또다른 실패를 겪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을 새롭게 공부해야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성교육 시간에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며 여성의 ‘주기’와 착상 등의 정보에 예민하게 집착했고,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임신이 힘들다는 판정받을 경우 받아들여야 하는 여러 대안들을 준비해야 했다. 인공수정, 체외수정, 난자기부 등 다양한 기법들을 먼저 경험한 부부들의 경험담을 들으며 그들이 겪은 고통을 마음 속으로 나누기도 했고, 우리가 대체 얼마나 큰 행복을 얻으려고 이 고생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아마 우리 부부만 이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부부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었고, 이 세계에 미리 들어와 고군분투 중인 수 많은 엄마, 아빠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프라이빗 라이프]는 넥플릭스에서 제작한 영화로, 타마라 젠킨스라는 감독이 자신이 직접 쓴 각본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이 감독의 전작들을 본 적은 없지만 이 영화가 발표된 해 최고의 영화들 중 하나로 손꼽혔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고, 최소한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로 올라갈 정도의 작품은 꼭 보고 싶어하는 성미 덕분에 넷플릭스 위시리스트에 오래 전부터 올려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이 영화를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영화의 줄거리가 우리 부부가 최근 겪어온 현실과 지나치게 가깝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영화라는 예술은 현실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만 관객이 속해있는 현실과 지나치게 가까울 경우 오히려 그 관객으로부터 거부당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화란, 현실에 기반하여 제작하되 어느 정도의 추상화(abstraction) 과정을 거쳐 보편화, 일반화(universalization)시켜야 비로소 관객이 조금은 마음을 놓고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실을 환기시키되 현실로부터의 도피처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 조금은 복잡한 영화의 속성 때문에 우리같은 ‘기피’관객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프라이빗 라이프]의 주인공 레이첼과 리처드 부부는 뉴욕에 사는 40대 중산층으로, 거실 한켠에 쌓여 있는 주사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마도 꽤 오래 전부터 임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듯 보인다. 두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살면서 각자의 직업도 충실히 꾸려오고 있는 부부지만, 오직 삶에서 아이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 둘을 임신에 대한 “집착”으로 이끌게 된다(영화 속 이들 부부와 친한 친구 부부 간 대화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영화는 인공수정과 입양이라는, ‘정상’적인 임신방법을 통하지 아니하고 아이를 가정에 들일 수 있는 ‘대안’을 마주하게 되는 이 부부의 이야기를 주된 서사로 다룬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체외수정의 건조한 각 단계가 하나의 챕터를 형성하는 가운데 인공수정을 위해 한 부부가 겪어야 하는 끔찍한 병원에서의 체험이 긴 인트로처럼 보여진다. 어떠한 이유로 인해 타인의 난자를 제공받아야만 하는 상황과 과거 입양을 시도했으나 어이없는 이유로 실패한 사연 등이 순차적으로 보여진 후, 영화는 일종의 순환고리와 같은 구조로 부부의 ‘반복되는’ 삶을 조금씩 뒤틀어 다시 보여준다. 과거에도 수많은 시도를 했고 실패를 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밝힌 후, 이 부부가 또 한번의 실패를 겪는 과정을 영화의 주된 서사구조로 활용하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또 다른 시도의 첫 출발점을 보여줌으로써 이 부부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삶을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 것임을 적극적으로 증명하고 예언하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조카 세이디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 떠들썩한 한바탕 소동이 마무리된 후, 주인공 부부인 레이첼과 리처드는 다시 평범한 일상 속으로 들어가 반복되는 삶을 경험하지만, 큰 사건을 겪은 그들의 삶은 더이상 전과 같지 않다. 그 예로 할로윈 기간 사탕을 얻기 위해 부부의 집을 찾아온 꼬마들을 대하는 부부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들 수 있다. 오직 임신에만 집착하여 동네 꼬마들에게 사탕 하나 내어줄 마음 속 여유조차 갖지 못했던 이들이 닉슨과 힐러리 클린턴의 가면을 쓰고 아이들에게 어떤 분장을 했는지 물어볼 정도의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영화는 딱 이정도의 성장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다. 50대의 문턱에 다다른 중년의 부부가 아이의 ‘결여’를 내적으로 극복해내는 과정은,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사실 그렇게 극적이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동안, 충분한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며 아주 서서히 성장하는 가운데 이겨내야 하는 것이 보통의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의 과제다. 영화는 그 과정을 상당히 현명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나름대로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 절실히 기다렸던 아이가 이번달에도 오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 고통은 커져갔다.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을 찍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남들은 다들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임신이라는 것이 왜 우리에게만 이토록 어렵게 오는지 괜히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쌍둥이를 아내의 배에 가득 안은 지금, 당시 상황을 복기해보면 ‘왜 그렇게 오버했나’ 싶어 금세 부끄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 그 자체임을 잊으면 안된다. 우리 모두는 아이를 갖던 갖지 않던, 결혼을 하던 하지 않던, 그 어떤 상황에 있건, 매우 미숙하고 어리석은 존재다. 그 미숙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과 아주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인생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느린 속도로 어떤 방향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는 말도 맞다. 거북이처럼, 달팽이처럼, 조금씩 인내하며 움직이다보면 어떤 지점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임신의 과정을 통해 이 교훈을 조금 더 배웠다. [프라이빗 라이프] 역시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 언노운 걸

다르덴 형제는 변화하고 있다. 전작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어슴프레한 희망을 내비쳤던 이들은 [언노운 걸]에서 본격적으로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작과 이번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잘 알려진 전문배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일텐데, 이와 함께 이 두 영화를 다르덴 형제의 필모그래피의 다른 영화들과 구분지을 수 있는 지점은 희망의 메시지를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영화적 시선의 변화에 있다.

젊고 유능한 의사 제니 다방은 이제 막 3개월 임시 주치의 생활을 마치고 꽤 좋은 조건을 제시한 큰 병원으로 옮길 참이다. 하지만 마침 그날 저녁 몇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같은 병원에서 수련의로 있던 인턴 줄리앙에게 의사로서의 사명감에 사로잡혀 몇 마디 쓴 소리를 하던 와중 밖에서 들려온 벨소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게 된다. 병원 문을 닫은지 한 시간 지난 뒤 찾아온 손님을 웬만해서는 받아들이는 그녀였지만, 왠지 그날따라 줄리앙을 훈육시킬 목적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외부의 손님을 거부한 것이다. 줄리앙은 무언가를 느낀채 화가 나 뛰쳐나가고, 제니는 다음날 자신을 찾아온 형사들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자신이 거부했던 그 손님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젊은 흑인 여자였고, 그날 밤 병원으로 들어가려는 요청이 거부된 뒤 근처 공사장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큰 병원으로부터의 이직을 거부한채 임시 주치의로 있던 병원을 아예 물려받기로 결심하고, 그날로부터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채 죽어야 했던 흑인여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와 함께 자신에게 심하게 혼난 후 의사로서의 꿈을 꺾은 제자 줄리앙을 찾아가 다시 의사의 길을 걸어갈 것을 설득한다.

사회의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에 위치한다고 보아야 할 위태위태한 영혼들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 영화의 주인공은 대표적인 중산층 직업인 의사의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속 인물의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다르덴 형제는 이 사회의 부조리함이 빚어내는 윤리의 위기는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고, 이 윤리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 역시 사회의 구성원 그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감정들이 이끌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는 죄의식, 죄책감, 부채의식과 같은 감정들인데, 영화가 극적인 반전을 맞이하게 되는 지점 역시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에서 익히 보아온 바대로, 죄책감을 느낀 주인공의 마음 속으로부터 출발한다. 환자들을 프로페셔널하게 치료하는 것에만 집중하던 제니는 자신의 무신경함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한 여성의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속죄와 참회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실 어쩌면 그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우연한 기회를 맞이하여 마음속에서부터 그 감정을 꺼내는 과정을 겪었을 뿐이다.

그녀가 짧은 순례의 길을 걷는 동안 마주치는 세상은 그녀에게 새로운 차원의 구원과 자유를 경험하기에 충분한 순교의 고통을 선사한다. 서류가 미비되어 원하는 치료를 받지 못하자 제니를 위협하는 사람도 있고, 제니가 타고 가던 차를 억지로 세운채 더이상 깊게 파지 말라고 협박하는 사내도 있다. 윤리가 결여된 세상에서 그녀가 걷는 속죄의 길은 의사라는 직업적 특수성과 결부되어 영화의 주제의식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늘 환자의 부름을 받는다. 환자가 있는 곳에는 언제, 어디라도 뛰어간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자신을 찾아온 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때문에, 더이상의 늦은 시간 벨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아예 잠자리를 병원으로 옮겨 새우잠을 청한다. 비록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환자가 죽음의 비밀을 감추려는 사람, 자신을 위협한 사람이라 해도 제니는 왕진가방과 함께 그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순간, 공권력으로부터도 경고를 당한 그녀에게 이름 모를 여성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고, 제니가 쌓아올린 속죄와 참회의 마음을 나누어담는다. 이것이 영화 속 작은 기적일까. 영화의 마지막 씬은 평화로운 표정으로 또 다른 환자를 맞이하는 제니의 모습을 담는데, 이 장면에서 비로소 제니도 구원을 얻은 것처럼 보이고, 그녀가 속한 세계에서 자유를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제니가 정성을 쏟은 또다른 인물인 줄리앙이 전해준 기쁜 소식은, 제니가 구축하려 한 세계가 다음 세대로 전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친다.

우울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다르덴 형제 영화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 선사하는 희망찬 메시지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다르덴 형제의 오랜 팬들이 가질법한 또다른 불만은, 제니가 당면하는 과제들이 어쩌면 쉬워보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삶은 생존의 경계에서 몸부림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윤택하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베푸는’ 쪽에 속하는 사람이며, 그녀는 단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어떤 여성에게 가지는 죄책감으로 인해 이 모든 일을 행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지점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 이전까지의 영화들은 너무나 극한 상황에 몰린 이들이 겪게 되는 심리적 고통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 인물들이 선택하거나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어떤 상황들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지는 면이 다소 존재했다. 리얼리즘이라고 하지만 너무 극적인 것이다. 하지만 [내일을 위한 시간]과 [언노운 걸]은 결이 조금 다르다. 얼굴이 많이 알려진 전문 배우가 화면을 가득 채운 이 영화들은, 어쩌면 피할 수도 있었을 미묘한 상황에서 피하지 않고 용기를 내는 보통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가 과감히 마리옹 꼬티아르와 아델 아에넬을 캐스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보통의 관객들에게 ‘움직일 것인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기 위해서는 이런 배우들이 아니면 안되는 거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나가는 아델 아에넬의 연기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표정 하나, 동작 하나에서 제니의 고뇌가 느껴진다. 다르덴 형제의 원래 방식대로 무명의 연기자를 캐스팅했다면 어쩌면 매우 위험해질 뻔한 영화였다는 생각도 든다.

이동우 | 노후 대책 없다

영화는 홍대 놀이터 앞에서 공연 중인 한 펑크밴드의 모습을 담는 것으로 시작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와 차라리 소음에 가까운 디스토션 기타, 드럼을 때려부수기 위해 스틱을 휘두르는 듯한 드러머 등이 어우러진 이 4인조 하드코어펑크 밴드는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노후 대책 없다]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파인더스팟이고, 영화는 또다른 주인공 스컴레이드와 파인더스팟이 함께 떠나는 짧은 여정을 함께 한다. 영화의 감독이자 카메라를 주로 들고 있는 촬영감독이기도 한 이동우 본인이 밴드의 멤버이기도 하다. 멤버들의 인터뷰와 공연장면이 교차 편집되는 기본 구성에 로-파이 가득한 홍대 지하실의 습한 공기를 가득 품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 굳이 서사구조가 있다면, 두 밴드가 일본 도쿄에서 열린 작은 하드코어펑크 페스티벌에 참여하면서 겪게 되는 크고작은 소동들의 연대기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비추어지는 한국의 하드코어펑크씬은 규모가 그리 커보이지는 않는데, 어쨌든 그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맺어지고 열정이라던지 실망과 같은 구체적인 감정들이 오고가는 와중에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 사는 젊은이 몇몇이 멀지만 가까운 해외로 나가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무언가를 느끼고 돌아온다. 언뜻 보면 ‘일베’같아 보일 정도로 입에서 욕이 떠날 때가 없으며, 때로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답없는 젊은 세대의 망가진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멤버들은 번듯한 직업이 있거나, 사회운동을 하다 감옥에 들어갈 처지에 놓였거나, 오래전부터 꾸준히 일관된 프로젝트에 몰두하거나 하는 식으로 각자의 세상을 소중히 꾸려온 사람들이다. 부모의 집에 얹혀 사는 처지이지만 최소한 자신의 생계는 스스로 꾸려가기 위해 노력하며, 사고를 쳐서 직장에서 잘렸다면 편의점에서라도 그 삶을 이어가려 애쓴다. 이들이 말하는 ‘펑크’정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군대 휴가를 나와 술에 취한 나머지 멀쩡한 식당의 수족관을 깨부순 이가 몇 달 뒤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 가게 사장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모습은 ‘한국’의 특수성과 어떻게든 타협해보려는 ‘펑크’의 모습처럼 읽히기도 한다. 중간에 단편선과 같은 꽤 유명한 사람도 등장하는데, 이들이 언급하는 여러 무거운 이슈들은 두 밴드 멤버들의 어처구니 없이 웃긴 모습에 치중하던 전반부에서 어느정도의 ‘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제법 진지해지는 영화의 후반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영화에 따르면, 스컴레이드와 파인더스팟,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는 동지들은 나름의 진지함을 가지고 있다.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예술인’들이며, 자신들의 시선에서 충분히 부조리한 세상에서 나름의 행동을 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동하는 지성인들이다. 물론 이들의 행동이 사회의 평균적인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읽힐지는 또다른 문제이지만, 절망보다는 희망을, 냉소보다는 연대를, 말 뿐인 위로보다는 현장에서의 행동으로 상징되는 이들의 모습이 마냥 ‘대책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펑크라는 음악장르가 기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 혹은 남성중심주의의 한계는 영화 속 밴드들의 모습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밴드 안에 여성멤버가 있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부분의 공연장면과 인터뷰장면에서 강하고 그릇된 형태의 남성성의 발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정작용을 바라는 것은 씬의 특징을 고려할 때 아무래도 무리이겠지만(실제로 SNS를 통해 감독 및 출연진의 성추행 의혹 논란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러한 한계까지 적나라하게 관찰된다는 점에서는 영화가 갖는 또다른 의미가 없지는 않은 셈이다.

2016년 이 영화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공개된 후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고 결국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기존에 존재하던 정적인 방법론에서 과감히 벗어나 날 것 그대로의 ‘펑크’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론을 택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영화는 무겁지 않고 오히려 밝은 편이다. 멤버들이 또 어떤 사고를 칠지 몰라 전전긍긍해 하지만 않는다면, 노이즈 가득한 기타사운드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마지막까지 즐거운 기분으로 볼 수 있는 영화다.

Long Beard | Means to Me

밴드명이 “Long Beard”라고 해서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백인 힙스터 남자를 떠올려서는 안된다. 롱 비어드(Long Beard)는 레슬리 비어(Leslie Bear)라는 젊은 여성 뮤지션의 무대이름이다. 레슬리 비어는 뉴저지에 위치한 럿거스 대학교에 재학 중 이 악기 저 악기 만져보며 음악을 만들어보던 중 루프 페달의 도움을 받아 혼자 녹음 및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2009년부터 학교 주변 펍 등에서 작은 규모의 공연을 시작했다. 로컬샵을 통해 EP 등을 제작, 유통해오다 2015년 정식으로 레이블을 통해 데뷔 음반 [Sleepwalker]를 발표했고, 올해 새로운 프로듀서로 크레이그 헨드릭스(Craig Hendrix)를 영입하여 두번째 음반 [Means to Me]를 내놓았다. 크레이그 헨드릭스가 누군고 하니, 제패니즈 브렉퍼스트의 멤버 중 한 명일 뿐 아니라 미쉘 자우너와는 그녀의 필라델피아 시절 밴드 리틀 빅 리그(Little Big League)부터 함께 한 그녀의 오랜 음악적 동반자 중 한 명이다. 헨드릭스가 함께 작업한 또다른 뮤지션으로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은 스네일 메일(Snail Mail)이 있다. 굳이 프로듀서 때문에 자우너를 언급한 것은 아니고, 롱 비어드가 직접 제패니즈 브렉퍼스트의 투어 베이시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어쨌든 롱 비어드의 음악을 들으며 제패니즈 브렉퍼스트와 스네일 메일을 연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몽환적인 목소리와 리버브를 잔뜩 먹인 기타사운드가 주도하는 사운드 뿐 아니라 음반을 관통하는 사색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의 가사와 음반의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잘 지켜나가는 좋은 흐름의 측면에서도 최근 각광 받는 여성 로파이-드림팝 뮤지션들과의 접점을 꽤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다. 2019년에 등장한 꽤 좋은 드림팝 음반인데, 요즘 내가 꽂혀 있는 아시안-어메리칸-여성 인디 뮤지션 계열로도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종적 뿌리가 어디인지는 아무리 찾아도 잘 나오지 않는다)

첫번째 음반을 발표하고 신나게 투어를 돌고 난 후, 레슬리 비어는 다시 고향인 뉴저지로 돌아온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에 취직도 하는 등 자리를 잡는 듯 했던 그녀에게 친구들이 물었다고 한다. “‘집’이 뭔데?” 오랫동안 익숙하고 안락한 장소였던 곳이 어느 순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때 느껴지는 쓸쓸함의 정서가 롱 비어드의 새 앨범 [Means to Me]의 테마를 관통하고 있다. 마치 어린 시절부터 함께 놀던 친한 친구가 성인이 된 후 각자의 길을 가면서 서서히 멀어지는 것처럼, 고향이라 불렀던 장소가 더이상 과거와 같은 안락함을 제공하지 못할 때, 고향을 다시 찾은 여행객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레슬리 비어가 낮게 읊조리는 노래는 과거의 친밀함과 현재의 쓸쓸함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노스텔지아적 감정의 파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래들은 대체로 차분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이 정서를 청각적으로 재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2019년에도 이런 느낌의 인디 음악이 계속 나오는구나 싶어 반갑기도 하다. 당연히 어떤 노래는 좋고 어떤 노래는 조금 빈틈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 편차가 크지 않아 음반을 몇 번 반복해서 듣는다 해도 크게 지루함을 느끼는 정도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는 슈게이징 특유의 몰아치는 느낌이 서정적인 멜로디와 썩 좋은 호흡을 보여주는 “Sweetheart”와 음반의 타이틀곡이자 멜랑꼴리한 정서를 좋은 기타솔로와 함께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Means to Me”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