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정보 수정

블로그 유저이름과 도메인이름을 수정했다. 이제 더이상 내 영어이름으로 구성된 블로그 주소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내 영어이름을 통해 이 블로그에 들어오던 분들은 당황하셨을 수 있다. 하지만 유입이 가능한 연관검색어 또한 익히 알고 계실거라 생각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기작성된 댓글에 표시된 이름은 수정이 되지 않는다 ㅠ)

약 25년 전 한 여행사 직원의 실수로 인해 탄생하게 된 나의 영어이름은 그 자체로 너무 특이해서 쉽게 검색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블로그를 만들고 글을 쓸 경우, 회사의 직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사내기밀을 블로그를 통해 유출하지 않는 한 크게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관리가 불가능한 수준의 불특정 다수에게 이름이 노출된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조금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아내의 의견이었다. 교수라는 직업의 특성 상 어쩔 수 없이 많은 검색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어쩌다 블로그나 SNS를 접하게 된다면 의도치 않은 사생활 공개를 감수해야 할 확률이 높다. 나뿐만 아니라 내 인스타 계정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아내의 계정까지 털릴 수 있었기에, 인스타그램도 비공개 계정으로 전환했다.

가끔 아버지의 이름을 검색해보곤 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아버지는 당신에 대한 근거없는 비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대중을 상대로 책을 거의 쓰지 않았고 대부분 비슷한 수준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글을 써왔기에 인터넷에 퍼진 아버지에 대한 평가와 학계에서 받는 평가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는 그런 글을 보면 화가 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저서를 한권 한권 이해할 수 있게 되자 근거없는 비판에 대해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교수는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돈을 받으며 한다는 큰 이점을 챙기는 대신 그렇게 획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더 나은 교육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사회적 책무도 가지고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글에 대한 근거 없는 오해와 비판이 발생한다면 그 과정에서 잘못된 것은 무엇인지 설득시켜야 할 의무도 일정부분 있는 셈이다. 어쨌든, 학문적 내용이 아닌 사생활과 관련하여 논란을 만드는 것은 교수가 가장 먼저 피해야 할 부분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한 곳

볼더에서의 마지막 1년은 무척 단조로웠다. 입학 시절부터 함께 했던 친구들은 먼저 볼더를 떠났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기에는 마음이 너무 어지러웠다. 수업을 맡지 않고 학과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타인과 대화할 기회 역시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도서관이나 집에서 논문을 마무리하는 일에만 집중했지만, 조여오는 시간의 압박 속에서 글이 제대로 나올리 없었고 볼더를 떠난 지도교수님은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번씩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안식처는 학과 건물 근처에 있는 작은 커피숍이었다.

이니스프리 북스토어(Innisfree Bookstore). 가게 이름만큼이나 아늑하고 조용했던 그곳은 어지러운 내 마음을 조용하게 다독여주는 공간이었다. 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호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잠시 쉬어갈 여유를 제공해주는 작은 섬. 그곳의 주인은 내가 막연하게 그려왔던 전형적인 시인(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예이츠)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성공한 비지니스맨의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였다. 내가 가게에 들릴 때 그는 거의 항상 가게에 있었는데, 단 한번도 커피를 직접 내리거나 계산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저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시집들 사이에서 손님을 응대하며 여러가지를 묻고 답할 뿐이었다. 나에게도 몇번 말을 걸어주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가게에 들려 같은 메뉴(핫초콜렛)를 시키는 동양인 남자를 기억하지 않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날은 내가 입구에 들어가서 인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핫초콜렛을 내어준 적도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하던 직원 한명은 나를 “핫초콜렛 보이”로 불렀다.

그곳을 떠날 때 가게 이름이 적힌 텀블러를 꼭 하나 사오고 싶었다. 그 가게를 기억하며 매일 커피를 담아 출근하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1년, 2년 길어질수록 다시 볼더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일주일에 다섯번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소주와 맥주를 섞은 맛없는 술을 마시면서도 웃으며 이야기해야 하는 삶이 반복될수록 볼더에서의 마지막 1년이 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그랬던가, 싶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결국 참지 못하고 금감원을 박차고 나올때 많은 이들의 걱정을 전해들었다. 많은 이들이 높은 연봉과 안정된 생활을 왜 굳이 포기해야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고, 아마도 나를 어리석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국회를 나올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가 부럽다”라는 말 속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는 부드러운 힐난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우는 두 곳에서 사표를 내고 제발로 걸어나왔다. 한국에 사는 많은 이들이 금감원에 들어가고 싶어하고 행정사무관이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곳을 평생 직장으로 생각한다. 그만한 보상이 있어서일 것이다. 금전적이든 사회적 지위든 권력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당시 나는 그 보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답게 사는 것.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것. 이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태어날때부터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 학교에서, 사회에서, 친구들에게, 책에서, 텔레비전에서 조금씩 인자를 받아 개인이 가지고 태어난 특유한 성정과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필연과 우연이 묘하게 결합되어 만들어진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결정체이다. 나는 단 한번도 내가 공부를 잘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공부를 일생의 업으로 삼기에 충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스무살 이후 내 삶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질책의 연속이었다. 내가 정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논문을 쓸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이 일로 돈을 벌어 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왔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단 한번도 남들보다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남들보다 월등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도 못한다. 그저 누군가의 뒷꽁무니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며 살아남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렇게 괴로워하며 가까스로 학문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렇게 살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매일 똑같은 커피숍에 들러 똑같은 메뉴를 주문하듯,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토록 되고 싶었던 ‘나다움’이 무엇이었을까. 어려운 공식 하나를 완전히 이해할 때 느껴지는 쾌감때문이었을까, 인류의 역사를 일군 지성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에서 황홀함을 느꼈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그저 공부를 하는 순간만큼은 내가 살아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고, 그 펄떡이는 맥박과도 같은 확신이 서울의 더러운 공기 안에서도 나를 숨쉬게 만들었다. 그게 내가 발견한 ‘나다움’이었다. 그걸 막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숨이 막히는 듯한 절박함을 느꼈다. 공부를 더이상 하지 못하는 환경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그렇게 한국에서 제일 좋다는 직장 두개를 때려치우고 나왔다. 어쩌면 두번의 좋은 기회가 내 삶에 찾아왔고, 그것을 그냥 포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렵게 학위를 받은 나에게 안정적인 삶이라는 보상이 두 번이나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어제 한 학교로부터 최종합격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서울이 아닌 곳에 위치한 건실한 국립대인데 당장 올 3월부터 내려가 강의를 해야한다. 소식을 받은 어제는 매우 당황스러웠고 얼떨떨했다. 가족들이 오히려 흥분했는데, 정작 나는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어 별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하는 말만 반복했다. 뛰어난 논문을 쓴 것도, 화려한 커리어를 가진 것도, 견실한 강의경력을 보여준 것도 없었다. 길고 힘든 길을 시작하는 마당에 경험이나 쌓아보자는 생각에서 지원한 학교였다. 교수로서의 삶이 이렇게 빨리 올지, 이런 방식으로 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교수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거의 매일 해왔다. 하지만 정작 교수가 된다고 생각하니 그 어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교수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 학문을 한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학문을 하는 와중에 교수라는 직업이 주어지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 큰 영광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 학교 근처에도 이니스프리 북스토어같은 커피숍이 있을까? 매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어려운 논문을 읽고 하루에 하나의 문장이라도 제대로 쓰기 위해 애쓰는 와중에 잠시 들려 따뜻한 커피를(이젠 커피다!) 마실 수 있는 그런 곳이, 그 학교에도 있을까? 내가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다독여줄 수 있는 그런 곳이 있을까? 지금 이미 그런 곳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아내라는 든든한 커피숍이 내 옆에 있다. 그래서 이 길고 긴 여정이 더이상 외롭거나 힘들지 않다. 낯선 곳으로 또다시 이주해야 하는 현실도 두렵지 않다. 더이상 혼자가 아님에 감사한다. 그리고 아직 나의 여정이 끝나지 않았음에 감사한다. 여전히 공부를 못하고 머리도 좋지 못한 나이지만, 다시 한번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기회를 ,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음에 감사한다. 이렇게 또 열심히 살아보겠다.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 문제

최근 법무부와 금융위에서 가상화폐 거래소를 폐쇄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중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온 뒤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강한 반발여론이 형성되었고, 정치권에서도 4차산업 흐름에 역행하는 정부정책이라는 비판여론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해프닝으로 끝날지 더 깊은 수준의 논쟁으로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이번 갈등이 최근 한국을 중심으로 불고 있는 가상화폐 투기 문제가 불러 일으킨 또 하나의 사회적 비용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하다.

우선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 다양한 형태의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폐, 혹은 가상화폐는 ‘화폐’가 아니다. 이 상품에 대한 시장가격의 변화가 극심하여 가치의 저장수단으로 활용이 거의 불가능하고, 공급량이 제한적이므로 물물교환 수단으로서의  활용가치도 극히 제한적이다. 화폐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은 노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잉여생산물, 혹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주관적 가치들을 명목적이고 객관적인 가치, 즉 시장가격으로 환산해주는 것이다. 암호화폐는 그 자체의 시장가치의 변화가 너무 극심하므로 다른 가치를 환산해주는 객관성을 내재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이 암호화폐의 가치(일반 화폐로 치면 기준금리)를 적절히 조절해줄 권위적인 화폐 공급자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암호화폐가 화폐가 아니라면 이것이 투자인지 투기인지 구분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투기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암호화폐를 구입함으로써 발생시킬 수 있는 경제적 파생효과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암호화폐를 구입하고 판매하는 행위를 반복할 때 발생하는 경제적 이득은 차익실현 정도만이 있을 뿐, 그 과정에서 투입된 금액으로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경제활동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차익실현을 통해 돈을 벌 것이고, 그 돈으로 아마 소비 등 다른 경제활동을 하게 되어 행복감을 추가적으로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암호화폐 거래행위가 투자의 영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암호화폐에 투입된 금액이 GDP에 잡히는 어떤 생산적 경제활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즉 암호화폐 생산자가 암호화폐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무언가를 하던가, 암호화폐 자체가 무언가 일을 하던가 해야 한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그 자체로 어떠한 경제행위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암호화폐로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이란 것이..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더 나아가, 암호화폐의 가격형성 과정을 지켜보면 시장의 과도한 ‘기대감’이 가격상승을 부추기는, 전형적인 폰지스킴(Ponzi scheme)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심리적 요인에 의해 내재적 가치보다 더 높은 가격이 형성되고 이로 인해 반복적인 차익실현만이 존재할 뿐 어떠한 실질적인 경제효과로 이어지지 못할 때, 이 현상을 투기로 판단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폐의 역할도 할 수 없고 투기양상을 보이고 있는 시장이라면 정책당국 입장에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판단할 여지가 생긴다. 관건은 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고, 정책적 해결책은 정확한 원인분석에 기인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경제불황기에 발생하는 ‘유동성 선호이론(liquidity preference hypothesis)’가 발현된 현상이라고 본다. 유동성 선호이론에 따르면 경기가 불황기에 접어들면 통화당국에서 시중에 돈을 풀기 위해 이자율을 낮추고, 낮아진 이자율로 인해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떨어진 화폐가치로 인해 안전자산에 대한 투자수요가 감소하게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안전자산이란 은행예금부터 선진국의 우량채권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다 경기 불황이 심해지면 소위 ‘안전자산 함정(safety asset trap)’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시장에서 우량채권이라고 믿었던 선진국의 채권이 극심한 경기불황으로 인해 비우량채권으로 평가절하되면서 시장에 안전자산의 공급이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을 의미한다. 실제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포르투갈과 같은 서유럽 국가의 채권 등급이 급락하면서 위험자산으로 평가받은 전례가 있다.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시중에 풀린 값싼 투자자금을 저장해둘 좋은 안전자산이 씨가 마르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비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유동성 선호이론의 핵심이다. 즉, 통화당국의 정책적 판단에 의해 시중에 공급된 유동성이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로 이어져 경제적 불안정성을 증대시키고 변동성을 높인다는 이론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몇년간 이어진 저성장과 저금리기조로 인해 시중에 유동성이 과잉공급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과잉공급된 유동성은 지금까지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가 최근 몇년간 수도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유발시키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정책당국에서는 LTV와 DTI를 조절하고 신규분양과 재개발 등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등 부동산 시장으로의 유동성 쏠림현상을 막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 시장의 특징 중 하나는 주식시장과 달리 목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소 몇억원의 종잣돈이 있어야 시장 진입이 가능하다.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층이나 목돈이 없는 서민층은 애초에 게임 플레이어로 참가할 수 없는 구조다. 하지만 이러한 소규모 자본을 가진 이들 역시 유동성 선호이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노동에 대한 대가인 임금은 갈수록 박해지는 환경에서 수중에 가진 돈도 몇푼 없는 이들이 발견한 시장이 바로 암호화폐 시장이다. 암호화폐는 몇십만원, 혹은 몇백만원으로도 시장진입이 가능하며, 현재까지 세금도 붙지 않고, 계좌 개설 등에 있어서도 그 과정이 매우 간편하다. 별다른 금융지식이 없어도 쉽게 돈을 넣고 불릴 수 있는 낮은 진입장벽의 시장인 셈이다. 암호화폐 시장에 돈을 넣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한 이들을 “개미”라고 칭한다면, 한국의 암호화폐 시장을 굵직하게 움직이는 “기관”은 유산상속 등 거액의 거래를 세금 부과 없이 하려 하는 중산층 이상의 자본가들일 것이다. 암호화폐의 형태로 증여할 경우 손쉽게 탈세가 가능하다. 이들이 움직이는 큰 덩치의 돈이 암호화폐 시장의 평균가격을 움직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즉, 현재 한국의 암호화폐 시장이 과열된 투기 현상으로 변질된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통화당국의 정책실패때문이지, 소규모 투기자들의 비이성적 판단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정책당국이 암호화폐시장을 “도박판”으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현재 암호화폐 시장의 비정상적 과열현상은 장기간에 걸친 저금리기조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사회적 문제로까지 인식된 암호화폐 시장 과열 문제를 거래소 폐쇄 등의 방법으로 풀고자 한다면 이는 근시안적 미봉책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암호화폐 시장에 쏠린 유동성을 실물가치 생산에 대한 투자가 가능한 주식시장 등으로 돌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초단기매매 등 차익거래에 지나치게 집중한 거래형태에 대한 강력한 세금부과라던지, 거래횟수 제한이라던지, 거래 규모 제한이라던지, 방법은 많다. 이 시장이 탈세 등의 목적을 위해 음성적으로 사용되지 않게 막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를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문적인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투기에서 투자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시장에서도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장상미: 지금은 없는 동네|옥수동 트러스트

[지금은 없는 동네|옥수동 트러스트]는 필자 장상미가 운영하던 위치 기반의 사진 기록 저장소웹사이트를 책자 형태로 정리한 결과물로 보인다. 옥수동 13구역은 성동구 옥수동의 윗쪽 끝자락에 붙어있는 지역이다. 이 구역은 2011년 9월 재개발이 시작되어 2016년 11월 ‘e편한세상 옥수파크힐스’라는 이름의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탈바꿈되었다. 재개발이 되기 전 이 구역으로 필자인 장상미가 입주했을 당시 그녀는 전세 보증금 1,500만원으로 반지하방을 구할 수 있었지만, 지금 옥수파크힐스의 가장 작은 평수대 아파트를 한채 구입하려면 8억원이 넘는 돈이 필요하다. 금액으로 환산된 가치의 간극만큼이나 필자가 남긴 사진 속에 존재하는 동네의 이미지와 현재 같은 공간에 세워올려진 마천루의 이미지는 몹시 달라보인다. 낡은 칼국수집과 이발소 사이에 자리잡고 누워 인간과 체온을 나누었던 길고양이들의 행방을 묻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질 정도로 지금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계급과 그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의 계급 사이에는 차가운 금속과 콘크리트, 시멘트 따위만이 빼곡히 존재할 뿐, ‘동네’가 던져주는 따스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는 강제이주계획은 오래된 도시 서울이 그나마 가지고 있는 마지막 미덕인 커뮤니티의 역사조차 영(0)으로 돌려버리는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면모 중 하나다. 서울에서 그나마 아름다운 동네는 대부분 달동네들이다. 그곳을 개발하는 유일한 방식이 ‘완전히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올리는’ 것 뿐이었는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법은 없었는지, 도시계획쪽 전공이 아닌 나는 뻔한 답이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우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옥수동 바로 옆에 위치한 금호동이다. 인구의 90%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옥수동과 달리 금호동은 예전부터 존재했던 달동네와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가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다. 가판대가 널려있는 금남시장과 장진우가 새로 문을 연 식당이 같은 골목에 위치해 있고, 고급 외제차가 쉴새없이 쏟아져나오는 신축 아파트 바로 옆에 바다이야기 따위를 취급하는 성인오락실이 성업중이다. 이곳도 곧 옥수동처럼 변할 것이다. 수십년 자리를 지키던 나이많은 이들이 얼마의 돈을 받고 다른 곳으로 떠나갈 것이다. 금호동이 간직했던 역사는 콘크리트 밑에 파묻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사라질 것이다. 이 책의 필자와 같은 사람이 금호동에 한명이라도 있다면, 몇 장의 사진 정도로 금호동의 역사를 기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너무 많은 역사들이 가볍게 취급되고 있다. 도시의 역사는 이보다는 조금 더 중하게 기억되어야 한다.

케네스 로너건: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 by sea
아마존을 통해 배급되고 성추문에 휩싸인 배우 케이시 애플렉이 주연한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영화를 둘러싼 그 모든 주변적인 이야기들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 아무런 제약이 되지 못함을 일깨우는, 다른 말로 하면 영화를 읽어내려가는 데 있어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는 영화가 가진 본질적인 힘 그 자체뿐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구조는 다층적이며 촘촘하고 빈틈이 없다.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장면 하나, 대사 하나에도 영화가 제시하는 주제의식의 무게가 묵직하게 실려있다. 배우들은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선보이며 서사구조는 완벽에 가깝다. 미국 동북부의 작은 해안도시가 갖는 황량하고 쓸쓸한 이미지는 영화의 조연으로 묵묵히 힘을 보탠다.

세상의 바닥 끝까지 떨어진 한 남자가 감정을 거두어 들인채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것처럼 생활한다. 그러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은 충동적인 반사회적 행동을 통해 현실의 거울에 비추어진다. 그가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의지했을 가족이었던 형의 죽음으로 인해 찾아온 철부지 조카의 후견인 역할은 세상에서 끊임없이 도망치려 하는 그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른채 절망하는 그에게 세상은 잔인하게도 당연히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요구해온다. 갑자기 인서트되는 과거회상 장면은 지나칠 정도로 장엄한 배경음악과 함께 현재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절제하려 하는 그의 내면이 얼마나 폭발적으로 미칠 것 같은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찰서에서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이미 충분히 무너져내린 그에게 세상 물정을 모른채 아버지의 배를 고집하는 조카의 어린 영혼은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세상이 내려준 마지막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사랑이 솟아나고, 절망의 끝에서 한줄기 희망을 본다.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주인공의 상황이 담담히 묘사되는 가운데 영화는 묘하게 희망적인 방향으로 조용히 나아간다. 독한 말을 쏟아내었던 것을 사과하고,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애원한다. 그렇게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들끼리 서로 등과 어깨와 손을 내어주며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이다. 낡은 배의 모터를 다시 달고 어딘가 처박아 두었던 낚시대를 다시 꺼내 조용히 세상과 마주하는 엔딩씬에 다다르면 이 영화가 마법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영화적 마법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게 된다.

결혼, 우리.

결혼한지 이제 막 1년이 지나 아직 경험이 일천하긴 하지만, 지난 1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1년이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더 많은 행복이 찾아왔다. 그래서인지 결혼생활에 대해 묻는 주변 지인들에게 내가 경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기만 해도 ‘결혼 전도사’처럼 비추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결혼은 철저히 개인의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그 누구에게도 결혼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결혼이라는 생활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잠재적 갈등 유발 요인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힐 수 있는 ‘합’이 맞는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에 결혼생활을 “행복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 보편적인 결혼생활의 진리, 혹은 규칙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아이 두명을 아파트 아래로 던져 살해하고 본인도 스스로 생명을 끊은 한 젊은 어머니에 관한 뉴스를 읽었다. 세 명의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절망적인 결혼생활도 있을 수 있다.

지난 1년 간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아 보자면, 먼저 ‘나’를 버리고 ‘우리’를 추구한 삶의 근원적인 변화를 들고 싶다. 지독한 개인주의자이자 가끔 이기적일 때도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보다 더 우선시되는 가치에 헌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이들이 퇴근 후 한잔의 술, 휴일 낮 한번의 게임, 월급의 일부분을 할애하면 살 수 있는 예쁜 옷 등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나의 경우, 결혼 이후 존재하기 시작한 가정이라는 가치가 그 모든 개인적인 욕망보다 상위에 존재할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친구를 만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충실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멀어지게 된다. 무언가를 포기함으로써 얻게 되는 가치는 기회비용의 크기에 따라 후회나 아쉬움과 같은 감정적인 비용을 지불해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 포기와 희생은 어렵고 힘들다. 그런데 가정에의 헌신, 혹은 ‘내’가 아닌 나와 아내로 구성된 ‘우리’라는 또다른 자아로부터 시작되는 주체적인 판단은 그 어떠한 희생이나 포기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자아이며, 나를 버림으로써 새롭게 얻게 되는 놀라운 기회의 출발점이다. 가정 안에서 내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나를 지키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며, 나의 개인적인 욕심과 가정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갈등할 이유도 없다. 이러한 삶의 변화가 무척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직장에서의 나,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나, 부모나 형제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나는 존재할지언정, 그 모든 나를 떠받드는 근원이자 본체인 가정에서의 나는 철저히 ‘우리’로부터 출발한다. 이 ‘서열’이 한번 정해지면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욕심과 가정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고민을 할 이유가 현격하게 줄어든다. 모든 것을 아내에게 이야기하고 아내와 함께 결정하면 될 일이다. 단순히 서로의 속내를 적당히 ‘공유’하는 사이가 아니라 ‘공동체’로서 함께 모든 것을 함께 결정하고 실천하는 관계로 부부를 정의하기 시작하면서 삶이 훨씬 편해지고 밝아졌다. 아내의 밝고 건강한 기운을 왜곡없이, 오롯이 전부 다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나 역시 전과 다르게 세상을 보기 시작했고, 아내를 닮아가면서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 나의 절반은 아내로 채워질 것이고, 아내의 절반도 나로 채워질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리’가 조금씩 완성되어 갈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결혼은 ‘우리’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시기부터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유학생활까지 삶이 늘 ‘혼자’였다고 느끼며 살아온 내게 아내를 만나 완전히 다른 자아로 새출발을 한다는 것은 전에 없는 삶의 큰 변화였다. 그래서 지금도 적응 중이고, 아직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다. 한없이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기에 이 거대한 변화를 단기간에 완벽하게 체화시키는 일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러하기 때문에 노력이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진득하게 아내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고 많이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기에 닮아가는 과정에도 많은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닮아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다. 재미있고 행복하다.

2017년 실망스러웠던 음반들.

구입은 했으나 별로 좋게 듣지 못한 음반에 대해서는 블로그에 글로 그 감상을 남기는 것을 꺼려하는 편이다. 순수한 아마추어 입장에서 특정 음반에 대해 굳이 나쁜 말을 해서 얻을 것이 뭐가 있나, 하는 심정이 들기 때문이다. 음반을 구입하기 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문적인 평을 확인하고 미리 음악을 들어보는 과정을 거치지만, 그러한 조심스러운 사전작업에도 불구하고 실망스러운 음반을 손게 들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올해 음악계는 큰 기대 그에 걸맞는 클 실망을 안겨준 음반이 많이 나온 것이 하나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중 ‘굳이 언급해야만 하는’ 음반을 딱 다섯장만 추려본다.

masseduction_st vincent
세인트 빈센트(St.Vincent)는 아마도 현재 활동 중인 기타리스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뛰어난 테크니션이자 그녀만의 독창적인 기타사운드를 멋진 음악에 무리없이 버무릴 수 있는 천재적인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작 [Masseduction]은 기타소리 속에 뮤지션이 파묻혀 보이지 않는 재앙이 발생했다. 톡톡 튀는 기타소리는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그것 외에는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지루함의 연속이다.

lcd
LCD 사운드시스템의 음악을 좋아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들이 위대한 밴드라는 사실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단 한번도, 단 한곡도 내 마음과 이들의 음악이 제대로 연결된 적이 없다. 이번에 나온 음반 [American Dream]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이번에는 다르겠지’라는 기대를 안고 음반을 사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들의 음악은 정말 지루했고 재미가 없었다. 그냥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고 하고 넘어가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너무 많다. 그것을 매너리즘이라고 표현해도 많이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thexx
디 엑스엑스(The XX)가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 그리고 이들이 불어넣은 엄청난 기대감, 더 나아가 이들의 어린 나이까지 감안했을 때 [I See You]는 결코 이정도의 완성도에 머물면 안되는 것이었다. 음반은 산만하고 어지럽다. 완성도의 측면을 떠나 정말 절망적이었던 것은 이들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대단함, 그러니까 ‘비워냄으로써 채워지는’ 신묘한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극단을 보여주었던 1집과 비교할 때 상당한 퇴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 음반이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다.

Threefuttorres
토레스(Torres)의 전작 [Sprinter]는 무척 좋았다. 혹자는 그 해의 음반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젊은 여성 뮤지션, 깨어 있고, 신선한 음악을 들려주는 젊은 여성 뮤지션! 이정도면 다음 음반부터 쭉쭉 앞으로 나아갈 길만 남은 것처럼 느껴져야 한다. [Three Futures]는 나처럼 터무니없는 기대까지 하는 사람까지 토레스가 감당해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게감을 이겨내지 못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음반의 흐름은 종종 끊기고 곡마다의 이미지는 설득력 없이 겹치거나 분리된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오히려 중심이 흔들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음반에서 회복될 여지는 충분하다.

아케파
하지만 그 누가 뭐라 해도 올해의 최악의 음반은 단연코 아케이드 파이어의 몫이다.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믿음, 혹은 근거없는 자신감이 극단적인 수준에 도달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참사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음반이다. 그들은 뛰어나다. 천재적이다. 그런데 멍청하다! 가장 사랑하는 밴드에서 가장 기대되지 않는 밴드로 격하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8년의 목표

목표는 원래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해 있는 것이다. 목표로 했던 계획이 틀어지는 와중에 겪게 되는 일들이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음의 다섯가지 목표는 꼭 지켜졌으면 좋겠다.

1. 처음보다 더 많이 아내를 사랑하겠다.

2. 가족의 수를 늘리고 싶다.

3. 양가 부모님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많이 보겠다. 한번이라도 더 자주 손을 잡아드리겠다.

4. 내집 마련의 기틀을 마련하겠다.

5. 논문을 세편 이상 쓰겠다. 그 중 한편 이상은 반드시 SSCI급 이상을 쓰겠다.

개인적인 취미생활에 대해서라면, 52장의 음반과, 52권의 책과, 52편의 영화를 접하고 싶다. 일주일에 한 장의 음반,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 정도라면 마음의 가난함을 달래줄 수 있는 최소한의 목축임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래서 블로그에 52장의 음반에 대한, 52권의 책에 대한, 52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